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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nzlerin Feb 09. 2020

독일 직장인도 퇴사하고 싶을까?

다른 나라 사람들도 요즘 이러나

요즘 들어서는 퇴사 콘텐츠가 활발해졌다. 지금은 전에 비해 한 풀 꺾였지만 인터넷을 통해 본인을 브랜드로 만다는 인플루엔서들도 우후죽순 늘어났다. 요즘은 어르신들도 유튜브로 즐겨 보는 영상 콘텐츠가 넘쳐날 정도니 소통의 패러다임이 바뀐 건 확실하다. 그 말은 곧 수익 창출과 개인 사업의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아이템이 유형이든 무형이든 알리고 홍보하는 장소는 인터넷의 여러 공간에 마련되었어도 경쟁자가 금세 많아지니, 특별하거나 튀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이전과 변한 점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전보다 대안으로서의 퇴사에 대한 개인 개인의 마음은 환상의 가능성으로나마 열려있다. 


본인을 품어왔던 알을 깨는 행동은 무섭고 어렵다. 결정적인 계기가 아니면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도 한다. 미디어 콘텐츠의 새 패러다임은 그만큼 경험과 시점의 다양성이 중요한 시대라는 뜻도 된다. 학교나 사회, 전통을 통해 전해지는 사실들이 전부가 아니고 오히려 틀릴 수 있다는 의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나에게 잘 맞는 대안적 의견에 대한 욕구가 다양한 콘텐츠로 충당되는 것 같다. 호응이 높다는 것은 특정 욕구가 높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퇴사와 이직은 다른 삶에 대한 갈망이다. 그 자체는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동서양을 아우르는 공감지대이기도 하다. 오늘의 기사는 이러한 변화를 택한 독일 사람들을 보여준다.


애비 씨가 일을 하게 할라치면 그의 의뢰인들은 십만 유로 정도는 내놓아야 했다 (현 시각 약 1,3억만 원). 촬영 가격이 그 정도 한다. 애비 씨는 한 때 영화감독이었다. 광고를 찍었는데, 예를 들어 아우디 광고를 찍었다. 이런 류의 광고로 35년도 넘게 생계를 꾸리며 BMW, 메르세데스, 적십자, 이케아도 찍었다. 깐느에서 두 번 상을 받았는데 그건 광고계의 오스카상과도 같다. 애비 씨는 매우 잘 나갔다는 뜻이다. 다르게 보면 자신의 환경에 완벽히 적응했었다는 말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8년에 완전히 다른 세계를 위해 그 세계를 떠났다.


오늘날 애비 씨는 이제 매일의 양식을 벌기 위해 빵을 굽는다. 그는 제빵사가 되었다. 이제는 완벽한 촬영 장소가 아니라 완벽한 반죽을 원한다. 올바른 카메라 위치가 아닌 올바른 오븐 온도를 맞춘다. 그는 행복하다고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약간 미친 얘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 속에 진솔하게 묻어 나오는 건 변화를 향한 간절한 바람이다. 완전히 새로 시작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본인의 직업을 오랜 기간 해왔고 굉장한 성공을 누렸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하루를 다른 일로 채우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보다 더 의미 있게 여겨지는 일들, 혹은 좀 더 큰 재미를 주는 일들로 말이다. 


이런 불안함은 배가 부른 소수의 허황된 문제가 아니다. 독일 경제 연구소에 의하면 근로자 중 8분의 1이 직업에 불만족하고 있으니 환산하면 거의 600만 명이다. 갤럽 설문조사에 의하면 4명 중 3명의 근로자, 즉 3000만 명이 그저 "하라는 대로 일할"뿐이라고 한다.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하지만 열정 따위는 없다. 그러니 "불금 만세" 같은 유행어가 라디오에서조차 단골 멘트다. 직업을 즐기는 사람들이 드물다. 꼭 이렇게 살아야만 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매년 모든 근로자의 3퍼센트가 이런 질문에 힘차게 "예!"라고 대답하며 이직을 한다. 고로 약 130만 명이 그렇다고 근로시장 직업 연구소에서 밝혔다. 상인이나, 판매자나, 요리사로 직업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후에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고학렬 근로자는 이직이 보다 드물다. 하지만 어떤 통계도 이러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있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서점에 가면 이 주제에 대한 자기 계발서를 판매한다. "소명에서 직업으로 가는 꿈의 직장"이라든지 "하고 싶은 거 하며 돈 벌기", "행복해지는 직업을 찾아라" 같은 제목들이다. 추가로 "심장외과의사, 여행자 되다" 같은 부류의 책들을 통해 새시작의 롤모델들이 경험담을 전한다. 


