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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nzlerin Nov 01. 2020

다국어의 모순

다국적 언어능력은 1/n이라고 한다.

다국어는 국어가 여러 개인 것이다. 국어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언어를 빼앗겨 본 적 있는 나라의 언어로 이 말을 쓰고 있으니 굳이 거창하게 설명을 길게 할 필요도 없다. 모국어란 개념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사실 나에게는 모국어라는 것이 쉽지만은 않게 다가온다.


모국어란 뭘까? 문자 그대로 보면 어머니가 혹은 부모님이 구사하는 언어일까? 그보다는 내가 날 때무터 구사한 언어, 그리고 자라면서 쭉 구사한 언어라는 뜻이 강한 것 같다. 그래서 그 언어를 통해 나의 구사력과 표현력이 제약이 없는 수준의 능력을 갖췄으면 그걸 모국어라고 하는 것 같다. 창의력의 제약이 있거나 너무 표현하기 어려운 주제라면 몰라도. 


이중 언어 인간의 이중 모국어를 논해보자. 다국어까지 가지 않아도 이중 국어만을 구사해도 매우 바람직한 특성을 가진 것으로 간주된다. 어릴 때부터 영어 유치원을 보내거나 조기유학을 행하는 이유가 그래서일 터이다. 다국어를 구사하는 것을 조기 교육의 목표로 선정할 만큼 매력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다국어란 정말 추구하기에 좋은 것인지 생각할 필요도 있다. 여기서 다국어, 혹은 이중 국어란 매우 엄격하게 정의해서, 별도로 신경을 써서 학습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자연스럽게 환경을 통해서 배운 것을 뜻한다. 바로 모국어 그 자체의 의미인 것이다.


내 연구 분야는 아니지만 절대 잊지 못할 주장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혹여나 실제 연구가 아니라 할지라도 나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실증 자료 삼아서 몇 번이라도 긍정할 수 있을법한 주장이다. 바로 뇌에 언어를 담는 공간은 구조적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모국어가 두 개라면 두 개, 세 개라면 세 개 등의 용기가 머릿속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능력이라는 것은 그 용기에 나눠 담는 액체와 같은데, 한정된 것은 용기의 개수도 개수지만 무엇보다 액체의 양이다. 중요한 것은, 이 액체는 유동적이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옮겨 담긴다는 것이다. 뇌의 능력이 정말 놀라우면서도 명백한 한계의 법칙성은 존재한다는 대목으로 다가온다.


고로, 100%로의 액체가 모든 용기에 동시에 담기는 일은 없다. 절대로.


이게 참 기가 차는 주장이다. 그리고 내가 내 인생을 걸고 보증할 수 있는 느낌이기도 하다. 나는 자기 객관화가 잘 된다는 가정 하에, 내 한국어 및 독일어 능력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 성장배경을 참고한다면 말이다. 독일어가 완벽한 것은 당연한 모국어의 이치일 테고, 한국어로 이렇게 수필을 쓰고 예술적인 표현을 언어를 통해 탐구할 정도라면 사실상 더 이상 배울 거리가 없다는 걸 안다. 한자를 더 배울 수 있겠지만 포기했다. (그리고 그 부재를 솔직히 한국어를 쓰면서 자주 느낀다.)


한자 능력의 부재를 비롯하여 여러 일상생활과 한국적 위계질서의 맥락에 걸맞은 언어의 부족함을 포함해서, 내 한국어는 뛰어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잘하는 편인 것일 뿐이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뛰어나게 잘하는 것을 나 자신이 알기에 비교적 자신 있게 한국어를 사용하고는 한다. 


