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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nzlerin May 16. 2020

독일 조직에서의 성공에 대해

새로운 시대가 시작할 수 있을까?

12월에 퇴사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대학이 직장이니까 퇴사와 퇴학의 중간처럼 느껴진다. 또 다른 대학의 풀타임 직장으로 등가 치환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까 이직도 아니다. 정말로 인생의 다른 챕터를 열려는 것이다. 대략 1년이 걸린 결정이다. 좀 더 일찍 행동으로 옮기려 했지만 코로나가 터져서 좀 더 편한 환경에서 혼자 생각할 기간을 가질 수 있었다. 작년 12월쯤부터 내가 인정받으려 했던 체제를 허물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부터는 말로 내 생각을 꾸밈없이 풀어가면서 참 시원하기도 했고 생각도 점차 정리할 수 있었다.


신기한 것은 독일에서 체험한 내적 과정인데도 요즘 한국에서 자주 보이는 퇴사 관련 글들과 내용이 거의 똑같다는 것이다. 내 감수성이 한국적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조직이란 원래 만국 공통적 원칙에 부합하기도 하다. 아무래도 나와 맞지 않는 환경에서 억지로 순응하다 보면 자신을 꽈배기처럼 비틀게 된다. 비정상적인 상태가 확실한데도 괜찮다고 믿기 위해 여러 겹의 타당한 이유를 쌓아 올리게 된다. 다 가짜 이유인데 말이다.  


오늘의 기사는 상사가 상사의 종족을 자아비판하는 내용이다. 참 묘하다. 기업 고위직의 배부른 비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직이 싫다고 상사를 미워하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기업 내에서 변화를 담당하는 부서는 흥미로운 것 같다. "디지털"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신생 부서와 직책들이 주로 그렇다. 잘 아는 분야는 아니지만 두 번 입사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서 직접 설명을 들은 적은 있다.  


우리가 하는 일에서 상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이유는 뭘까? 성공을 위해서 희생해도 되는 것이 있을까? 성공은 우리를 바꿀까? 국제 기업 바이어(Bayer)에서 Digital Transformation 디렉터인 안드릭 씨는 철학 박사다. 전에는 미국에서 기업을 이끌었다. 그러니 커리어에 대한 전문가인 셈이다.


그리고 커리어에 대한 비판을 호되게 한다. 그가 최근에 출간한 책의 제목은 "성공의 공허함"이다. 성공은 공허함으로 가는 예정된 길이라는 내용이다. 직업적 성공을 미끼로 삼아서 현대의 직장은 우리의 자아 탐구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도덕적 불구자가 된다.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일, 위치, 성공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기자: 당신은 얼마나 성공 지향적인가요?

안드릭: 겉으로 보면 성공을 지향하는 사람이 틀림없죠. 저는 철학을 전공하고 입사한 후 중간 관리직에서 꽤 빠르게 승진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나를 성공 지향적이라고 부르면 기분 나빠했죠. 철학자니까 이 불편함의 원천을 이해하고 싶었어요.


기자: 그래서 책을 쓰셔서 현대 직장의 성공 신화를 비판한 거군요. 성공 욕구가 왜 싫으세요?

안드릭: 성공 욕구는 체제 순응의 유형이에요. 성공을 원하는 사람은 남들의 타당한 기대가 뭔지 항상 살펴야 하고 어떻게 부응할지 늘 고민해야 해요.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주변에서 받아들이는 선에서 맞춰야 해요. 그래야지 직장이 나눠주는 성공의 트로피를 받을 수 있어요. 다음 직장이라든지, 연봉 상승, 직업적 인정 등이죠. 이런 식으로 남의 기준을 따라가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요.


기자: 성공 욕구란 도덕적 자살 같다는 말이군요.

안드릭: 도덕적이라는 것은 자신 주변의 사고와 행동에 대해 언제든지 반대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필요할 때는 튀어 보여도 괜찮은 용기가 필요해요. 도덕적인 인간은 자신을 스토리처럼 얘기할 수 있어요.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어떤 가치를 따르는지. 직장이란 이 스토리의 일부이지 목적이 아니에요. 내 철학에서 도덕적 인간의 반대 유형은 공무원 (간부)예요. 외부 세상의 요구를 받고 기대에 부합하려고 노력하며 실행하죠. 그러다가 너무 멀리 갈 수 있어요. 한나 아렌트 같은 시대의 증인은 나치 범죄 간부 (Eichmann 재판 참조) 재판에 대해 글을 기고하며 그를 이렇게 묘사했어요. 주체적 생각이 전혀 없었고, 그 어떤 명령이 내려오더라도 충성하는 사람이었다고요.


기자: 외람되지만, 우리의 직장이 우리를 나치 범죄자의 환생으로 만든다는 주장은 심하지 않나요?