애비 씨의 빵집 위치는 함부르크 시내다. 진열창에는 흰색으로 "bread."라고 쓰여 있고 내부에는 빈티지한 테이블이 판매대를 대신한다. 그게 다이다. "제 전 직업에도 그게 제일 좋았어요. 본질만에 집중하고 가능한 한까지 덜어내는 것. 다른 빵집은 커피와 간식 빵도 판매한다면, 저는 아주 특별한 빵 한 가지만 파는 거죠." 


광고업계를 떠난 이유를 물으니 61세의 그가 근본적인 이야기의 시동을 건다. 멋진 삶이기는 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피로해지고, 흥이 덜해지며 짜증 나는 일들도 많아져요." 예를 들면 지루한 국제 전화 회의 등이다. 애비 씨의 묘사에 따르면 우스꽝스러운 연극과도 같다. 연결은 툭하면 끊기고, 전화 너머 참가자들은 예고도 없이 들어오거나 갑자기 사라지고, 가장 중요한 매니저는 아마도 발을 책상에 올린 채로 말하기 때문에 말소리가 들리지도 않고 아무리 부탁해도 마이크에 가까이 와주지도 않는다.  


직업을 몇 년간 하다 보면 사랑 없는 결혼 같아진다. 잘못 짠 치약 통 같은 사소한 것들이 큰 불화를 초래한다. 애비 씨의 경우 디지털 시대에 의해 광고 분야가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영화 촬영이 점점 저렴해지고 간단해졌기 때문이다. "제가 처음 시작할 때 영화란 신비로운 것이었어요. 오늘은 누구나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고 편집할 수 있어서 금방 자신을 전문가로 착각해버리죠." 그래서 애비 씨는 대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며 영화를 계속 제작했다. 음식과 관련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식당을 해야 하나? 여러 종류의 사골을 고아서 판매할까? 여러 아이디어를 비교하다가 결국 빵에 다다렀다. 스위스 출신인 애비 씨는 함부르크에서 항상 고향의 빵을 그리워했다. 옛날에는 어머니가 바젤 역에서 빵 스무 개를 기차의 1칸 1석 뒤에 실어주면 함부르크에서 기다렸다가 꺼내오기도 했다. 


애비 씨는 함부르크에서 이 빵을 굽고 싶었다. 온라인 중고시장에서 화덕을 구매해 차고에 설치하고 밀가루, 온도, 굽는 시간을 실험했다. 영화 프로젝트 사이사이에 짬이 날 때마다. 스위스의 빵집에서 인턴쉽도 했다. 본인의 빵에 만족할 때까지 일 년이 걸렸다. 자격증 없이도 이 특정 빵을 판매하기 위해 수공업 회의소에서 특별 허가도 받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 제빵사 두 명이 차고의 화덕을 자세히 살피고 애비 씨의 부엌에서 빵 만드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렇게 허가를 받았다. 


당황한 동료들과 비즈니스 파트너들에게 이제부터 영화 대신 빵을 만들 거라는 설명을 하는 데까지는 몇 개월이 더 지났다. 그게 약 일 년 전의 일이다. 이제 그는 전 감독으로서 함께 빵을 굽는 제빵사 한 명, 수습생 한 명 (소말리아 피난민이다), 그리고 판매자 여러 명을 고용하고 있다. 그는 일일장과 가게에서 직접 빵을 팔고 베를린으로 확장할 궁리를 한다. 광고업계를 떠난 새로운 인생에 감사해한다. "옛 동료들도 그만두고 싶다는 얘기를 하지만 대안이 없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새로운 인생을 향한 동경의 원인은 다양하다. 애비 씨의 경우에는 직종의 분야 자체가 변화하고, 본인 자신도 변화했다. 경영 문학에서는 이런 경우를 "중년 커리어의 위기"라고 칭하며 어느 특정 나이부터는 누구든 직업에 싫증을 낸다고 설명하기는 한다. 하지만 2015년에 2만 2 천명의 미국인과 40년에 걸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나타났다. 오히려 나이가 많은 근로자일수록 평균 직업 만족도가 높았다. 그보다 중요한 건 같은 직장에 얼마나 오래 종사하느냐다. 한 번도 이직하지 않는 사람은 해가 지날수록 불만족이 조금씩 증가한다. 그러니 나이에 상관없이 변화를 향한 필요는 자연스러운가 보다. 


