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글을 써서 받은 보수로 페르시아 고양이를 사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 있을까요? 하지만 잠깐 기다리세요. 글은 무엇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내 글은 어느 유명한 남자의 소설에 관한 것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그것을 쓰는 동안 책을 논평하려면 어떤 환영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환영은 여자였지요. 그녀를 잘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유명한 시 「집안의 천사」의 여주인공 이름을 그녀에게 붙여 주었습니다. 내가 논평을 쓸 때면 그녀가 나와 내 글 사이에 끼어들곤 했지요. 나를 성가시게 하고 시간을 허비시키면서 몹시 괴롭혔기에 마침내 나는 그녀를 죽였습니다. 더 젊고 더 행복한 세대에서 자라난 여러분은 그녀에 대해 들어 보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집안의 천사가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겠지요. 가급적 간단하게 그녀를 묘사해 볼까요? 그녀는 강한 공감력을 갖고 있습니다. 대단히 매력적이지요. 지극히 이타적입니다. 가정 생활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솜씨가 탁월합니다. 매일매일 자신을 희생합니다. 닭고기가 나오면 다리를 집습니다. 외풍이 들어오는 곳이 있으면 그곳에 앉지요. 간단히 말해서 자기 나름의 마음이나 소망이 전혀 없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나 소망에 공감하도록 생긴 여자입니다. 무엇보다도(이 말은 할 필요도 없지만) 그녀는 순결합니다. 그녀의 순결함은 그녀의 큰 기품이라고 여겨집니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의 말기에는 집집마다 천사가 있었지요. 내가 글을 쓰게 되었을 때 처음 몇 단어를 쓰자마자 그녀와 맞닥뜨렸습니다. 내가 글을 쓰는 종이에 그녀의 날개 그림자가 드리워졌지요. 그녀의 스커트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 퍼졌습니다. 내가 유명한 남자의 소설을 논평하려고 펜을 손에 쥐자마자 그녀는 미끄러지듯 내 뒤에 와서 속삭였습니다. '얘야, 넌 젊은 아가씨야. 남자가 쓴 책에 관해서 쓰고 있구나. 공감을 보이렴. 다정하게 대하고. 아첨도 하고 속이려무나. 우리 여성의 온갖 기교과 간계를 발휘하렴. 네게 자기 나름의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려무나. 무엇보다도 순결해야 해.' 그리고 나서 그녀는 내 펜을 잡아 이끌어 가려는 듯했습니다. 이후 내가 언급하려는 행동은 어느 정도 내 공이라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공정하게 말하자면, 그 공은 내게 일정한 수입(연간 500파운드라고 할까요?)을 물려줘서 내가 생계를 위해 순전히 매력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게 해 준 훌륭한 조상들에게 돌아갑니다. 나는 몸을 돌려 그녀를 보고 그녀의 목을 움켜잡았지요.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죽였습니다. 내가 고발당해 법정에 선다면, 내 행동은 자기방어였다고 변명할 겁니다. 내가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녀가 나를 죽였을 테니까요. 그녀는 내 글에서 심장을 잡아 뽑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펜을 종이에 대는 순간 알았듯이, 자기 나름의 마음이 없다면, 인간관계나 도덕, 성에 관해 진실이라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표현할 수 없다면, 소설에 대해서도 논평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여자는 이런 문제들을 자유롭고 솔직하게 다룰 수 없다고 집안의 천사를 주장합니다. 성공하려는 여자는 상대를 매혹하고, 회유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요. 그래서 나는 그녀의 날개 그림자인지 빛나는 후광이 내 종이에 드리워지는 것을 느낄 때마다 잉크병을 들어 그녀에게 던졌습니다. 그녀는 여간해서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허구적 성격이 그녀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지요. 환상을 죽이기는 실체를 죽이기보다 훨씬 어려우니까요. 내가 그녀를 해치웠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는 늘 되돌아왔습니다. 결국 나는 그녀를 죽였다고 우쭐해했지만 치열한 싸움을 벌여 와야 했습니다. 그 많은 시간에 그리스어 문법을 배우거나 모험을 찾아 세계를 방랑했더라면 더 좋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실재하는 경험이었지요. 당시의 여성 작가에게 반드시 닥칠 경험이었습니다. 집안의 천사를 죽이는 것은 여성 작가가 해야 할 일이었던 겁니다.