안드릭: 절대 그런 뜻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 사람은 양심 없는 공무원의 최종 유형을 상징하죠. 그의 사례는 끔찍한 예시여서 기준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어요. 그에 대한 묘사들은 음침하고 우울해요. 하지면 저는 그것을 읽으면서 매우 씁쓸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어요. 체제에 순응하면 특정 커리어 진로를 상금으로 주고 개인의 비판적 사고를 벌하는 조직적 논리는 지난 100년 동안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죠. 현대 산업 사회의 특징이에요. 환상을 가지면 안돼요.


기자: 그래도 그렇죠. 본인 커리어를 열심히 개발한다고 꼭 도덕적 시야가 가려지는 것이 아니고, 살인 체제의 조수가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안드릭: 우리를 도덕적으로 가난하게 만드는 구조들은 직장 상활에 기본으로 깔려 있어요. 성공 욕구라는 것은 산업 사회의 최고 미덕으로써 핵심 역할을 맡죠. 그걸 알아보는 감수성을 저는 일깨우고 싶어요. 어떤 용도에 자신이 쓰이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양심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용도인지 자주 성찰한다면 절대 범죄자가 안되죠. 쉬운 성찰은 아니에요. 두려움과 위험이 따르죠. 집단에서 안 좋게 튀어도 좋다는 용기가 간혹 필요하고, 결과도 감내해야 하죠.


기자: 직장에서 우리를 골 빈 간부와 예스맨으로 만드는 요소가 비단 성공 욕구뿐일까요? 그것보다는 권력 비대칭 때문이 아닐까요? 살기 위해서 직장을 다녀야 하니까요.

안드릭: 그건 그래요. 이걸 설명하기 위해 전문성이라는 단어를 쓸게요. 전문성이란 조직의 목표를 위해서 지키는 순종이에요. 산업 사회에서 필수니까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지키는 원칙이죠. 하지만 모두가 전문성에 의해 지배되지는 않아요. 성공에 눈먼 사람들은 전문성을 스포츠처럼 생각해요. 누구 말을 어떻게 잘 들어야 내게 부서를 맡기거나 봉급을 올려줄 확률이 높아질까? 이렇게 되면 도덕적 위험 지대에 들어서죠.


기자: 직장 생활을 위한 금욕주의 같은 걸 주장하시는군요. 일의 의미를 직접 창조하고 외부의 판단에 의존하지 말라는.

안드릭: 설교하려는 건 아니고 논리적 주장을 펼치고 싶어요. 스토아 철학가들은 한 가지 맞는 주장을 했죠. 남들의 인정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사실 노예라고요. 반면에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일을 한다면 우리의 일 그 자체가 일의 보상이 돼요. 우리 삶은 그저 커리어뿐이 아니에요. 각자의 삶의 길은 유일해요. 커리어란 근본적으로 누구나 입성하고 누구나 퇴장할 수 있는 거예요. 커리어만큼 독창적이지 못한 것은 없어요.


기자: 직장에서 완전히 주체적일 수 있다는 말은 매우 비현실적인 상상 아닌가요? 그리고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을 찾기 위해서 외부의 반응이 필요하지 않나요?

안드릭: 맞습니다. 현재 시대의 특수한 발달이에요. 중세시대에는 태어나면 계급이 정해져 있었죠. 너는 농부고 그건 신의 계획이며 네가 있을 곳이다. 변화할 이유가 없었죠. 오늘은 사상의 다양성이란 것이 생겨서 세상의 질서에 대한 정답이 없어요. 자신의 인생의 공식을 직접 택해야 하죠.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남들에 자신을 비춰야 해요. 어느 정도의 체제 순응은 그러한 이유로 현대 사회의 필수 요소고 일리가 있어요. 하지만 주변의 행동에 대해서 우리가 도덕적 존재로서 간직해야 할 반대 의지를 아예 소멸시키면 안 됩니다. 


기자: 조직의 지도부가 인정의 강압에서 탈피할 수 있는 집단이라고 하셨어요. 

안드릭: 상사들은 체제 순응의 소용돌이에서 탈피해서 변화를 꾀해야 해요. 그들의 역할은 이중적이죠. 한 편으로는 속한 조직의 논리와 목표에 순응해서 전문성을 보여야 해요. 다른 한 편으로는 속한 조직의 전문성을 뚫고 새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해요. 예를 들어서 기업의 외부 환경이 크게 변할 때. 신기술이 임박할 때 주로 그렇죠. 법 체계가 바뀔 때도 그렇고요. 리더십이란 기존의 전문성을 전문적으로 부수는 거예요.  


기자: 책을 읽으면서 플라톤의 동굴 비유를 생각했어요. 일반 사원들은 동굴 안에 갇히고 벽에 그림자를 현실로 여겨요. 반면 상사들은 철학자처럼 동굴을 떠날 수 있고 그림자 뒤의 현실을 봐요.

안드릭: 리더라면 인격 전체를 활용해야 해요. 기존에 굳혀진 방식이 왜 틀렸지? 현실적 대안과 원칙이 뭐지?라고 질문해야 하죠. 이걸 철학적 성찰이라고 해요. 그렇게 부르는 것이 어색할 뿐이죠. 기업의 리더는 철학하는 인격체로서 일해야 해요.