이 주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컨설턴트들에 의하면 다른 이유들도 추가적으로 존재한다. 컨설턴트이자 자기 계발서 저자인 드리스보크 씨의 고객은 변호사, 은행 종사자, 의사, 조종사, 기자 등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은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끔찍하게 불행해해요"라고 그는 말한다. 그가 파악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그의 고객들은 자신의 직업을 우연히 물 흐르듯이 택하게 되었거나, 진로 계획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전공을 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영인이나 법조인이 특히 자주 그렇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의 직업을 그들을 불행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삶을 사는 동안 생각과 가치관이 변모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20대 중반에 원동력이 되던 것이 40대 중반에 아직 매력적이랄 보장은 없어요." 


그의 주장에 따르면 불행한 사람들은 본인의 상황을 깨닫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문제는 그러한 상황을 바꾸는 것이다. "아이디어를 구상해도 동시에 온갖 걱정이 솟아나죠." 우유부단한 사람들의 레퍼토리는 다음과 같다: "그걸로 어떻게 먹고살아", "내 나이에 어떻게", "그런 거 하면 웃음거리만 돼". 이런 우려를 진중히 따져보는 것은 중요하지만 첫 순간부터 그러면 안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 봤자 자신을 막을 뿐이에요." 


기본적으로 본인의 미래에 관해서 체계적으로 전진하는 것을 많은 이들이 어려워한다고 한다. "그저 수년간 머릿속에 이리 고민하고 저리 고민하기만 하기도 해요. 그래 봤자 모호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행할 책임도 생기지 않으며, 결과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익숙한 낡은 것을 떠나기 위해선 결단력이 필수다. 특히 이직이 상식적으로 이해받기 어려울 경우 그렇다. 베르니케 양이 그랬다. 그녀는 10년 전에 은행 전문인에서 미용실로 이직했다. 돈을 다루다가 머리칼을 다루기로 결정한 것이다. 오늘 33세인 그녀는 전문 미용사로서 함부르크에 위치한 계열사 살롱의 원장이다. 


그녀는 이직할 시에 주변인들의 황당해하던 반응에 대해 회고한다. 처음에는 그녀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었다. "지난 주만 해도 주식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머리카락을 청소하고 있다니!" 직업학교의 학우들은 그녀를 의심 어린 눈초리로 응시하곤 했다. 그녀는 25살, 다른 수습생들은 16살이었다. 그녀가 중후한 신문을 읽을 때 그들은 페이스북에 한창이었다. 미용실에서는 고객에게 재정 상황에 대한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해서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것이 습관이어서 그랬다. 


그녀의 이직도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학교를 다닐 때만 하도 꿈이 분장 전문인이었다. 미용 상식도 포함되기 때문에 미용실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인턴쉽도 했다. 그러다가 남자 친구가 함부르크로 이사하며 그녀는 그와 같이 가기 위해 학교를 중퇴했다.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그녀는 반항했다. "혼자서 헤쳐나가야 했기 때문에 수입이 괜찮은 수습 직업이 필요했어요. 제 숫자 감각이 괜찮았고 누군가가 은행일을 해보라고 충고해서 지원서를 넣었죠." 그때 그녀는 17살이었다. 


은행 업무는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동료들은 좋았고 상사는 멋진 분이셨다. 함부르크 지점 은행에서 8년을 일했다. 그 후 안식년을 신청해서 수개월 간 미국을 여행하며 자유를 느끼고, 문득 생각할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다. 앞으로 내 인생의 40년을 은행에서 보내고 싶은지? 온라인 뱅킹이 상용화되는 요즘에 은행 지점이란 게 전망이 있기나 할까? 집으로 귀국하자 마침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가 시작됐다. 그녀의 고객들이 적금을 잃는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다. "그게 너무 충격이었어요." 갑자기 은행원이라는 직업이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았어요"라고 그녀는 회상한다.


