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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nzlerin Nov 01. 2020

이중 언어는 이중인격이다?

어느 언어가 제일 편하냐는 질문을 받는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사람으로 이해하는지와는 무관하게 가장 자주 듣는 질문들은 또 다를 것이다. 나는 어느 언어가 더 편한지에 대한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다. 꽤 흔한 질문이라고 한다. 이주민 자녀의 경험담 다수에 의하면 말이다. 아마 내 입장에서도 그게 가장 궁금할 것 같기는 하다. 나조차 한국말을 잘하는 교포를 만나면 호기심이 들끓으니까.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을 봐도 비슷하다. 그 순간만큼은 역지사지가 안 되어서 궁금증을 표출하게 되기도 한다. 왜? 도대체 홰 한국말을 그렇게 잘하는 거야?


한국어와 독일어 중 어느 언어가 더 편한지에 대한 내 대답은 거의 똑같다. 이제는 외운 것처럼 대답이 나오는데 나름 나도 대답을 할 때마다 곱씹게 된다. 주제에 따라서 다르다고. 감성적인 주제나 가족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한국어가, 일상의 얘기를 할 때는 독일어가, 업무나 연구의 주제는 영어가 가장 편하다고 말이다. 그렇게 치면 각각 해당 언어를 가장 많이 쓴 영역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한국어는 가족과 감성과 감격의 언어, 독일어는 인과관계나 절차의 언어, 영어는 학문과 개념의 언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각 언어의 느낌도 다르다. 한국어는 가볍고 유연하고 날렵한데 묵직한 한 방이 있다. 독일어는 건조하고 팍팍한데 정교함과 아주 희소하게, 투박해서 더 허를 찌르는 순애보가 있다. 영어는 다목적 커터칼처럼 용도에 따라서 거추장스러운 자신의 마무새를 그때그때 증발시켜 주는 유용성이 있다.


그 언어를 영위하는 이중 언어 인간의 느낌도 재각각 달라진다. 즉 언어를 바꿀 때마다 사람 자체가 달라진다.


아무래도 주된 이유는 문화 양식이다. 별도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한국의 문화 양식은 언어 말고도 비언어적 양식을 절친 짝꿍처럼 잃지 못하고 사이가 애절하다. 함께 있어야 효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사와 꾸벅하는 동작이 합쳐져서 인사를 만들어낸다. 이런 비언어적 의미가 함께 가지 않는다면 해당 언어를 한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제 아무리 현장에 나갈 필요가 전혀 없이 오로지 서적만을 대상으로 한국이나 한국어를 파고드는 이론가이다 할지라도 철자로 적힌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사회 객체 간의 소통과 풍습이 얽히고 얽힌 사회의 기제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한국어만 그런 건 아니다. 독일에서 인사하며 꾸벅 동작을 하면 이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는 사실도 독일어의 비언어적 특징이기는 하다. 손으로 말을 더 많이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뒤따르는 이태리어 등에 비하면 말이다. 독일어도 손동작을 쓰고, 넉살을 떨고, 넋두리를 하고, 푸념을 늘어놓지만 그 깊이나 영역이 한국어에 비해 느낌이 다르다. 


그래서 성격도 달라진다. 그래서 이중 언어로 인한 이중인격을 잠깐 다뤄보고자 한다. 


한국어의 나는 좀 더 공손하다. 아무래도 좀 더 겉치레가 많고 인사말이 많다. 만남을 시작하고 끝낼 때의 인사말이 좀 더 형식화되어 있다. 물론 돌려 말하는 능력은 평생 크게 향상될 것 같지는 않다. 꼭 필요하면 또 몰라도 말이다. 그래야만 하는 삶의 상황도 무수히 많았다만, 그럴 때 간혹 큰 손해를 보고서도 아직 고치지 못한 걸 보면 성향의 한계가 있나 보다,라고 여기기에 이르렀다. 이렇게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는 영역이나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면 그만이다. 정이 있다.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 내 마음속에서 속절없이 뿜어져 나오는 잔정이 갈 곳을 찾아 헤맨다. 한국어는 그 흩뿌리는 잔정까지 모두 거뜬히 담아내는 용량이 무제한인 듯한 놀라운 언어다. 따듯하고 뜨거운 언어다. 어쩌면 그 언어를 쓸 때만이라도 나 또한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항상 그럴 수는 없지만 말이다. 단지 한국어를 쓸 때의 내 인격과 성격을 가장 특징적으로 꼽으라면 관계의 감성과 삶의 감성을 즉각 신속 운반하는 초특급 미래 열차에 올라타는 느낌이라는 표현 정도가 적절하다. 게다가 빌려 타는 느낌이 없고 지정 예약석이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내 소유의 것 같다.