『런던 거리 헤매기: 버지니아 울프 산문집』 민음사 p.131 -여성의 직업 중에서
에스프레소 투 샷, 다시 에스프레소 투 샷. 연거푸 들이켰지만 햇살 내리는 창가에 앉아 책을 펴니 머리가 몽롱했다. 그러다 마주한 이 대목에서 정신이 번뜩 들었다. 허물어지는 허리를 바로 세우고 똑똑히 읽어나갔다. 집안의 천사, 이 이야기는 버지니아 울프의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충분히 유효하다. 나는 깜박이는 커서 앞 뒤로 들고나는 집안의 천사를 분명 보았다. 쓰다가 멈추고 단어를 바꾸고 때론 단락 전체를 지우게 만드는 망설임의 전형. 유난하고 유구한 자기 검열의 그림자. 알지, 너무 잘 알지. 하다가도 다시금 깨닫는다.
'유명한 남자의 소설을 논평'하다가 치미는 분노, '집안의 천사'를 죽이기 위한 결심과는 조금 결이 다른 화. 조금 더 개인적이고 사소한, 자잘하고 산발적인 짜증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다. 산탄총의 구슬처럼 다글다글 굴러다니며 때를 엿보고 있다. 거기엔 불의에 항거한다는 결의도, 마땅히 옳은 일을 행한다는 자부도 없다. 어디 한 놈만 걸려라, 씩씩거리며 덤불 속에 숨어 망을 보는 것에 가깝다.
22년 마지막 영화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였다. 영화관에서 볼 때와 집에서 볼 때의 느낌은 비슷하고도 달랐다. 영화관에서 볼 땐 눈물을 찔끔거렸고(오, 엄마-) 집에서 볼 때는 마음이 요란하고 복잡해졌다. 많고 많은 씬 중에서 기억에 남는 대사는 이거다. 마지막 결전의 순간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말한다. '플리즈, 비 카인드.' 우리가 서로에게 좀 더 다정해져야 한다고 설득한다. 그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지는 충분히 알겠는데, 마음 한편에선 용암 같은 게 치밀어 오른다. 왜 에블린이 그런 말을 들어야 해? 지금까지 모든 것(그야말로 에브리씽 포 에브리원)을 돌보고 살피며 버텨내느라 애쓴 에블린이 이제 상냥하기까지 해야 해? 그것도 하필이면 남편인 웨이먼드에게 들어야 하냐고. 내 비틀린 마음엔 이건 맞는 말을 트집잡을 수 없으니 말투를 꼬집고 넘어가는 것처럼 들린다. '착하게 말 안 하면 안 들어줍니다?' 이런 식으로. 이렇게 변죽을 한없이 울려대는 사이 문득 드라마 <앤 저스트 라이크 댓>의 장면도 떠오른다. 부부 동반으로 테니스 경기를 하던 샬롯은 공을 받아내기 위해 달려가다 남편 해리를 치고 만다. 경기가 끝난 후 해리는 샬롯에게 사과를 요구한다. 아까 자기를 넘어뜨리지 않았냐면서. 샬롯은 이를 거부한다. 며칠이 지나서 다시 사과를 요구하는 해리에게 샬롯은 단호하게 말한다. 여자는 세상 모두에게 모든 것에 관해 온종일 사과한다고. 유일하게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게 바로 테니스 코트라고. 그렇지! 나는 없는 라켓도 집어던질 기세로 함께 환호했다.
제때 잉크병을 던졌으면 해결되었을 공격성은 이렇게 아무 때고 튀어나온다. 쿵푸를 하거나 테니스를 쳤다면 보다 바람직하게 해소될 수 있었을까? 나는 고작 달리기를 하는 걸. 아니면 인클라인 워킹을 하거나. 심박수를 높이는 만큼 분노가 누그러들 수는 있지만 그게 아름답게 휘발된 적은 없었다. 나는 언제나 화를 낼 준비가 되어있었다. 무작위로 마주치는 이들부터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까지. 세상은 항상 불합리하고 불확실한 일들은 계속 튀어나오며 나는 이것들을 해결하기 벅찼기에 땔감은 늘 차고 넘쳤다.
그래서 나는 에블린에게 쉽게 홀렸다. 미간에 주름 깊게 만든 채 영수증 더미를 정리하고, 국수를 삶고, 딸을 단속했다가, 아버지를 응대했다가, 손님들의 요구에 답하러 가는 사이 잘못 바른 페인트를 찾아내고, 언제나 기대에 못 미치는 남편을 나무랐다가, 저녁 파티 준비도 점검하고 마는 일상. 마치 천수관음보살만이 해낼 것 같은 요란한 문제해결과정을 바라보며 나는 탄복했다. (가장 중대한 일인 세무신고건은 제외하고다.) 너무 나와 같아서 에블린의 사고과정 전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이 그녀를 짜증나게 하고 불안하게 만드는지. 걱정과 염려의 징검다리를 통통 건너다보면 하루가 다 가는 그 기분을 너무 잘 알지. 자리에 누워선 하루의 임무를 다 수행했나 점검하고, 내일의 임무와 의무의 효율적인 처리방안을 구상하다 불안을 한 꺼풀 덮어쓰고 잠드는 그 기분. 예민함과 민감함에 누군가 '제발 화내지 말고 말 해.' 라든지 '비 카인드.' 라고 말한다면 그건 곧 싸우자고 덤벼드는 것과 다름없었다. 화내지 말라고?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달라고?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화내고 있는데? 뭐 때문에 동동거리는데? 하며 준비된 탄약이 차례로 폭발하기 시작한다. 문장을 마무리 짓는 '-데'는 어느새 한 옥타브 높아진다. '데에↗'. 이렇게. 이어 물음표는 느낌표로 바뀌기 시작한다. 감탄과 기쁨의 느낌표 대신 격정과 분노의 느낌표다. 불꽃축제 뭐 하러 가나? 집이 곧 한강인데.
