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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이중 언어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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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kanzlerin Nov 01. 2020

유년기와 철자의 언어

책과 유대감과 안식

책은 세상을 향한 내 창구였다. 이렇게 쓰니까 라푼젤처럼 어디 갇혀 있던 것 같지만 그건 아니고 다만 매우 수줍음이 많았던 것 같다. 원래 내향적이었는지, 타고난 사회성이 없었는지, 아니면 워낙 책에 코를 박고 있으니 사회성을 배우는 과정을 잠시 놓쳤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람들보다 책이 좋았던 건 확실하다. 그리고 나의 유치원에서 초등학교까지의 각별한 책 사랑은 한국 책과 독일 책으로 나뉜다.

독일에서 어린이가 한국 책을 많이 봤다고 하면 일등공신은 당연히 부모의 지원일 수밖에 없다. 내가 보채서 그랬는지 혹은 당연한 한국 부모의 정석적 교육열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에는 어린이용 한국 책 전집이 여러 종류 있었다. 기억이 나는 것만 꼽아도 고전 명작, 위인전, 전래동화, 교육 만화 등이 다채롭게 책장에 꽂혀 있었다. 그 당시에 부모님은 다른 한인 가정과 왕래가 잦으셨는데 그렇게 남의 집에 가서도 서재를 찾아서 홀로 낯선 방에 웅크려 책을 읽으며 몇 시간이고 보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전래동화 읽은 것을 나름대로 구현동화 인양 대사로 읊어서 김장하시는 어른들 앞에서 일인 다역을 연기한 기억도 난다. 아무도 시킨 사람이 없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즐거워하시던 기억까지 나는 걸 보면 마냥 수줍기만 한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숫기는 없고 친구 사귀는 기술이 부족해도 관심받고 싶은 마음은 넘쳤던 모양이다. 하지만 책이 사람보다 편했던 아이는 앞으로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계속 그렇게 자신의 세상에서 지냈다.

결국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은 아주 어릴 적부터 책이었고 그중 한국 책은 내게 가장 가까운 소사회를 향한 유대감을 마음에 심는 역할을 했다. 책 좋아하는 어린이라는 정체성이 꽤나 이득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서 더욱더 그랬던 걸 수도 있겠다. 억지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할 수 있었으니까. 사회성을 기르기 위해서 부모님이 독서 금지령까지 내리셨던 적도 있으니 내가 너무 한쪽으로 빠지는 것을 분명히 우려하기도 하신 것 같다. 실제로 나는 그 후에 초등학교 입학 후 몇 년 동안 동갑 친구들과의 미숙한 친목으로 인해서 적지 않은 고생을 하기도 했었으니까, 기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뾰족한 수는 없었을 것 같다. 사람을 사귀고 특히 동갑을 사귀는 것이 그때 나에게는 숨 막히게 답답할 정도의 힘든 일이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이중 언어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으니 한 번쯤은 눈 딱 감고 지나가야만 하는 과정이었다.