기자: 플라톤에 의하면 철학자야말로 이상적인 국가의 지도자예요. 그러면 상사들이 직장 생활의 철학자 왕인가요?

안드릭: 어떻게 보면 조직의 철학자는 상사들이다, 라는 결론은 제 철학의 꽤 아름다운 결과이죠. 동굴 비유는 사용하지 않을게요. 플라톤은 그것을 통해 인간을 계급으로 나눴거든요.


기자: 상사들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아닙니까? 사장들이 더 많은 주도권을 가진 이유는 성찰이 더 깊어서가 아니라 위치가 높아서잖아요.

안드릭: 체제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력은 개개인의 그릇에 따라 다르죠. 제가 강조하고 싶은 건 개개인이 마주하는 권력 싸움이에요. 위치가 높을수록 자신의 전체 인격을 활용할 공간이 생기죠. 그걸 시도하라는 거예요.


기자: 본인이 처한 모순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상사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 아닐까요? 본인이 크게 성공한 매니저인데 성공 욕구를 비판하고 있으니까요.

안드릭: 나 자신이 상사가 아니라면 지금 철학적으로 정리할 만한 자료를 애초에 얻지 못했겠죠. 산업 체제 속의 상사는 체제를 유지시키기도 하지만 속에서부터 변화시킬 가능성도 가지고 있어요. 내 경험에 의하면, 그럴 만한 충분한 여지를 각자 싸워서 쟁취해야 해요.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조직인 이상, 쉽게 마음대로 하게 두지는 않아요. 나도 늘 자문하는 도덕적 질문이 있어요. 내 직장 생활에서 긍정적 변화에 기여하기 위한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지? 저의 경우 답은 "그렇다"입니다.


기자: 공교롭게도 성공에 눈먼 타입들이 고위직 상사가 될 가능성이 크죠.

안드릭: 맞는 말이고 문제입니다. 철학적 진심은 최고 성공을 위한 필수 요소가 아니에요. 어느 조직이든 독립적인 인간상보다 성공욕이 강한 인간상이 수직 상승에 선택돼요.


기자: 본인도 성공 욕구의 함정에 빠진 적이 있나요?

안드릭: 꽤나 빠른 승진을 제안받은 적이 있어요. 그렇게 됐고요. 하지만 그때 저는 다음 단계를 계산하는 기계가 된 기분이었어요. 항상 생각하고 있었죠. 이 프로젝트에 아군은 누구인가? 언제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갈등이 없을까? 어떤 정보를 지금 나누고 어떤 걸 보류할까? 어떤 기한을 어떻게 정할까? 모든 것이 하나의 조작 논리가 되어서 사물과 인간을 본인의 성공을 위해 배치하는 것이죠. 이건 비인간적인 행위예요. 그 당시에는 너무 일을 많이 해서 거의 집을 안 갔고 모든 인간관계를 방치했어요. 그때는 절제로 완전히 풀려서 시가를 어찌나 많이 피웠는지 위에 문제가 생겼죠.


기자: 성공에 눈먼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안드릭: 철학적 비판을 입 밖으로 내려면 항상 기존의 언어와 마찰을 일으키게 됩니다. 성공 욕구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있어서 조직 내의 최고 미덕처럼 취급돼요. 저라면 성공 욕구의 의미를 좀 다르게 표현하겠어요. 사람들과 일하는 것이 좋아서, 함께 큰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싶어서 조직의 리더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가치관이 있는 거예요. 그냥 위로 가려는 게 아니라 내용이 있잖아요. 저를 아는 사람들은 제가 남의 평판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반면에 내 목표들을 달성하는 것은 제게 매우 중요해요. 제 목표들의 의미를 깊게 성찰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저는 목표 지향적이지만 성공 지향적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지 불편하던 기분이 사라졌어요.


고위 직책을 맡은 기업 맨이 직장인들의 성공 욕구를 비판하다니- 배부른 소리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사실 남의 사정을 모르면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조직에서 튀는 것은 어느 위치에서든 위험을 동반한다. 성향에 따라서 그것을 즐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본인 커리어를 부루마블 게임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저울질할 직장인은 매우 적을 것이다. 생계는 물론이고 많은 가치관과 투자를 버릴 수는 없으니 말이다.


여담으로 상황에서 따라서 커리어를 과감히 버려야 할 때도 있는 것 같다. "Burning bridges" (강을 건너온 다리를 불살라 없앤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돌아갈 길을 남겨놓지 않는다는 뜻이다. 떠나야 하는데 떠날 결심을 쉬 서지 않는다던가, 관성의 법칙처럼 자꾸 돌아가려고 하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돌아갈 다리를 불태우는 것이 나은 것 같다.


오늘 기사의 핵심도 그런 것 같다. 커리어를 밟아온 다리는 그 자체로 내가 아니다. 그걸 버린다고 내가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 가진 다리와 머리로 새로운 길을 간다는 뜻으로 적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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