독일어의 나는 좀 더 자조적이다. 농담을 하지만 농담 같지 않을 때도 많은 것 같다. 비꼬는 것은 아니지만 자조성을 띄되 너무 경박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독일어의 큰 장점이다. 얼마 전에 실험 삼아 칸트의 고전을 번역해 보았는데 그 시대에서조차도, 혹은 의외로 그 칸트 조차도 자조와 조소가 글에 강하게 녹아들어 있다. 학문적 정확성에 매우 충실한 번역일 경우이거나 어려운 원서와 조우한다면 사실 놓치기도 쉬운 특징이다. 진지하고, 그 진지함에 누구보다 충실해서 논리적인데, 그 속에 자신을 돌아보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불완전한 화자의 자아성찰이 완벽할 수는 없으니 사뭇 진지한 어휘의 표정으로 드러내는 자조와 조소가 그 결과물이다. 독일어는 결국에는 감성만으로는 절대로 신뢰하지 못하는 내 성향을 그대로 닮은 듯하다. 차갑고 절제되어서 한국의 잔정이 혹여나 한 방울 실수로 분산되었을 때마다 민망하고 처연하게 홀로 버려져서 식어버리지만, 그건 번지수를 잘못 찾은 한국어 인간의 불찰이지 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독일어를 쓸 때의 내 인격과 성격의 특징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기본적으로 다소 방어적이지만 그만큼 행동으로 진가를 증명하려는 내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 언어 전환 별 성격 유형을 떠나서 보다 전체적으로, 각 언어로 바꿀 때 내가 정확히 어떻게 달라지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분명히 양쪽 사람들과 융화하고 어울리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그들처럼 변할 텐데 말이다. 곱씹어보니 나의 뇌는 평상시에 참 큰일을 하고 있구나, 싶다. 이건 분명히 이중인격이라고 불러도 될만한 현상이니 말이다. 물론 병적 의미의 이중인격이 아니라, 이중 언어로 인한 자연스러운 기제이지만 말이다.


 그 속에서 나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혹은 누구일까?


아마 유아시절에는 사회적 페르소나 전환이라는 생존 스킬이 아직 미숙한 나머지, 충돌과 오류도 꽤 겪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에게 정을 붙이려 했으나 묘한 벽에 부딪혀서 실패했다던지. 한국 사회에서처럼 어른들이 이뻐해 주시고 흡사 부모처럼 따스하게 주시는 그런 반응을 어린 마음에나마 기대했던 것 같다. 게다가 한국 교육을 받았으니 예절을 깎듯이 차려야 한다는 신념도 나름 가지고 학교에 갔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이 보기에는 아마도, 이 동양 어린이는 참 행동이 동양적이네,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어린이 시절에는 극심한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었기에 말도 제대로 했을지나 의문이다. 


결국, 생후 8개월부터 어엿하게 독일에서 자란 준 독일이자 독일어 모국인 치고는 어이없을 정도로 한국적이었을 것이다. 포장이 잘못된 상품처럼, 포장지의 설명과 내용물이 판이하게 다른. 뭔가 주변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아마 유치원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유아기 시절의 경험을 평생 안고 다닌다고 한다. 스펙에 비해서 어이없을 정도로 한국적이어서 본인부터가 다소 혼란스러운 저 시절의 아이는 아직 내 마음의 동반자로서 나와 함께 다니는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힘깨나 쓰는 두 큰언니들이 어딜 가나 함께 붙어있고 보호해주기 때문에 과거의 혼란은 이제 관찰의 여유로 변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여유를 가지고 소공녀처럼 유유자적하며 신분이 상승한 그때의 아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이리라. 그녀의 두 큰언니는 현실을 개척하기 바쁘니까 말이다.


이토록, 이중 언어로 인한 필연적 이중인격을 평생 영위함으로 인해서, 역설적으로 진실성에 대한 갈망이 자라는 효과를 낳았다. 어쩌면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일 것이다. 평생 이중간첩으로 살 수 있는 인재가 극히 드물듯이, 보통의 사람은 확실한 자아의 중심추를 필요로 하니까. 


그래서 나는 그 시절 조그만 그녀의, 번지수 잘못 찾으며 뒤뚱거리는 오리 새끼 같은 그녀를 소중하게 여기고 이렇게 표현의 창구까지 정성스레 마련해 놓는다. 어쩌면 그녀가 큰 열쇠를 지니고 있기에. 그녀를 위해서 두 큰언니가 생겨난 것 같기도 하다. 


오늘도 두 큰언니는 열심히 일한다. 나는 그녀들이 그토록 든든할 수가 없다. 장하고 아주 가끔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저 둘을 하나로 합친다 할지라도 그게 나는 아닐 것 같다.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 점점 더 다양한 일인 다역 역할을 해내는 모두가 공감하는 측면일 것이다. 실용적 사회 맞춤형 다중 인격. 이러한 유연성은 매일의 우리의 에너지를 소요하는 큰 일이기도 하고, 당신이 오늘도 자잘한 크고 작은 일을 멋지게 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구는 그걸 사회인이자 어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이러한 능력은 우리가 에너지와 자신이라는 귀중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게끔 도와준다. 대화의 상대만 해도 깊은 관심을 모두에게 할애할 수는 없다. 그러다가는 골로 가기 때문이다. 


이중인격. 내가 이중 언어라는 예시를 통해서 두 큰언니라고 표현한 이중인격은, 능력이 출중하고 쉴 새 없이 바쁘고 가령 사회적으로 촉망마저 받는다 해도 어쩌면 결국은 주인공인 작은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충실하고 진실하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그녀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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