하지만 그보다 의외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정도가 된다. 하나는, 독일어 능력이 당연하게도 완벽하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이질감이 든다는 것이다. 독일어는 나에게 아직도 탐구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독일이라는 나라처럼, 독일어는 나에게 어느 정도는 조심스러운 존중의 대상인 것이다. 모국어지만 문자 그대로 부모님의 언어가 아닌 것이다. 혹은 의역하는 의미대로 나에게 제약을 걸지 않고 오히려 풀어주는 언어이면서도 정서적 측면에서는 아주 그렇지많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나에게 가족이란 한국어 그 자체다. 한국어 덕분에 부모님과 이주민 자녀 치고는 남다른 유대감을 쌓아올 수 있었고 소통에 제약이 없다. 이주민 가정의 경우 둘 중 어떤 언어를 택해도 두 쪽 중 한쪽에게는 제약을 거는 언어일 거라는 점에서, 나에게 한국어는 가족과 일맥상통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내가 가족과 주로 교환하는 감정의 진심과 정서적 진솔성은 나에게 한국어와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기도 했고, 그렇게 연습의 굳은살이 정서에 자리 잡았고, 그렇게 한국어라는 언어의 결도 이미 파여 있기 때문이다. 


현지의 모국어를 향한 부분적인 정서적 낯섦, 혹은 그에 해당하는 영토의 부재. 이것은 이중 언어로 자란 사람의 예기치 못한 특징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이중 언어로 자란 사람들이 아주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면 어쩌면 대부분 일치하는 사항일지도 모른다는 합리적 예감이 든다. 책이나 대사를 번역할 때 어쩔 수 없이 버려지는 부분들은 바로 문화적이거나 정서적인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 특유의 돌려 말하기 어휘가 있는데 독어로 번역할 때 반절 이상을 걷어내도 무방할 정도다. 이건 다름이 아니라 문화의, 그리고 나아가서 정서의 차이에 속한다. 그런데 한국의 정서적 표현을 느끼는 와중에 독일어로 그 느낌을 표현하려고 할 때가 내 일상에서 자주 발생하는데, 그럴 때마다 말문이 멎는 것이다. 인식하고 느끼는 내 감성의 소프트웨어는 한국어일 때, 그걸 독일어로 옮길 하드웨어 자체가 비어있는 것이다. 그럴 때 내 뇌는 매번 똑같이 순간적 함정에 빠진다. 아차, 이게 아니지. 그렇게 순간적으로 내 언어는 허공에 붕 뜨고 내 갈 곳 없는 혀는 우스워진다. 단지 일 초만이라도. 참 우스운 게, 내가 3n 년을 이렇게 살았는데도 이것만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뇌의 용기가 두 개인 탓이다. 용기가 만들어진 이상, 이건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사용법을 나름대로 터득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일상의 오류를 물리적 한계로 안고 가야 한다. 이중 언어, 이중 국어, 진정한 다국어로 누군가를 만들어 나가고 싶다면.


또 하나의 의외인 점은 위에 비하면 조금 덜 의외이다. 바로 마찬가지의 애로사항이 부모의 모국어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좀 더 당연한 이치겠지만, 여기서도 특정 주제나 표현의 영역에 한해서는 뇌가 끊임없는 번역의 무한 루프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알겠지만, 어느 정도의 버벅거림은 그냥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터넷 영상을 후미진 곳에서 재생하듯이 버벅거리는 버퍼링이 제3의 언어처럼 되는 것이다. 물론 남들은 잘 모를 수 있다. 나만 해도 대학에서 종사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는 수려한 어휘력과 문장력으로 먹고사는 직업이고 소위 "먹히는 말발"로 월급을 받으며 먹고살고 있으니 할 말 다했지 싶다. 그런데도, 혹은 그렇기에 더욱더 나 자신은 민감히 자각할 수밖에 없다. 아, 내가 이중 국어가 아니라면 지금 이 순간 뇌가 버벅대지 않겠구나! 하고 말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이중 국어의 이러한 의외의 특성은 반면의 장점을 기반으로 한다. 바로 비언어적 표현의 영역이 2배로 넓다는 뜻이다. 한국인인 내가 한국어로 무엇을 느낄 때 독어인 나의 혀와 글은 허공에 붕 뜬다. 반대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람은 표현을 해야 한다.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포부와 재능이 뒷받침하는 유형의 사람이라면 필사적이 된다. 그래서 이 붕 뜬 허공을 채우고자 아무도 모르는 여정이 시작된다. 그리고 평생 평행선 위에서 진행된다. 이 공간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지, 그리고 실생활과 진로의 선택에까지 어떤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는 서서히 풀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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