국세청 직원이나 세탁소 손님들에겐 미미하던 불꽃이 남편이나 딸 앞에서 폭발하는 것 역시 나와 닮았다. 몹시 부끄럽고 겸연쩍지만 사실이다. '넌 남들 앞에선 그렇게 호인이면서 나한테는 왜 그래?' 달의 질문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무리 정정당당한 분노에 휩싸였다 하더라도 맞는 말 앞에선 그리 되었다. 평시에 달이 던지곤 하던 '안방 김일성'이니 '방구석 여포'니 하는 농담엔 뼈가 있었다. 뗄 계급장도 존재하지 않는 사이, 가장 편한 거리에선 기대치를 무너뜨린 것에 대한 화가 더 치밀어 올랐으니까. 그건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과도 연결되었다. 많은 기대에 부응해야 했지만 열심히 노력해 잘해봤자 본전. 칭찬에 박한 분위기 속에서 별 반항 없는 장녀로 자라면 이런 사람이 되는 거구나. 남다른 기민함과 효율성은 이에 이르지 못한 이들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지고, 급한 성격은 거기에 화를 더한다. 아, 이게 나란 사람이구나.
거울 속 얼굴은 화끈거렸다. 나는 이제껏 많은 일들을 처리하고 해치우고 뒤치다꺼리한다고 내가 이 지경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는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나 혼자 해내고 있단 생각 자체가 너무 자기중심적이었다. 내가 속한 이 우주의 일들을 모두 관장하고 보살피고 있다 여겼는데, 그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려고 매일 매 순간을 애쓰다 보니 고갈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짜증과 불안, 분노와 초조가 다 거기에서 비롯된다. 나는 이 정도 하는데 너는 왜 못해? 나는 이렇게 애를 쓰는데 너는 왜 안 해? 합의 없는 기준을 나 혼자 세워놓고 악다구니 쓴 것에 지나지 않았다. 깨달음 뒤에 달려오는 것은 멋쩍음, 한없는 부끄러움이었다.
멀티 유니버스의 나를 끌어와 해결할 수 없다. 모자 속에 숨겨 믿고 의지할 라따구리도 없다. 내가 택한 것은 '비 카인드' 대신 그저 내려놓는 방법이었다. 상냥하고 다정해질 자신은 아직 없기에 머리를 꽉 조이고 있는 나사를 풀어버리기로 한다. 마음에 채 들지 않는 것(아주 많다)들을 곱씹고 화내는 것을 멈추고 그냥 못 본 척해버리는 거다. 뾰족한 것 같은 말은 흘려듣고, 가시 돋친 말은 내뱉지 않고 넘어가는 거다. 내가 할 일 아니야, 내가 하지 않아도 돼, 나는 모를 거야. 크게 세 번 복창하고 눈을 질끈 감는다. 이건 상대를 위한 것이기도 하나 가장 궁극적으론 나를 위한 거다. 만사에 들이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줄이기 위한 거니까. 예민하고 민첩한 신경을 누그러뜨리고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넘기는 마음. 지금까지 맹렬하고 열렬하게 원했으나 늘 고꾸라졌던 마음의 원리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어느 우주의 나는 이미 깨닫고 통달했을지도 모를 내려놓음이 지금 내게 도착했다. 마침 때는 새해, 새 마음을 먹고 결심을 다지기 알맞은 때다. 게다가 두 살 어려진 나는 이제 보니 아기라고 할 수 있다. 무한한 우주, 창백한 푸른 점 안에선 이제 막 응애응애 태어난 아기 맞지. 그래서 올해는 좀 순둥이 버전으로 살아볼까 한다. 속이야 어찌 됐든 헤헤 웃는 거, 나는 절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켜켜이 탄약으로 찬 속을 꺼내어 볕에 말려보고자 한다. 영하로 깊이 내려가나 맑고 쾌청한 날씨. 한겨울이라도 양지바른 곳은 따뜻하다. 그걸 잊지 말자. 기억하자.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