두 번째는 독일 책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역시 우리가 살던 동네의 자그마한 공영 도서관에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내가 살면서 진취성을 발휘한 적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혹은 내가 원했던 만큼 자주 발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는 동네 도서관을 제 발로 찾아가서 발굴한 후 오랫동안 밥 먹듯이 들락거렸다는 경력이 제1 순위 격이다. 마치 중학생이 게임에 중독되듯이 그 도서관의 책에 중독되어서, 정확히 말하면 모든 책을 다 보고야 말겠다는 식의 패기에 완전히 홀려서 책가방이 찢어질 정도로 책을 운반하고 다녔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의 상부 주제는 이중 언어이다. 게다가 콕 집어서 이중 언어의 숨겨진 이야기다. 취지로 말하자면 아무리 좋아 보이고 교육적으로 바람직해 보이는 목표도 명과 암이 있다는 사실을 얘기한다는 뜻이다. 좋고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교육적 영향과 모든 미래를 좌지우지할 함의를 그대로 내보인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서, 어린이의 책 중독은 정말 다양한 결과를 이끌어낸다. 하나는, 앞서 말했듯이 친구를 사귀고 완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서 지장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이걸 또 일타강사 요점정리 필수 정보 마냥 받아들이면 안 되고 그게 여러 다른 요소에 달려 있다. 나를 다스려도 가족이나 자식, 친척은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주변 환경도 마찬가지고 주변 지인과 친구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은 곳으로 가도 천적 관계는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런 것까지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판가름과 관철의 능력이 생기기 전까지는 겪어보아야 한다. 한국에서는 5학년 격인 독일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 가장 외톨이던 시절의 한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긴 설명을 짧은 그림으로 대신할 수 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학우들을 피해서 학교 도서관으로 냅다 피신했다가 마지막 일 분까지 책에 머리를 박고 위안과 평화를 찾던 한국 여자 아이. 중학교의 공기는 무겁게 기억에 남지만 중학교 도서관의 공기는 내 기억 속에서 오아시스처럼 상쾌하고 청량하고, 무엇보다 고민 없이 안전하다.

또 하나는, 언어와 행동이 책처럼 된다는 것이다. 이건 영어 배울 때도 비슷하게 되풀이된 현상인데, 많은 단어들을 철자로는 알지만 실제 발음은 전혀 들어보지 못한 적이 많았다. 그래서 실생활에 누가 그 단어를 한 번이라도 사용하는 것을 들었다 치면 놀랄 정도로 발음이 상상과 다를 때도 있었다. 한국 단어야 그런 차이가 없지만 독일 그리고 영어 단어는 발음이 예상과 빗나갈 때가 있다. 내가 책에서 배운 한국 단어를 사용할 때 어른들은 나를 자주 신기하게 봤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책에서 본 단어는 어른들이 보기에도 구어체이거나 보편적인 일상 용어가 아닌데 웬 이주민 여자 아이가 쓰고 있으니 약간 신기했을 것이고 착한 사람이라면 귀엽게 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실질적으로 돌아오는 이득은 없고 그냥 묘하게 이질감 드는 언어를 구사하는 어린애가 있을 뿐이다. 아마도 그때의 내가 지금보다 어휘 사용은 고급이었을 것이고 실제 그랬다고 부모님이 말씀하시지만 나는 모르겠다.

덧붙여야 할 것은 이런 발달 방향에 관한 부모님의 입김은 생각보다 적었다는 것이다. 아주 어릴 때야 한자 공부시간을 따로 가질 정도로 뭔가 열심히 하려고 하시기는 했지만, 시키지 않아도 책만 읽는 나를 보시고 마음을 많이 놓으시다가 서서히 나는 그냥 알아서 하게 두면 된다는 관성에 익숙해지셨던 것 같다. 그보다 더 힘들던, 내 앞길에서 나를 기다리던 다른 진짜 도전들은 이중 언어 인간만의 것이어서 부모님이 예견할 수도 도와주실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책, 고맙기도 살짝 야속하기도 하다. 유년기의 나를 사회의 일원으로 만들어 주었지만 묘하게 너무 일찍 미래의 나에게 더 적합했을 곳으로 보내버려서, 당장의 현실을 사는 나에게는 약간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이중 언어 인간에게 맞는 이중 세계는 이 세상에 없고 스스로 구축해 나가야 하는 것이니, 어쩌면 가능한 최적의 방향으로 이미 벽돌을 쌓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 벽돌 하나, 독일 벽돌 하나. 하나씩 차곡차곡, 굳건하게, 만리장성을 꿈꾸며. 이런 작업은 이치 상 당연하게도 밖과 겉을 만든다. 그래서 그 시기를 지나면 효과가 덜했을, 자발적이어서 더 적극적이던 언어 능력 축적에 따른 애로사항은 명과 암처럼 하나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