그녀는 대안을 찾아 나섰다. 미용실에 수습직이 나는지 문의하고, 당시에 예비 법조인 수습기간 중이던 남자 친구와 그녀에게 남는 돈으로 생활이 가능할지 예측을 세웠다. 처음의 그녀의 계획은 반은 미용사로 일하고 반은 직업학교 강사로 일하는 것이었다. 결국 상사에게 그녀의 계획을 밝히는 날이 왔다. 그는 진심으로 공감해 주었다. 그 자신도 평생 경찰관이 되기를 꿈꿨다고 말해주기까지 했다. 


그녀가 퇴사하는 날, 동료들은 은행의 구내식당에 간이 미용실을 만들어서 작별을 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가위를 선물하고, 그녀는 일부러 머리를 기른 동료의 머리를 즐거워하는 관객 앞에서 잘라주었다. 오늘 그녀는 파트타임 점장으로 일하며 어린 자녀를 키운다. 이직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건 예외적 경우일까? 아니면 이직하는 사람이 정말 더 행복할까? 연구자들은 경우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사내 정황 상의 해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직하는 사람은 새 직장의 만족도가 전보다 높지 않은 편이다. 반면에 자발적으로 새로운 직업을 시작하는 사람은 후에 유난히 행복하다. 두 명의 독일 경제학자가 연구한 결과다. 일의 만족도도, 전반적 삶의 만족도도 자발적인 이직을 할 시에 껑충 상승한다. "행복의 증가가 장난이 아니에요. 결혼할 때의 절반 정도니까요"라고 연구진이 설명한다. 


하지만 이 행복감이 유지되는 건 아니다. 이직 후 2년 남짓이 지나면 행복의 증가가 다시 반토막 난다. 그래서 행복 연구자들은 허니문-숙취-효과라고 부른다. 새 직업과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일상이 되는 것이다. 열정이 점점 덜해지지만 감소의 폭도 점점 작아진다. 9년이 지나면 이직 전의 행복 지수로 돌아와 있다. 


이건 모두 평균값이라서 개별 사례는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류의 연구는 고용주를 바꾸는 경우에 집중하기 때문에 전과 다른 직업을 택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직종까지 바꿀 경우에는 행복감이 유지될 수도 있다. 행복 연구가 확연히 보여주는 것은, 실업만큼 깊고 긴 흔적을 남기는 사건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실패하는 이직도 큰일이다. 그러니 이직을 잘 준비해야 하겠다. 


용기를 내지 못하는 이들에게 강좌, 책, 컨설팅은 도움이 된다. 자신만만하고 목표지향적인 인물들은 그런 것 없이 성공하기도 한다. 위의 인물들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그들에게는 옳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컨설턴트들은 이렇게 극적인 선택이 흔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대부분의 고객들은 작은 변화를 택핬다. 동일 직종에서 다른 분야를 맡거나 이미 쌓은 경험으로 자영업을 시작한다. 이것만으로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일에 대한 기쁨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하는 건 누구나 동일한데, 꿈만 꾸지 않고 시작하는 것이다.


독일 대문호 괴테가 말했다고 알려졌는데 실제 출처는 모호한 말 중에서 "모든 시작은 작은 마법을 품는다"라는 말이 있다. 생각만으로 행복해지는 모든 근로자에게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럴 때 남의 기대, 나의 기대, 그리고 내가 속한 직종과 조직에게 좋은 일원이기 위해 집중적으로 주입되는 여러 가치들을 "근절"하는 순간이 온다. 담배를 끊듯이 모 아니면 도인 순간들이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본인의 의사와 결정에 유난히 확신이 가득한 사람들은 주위의 부담이나 역경에 오히려 에너지를 얻는 것 같다. 이직과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환경의 어려움이 당연히 있다. 하지만 환경을 탓하는 것보다는 정신적으로 득이 된다. 만약 그 사이에서 결정을 못하고 있다면 박차고 나갈 용기를 얻기 위해 잠시 분노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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