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히 가족적인 일주일과 <대부>
목요일 밤에 떠나 수요일 오후에 돌아왔으니 일주일 여행을 다녀온 셈이다. 여행용 캐리어 두 개엔 세 식구의 짐이 들어찼다. 이케아 가방에도 각종 크고 잔 짐들을 채워 넣었다. 냉장고를 털어 저녁을 먹고 샤워를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로션을 바르고 머리도 말렸으니 이제 잠자리에 드는 대신 먼 길을 떠날 참이다. 핸들은 내가 잡기로 한다. 장거리 운전 게다가 밤, 각오를 다잡고 출발해 본다.
큰 도로에 접하자 말자 꼬마는 집에 돌아가고 싶다 말한다. 조금 전까지 할머니 집에 가고 싶다고 노래 부를 때와는 사뭇 다른 어조다. 동요를 바꿔 틀고 창 밖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지만 자기는 집에 가고 싶댄다. 경부 고속도로에 접어들어 동탄을 지날 무렵까지 계속 울음 섞인 목소리다. 부쩍 자기주장에 거세진 꼬마는 점점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나는 굳은 얼굴로 도로만 응시하고, 달은 꼬마가 좋아하는 것-자동차-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2층짜리 광역버스, 고속버스들이 씽씽 달려간다. 안성 표지판이 보일 무렵 뒷자리가 조용해진다. 잠이 들었다. 깊은 잠이다.
이제야 나는 마음 놓고 엑셀을 밟는다. 당장 뽀로로 인기동요 대신 푸투마요 앨범으로 갈아탄다. 앨범 명은 '빈티지 이탈리아'다. 멀고 먼 할머니의 집. 교통 정체를 피하려 이렇게 야반도주하듯 떠나는 길. 설이 코 앞이나 다행히 차는 막히지 않아 네비게이션의 도착 예정 시간은 크게 변동이 없다. 쉬지 않고 다섯 시간을 밟아 무르익은 새벽녘 드디어 도착한다. 지하주차장에 들어서자 꼬마는 깨어난다. 그것 참 놀라운 능력이다. 종알종알 뭐라 떠들며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날 준비를 한다.
우리들 부모님의 집은 남녘의 바닷가, 코에 스치는 바람은 더없이 상쾌하다. 맑고 청명한 데다 포근하기까지 하다. 확실히 서울이랑 달라, 우리는 그런 말들을 주고받는다. 지내는 동안 그런 생각을 여러 번 한다. 줄줄 흘리는 콧물에 잠시 들린 동네의 소아과에서도, 바다를 가르는 다리 위에서도. 여간해선 얻기 어려운 기회, 잠든 꼬마를 남겨두고 둘이 나선 밤의 술집에서도. 이곳은 서울이랑 다르다. 당연한 것이지만 확실히 그렇다. 술이 싸다! 안주는 더 싸다! 하여 부담 없이 메뉴판을 훑어내린다. 좁고 좁은 나라에서 모든 게 서울 기준으로 빠르게 규격화되고 있지만, 미묘하고 세세한 것들은 참으로 다르다. 그렇게 느낀다.
새해 첫 영화는 <아이 엠 러브>였다. 그리고 <비거 스플래쉬>도 이어 보았다. 알고리즘이 건네준 대로 덥석 문 것은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음식 문화를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굶고 주린 그들이 배를 타고 떠난 곳은 뉴욕, 그리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였다. 새로운 곳에 정착한 이탈리아인들이 만난 것은 도시의 풍요였다. 싸고 싱싱한 고기가 지천에 넘쳐났다. 그러나 여기에 없는 것도 있다. 지중해에서 공수해 온 허브는 좁은 텃밭에서 꿋꿋하게 자라난다. 마늘과 올리브, 피자와 파스타가 그렇게 퍼져나간다. 신대륙에서 다시금 전 세계로. 여기까지 봤으면 이제 뭘 봐야 하겠는가? 할머니 집에서 들뜬 어린 망아지를 곁눈으로 돌보며, 자주 터져나오는 땡깡을 적당히 무마시키며, 북적거리는 패밀리 틈바구니 속에서 나는 틈틈이
<대부>를 보았다.
이걸 지금에서야 보다니, 하며 세 편을 내리 봤다. 은근한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패밀리의 우두머리인 아버지가 총격을 받아 입원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은신처에서 숨어 상황을 엿보는 와중에도 밥은 먹어야 한다. 기름부터 두르고 마늘을 조금 볶아라, 토마토 페이스트와 토마토를 넣어라, 소시지와 미트볼을 넣고 와인을 붓고 설탕을 부어 끓여주라는 전언은 꽤 진지하게 전달된다. (적어도 나는 진지하게 들었다) 그 사이 총은 계속해서 불을 뿜고 배신자는 처단된다. 아버지는 극적으로 깨어나고, 주인공 마이클은 복수를 감행한 뒤 이제껏 줄곧 피해왔던 마피아의 길을 걷게 된다.
한 인간의 흥하고 망함, 성하고 쇠함을 생각하며 나는 내 앞에 놓인 밥상을 넙죽넙죽 받았다. 젓갈로 양념한 톳나물, 두부에 무친 톳나물, 가리비찜과 산낙지(꼬마는 처음 먹는 산낙지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미끈한 질감과 꿈틀거리는 생동감 그리고 낙지 본연의 맛 모두에), 문어 숙회와 명란젓, 오징어가 들어간 해물된장찌개, 해삼과 멍게, 제철 횟감, 다진 파를 섞은 젓갈에 찍어먹는 쌈미역과 다진 마늘과 참기름에 무친 미역나물, 새우버터구이와 섬초무침, 마른 김과 구운 김을 지나 마지막 아침은 굴과 두부, 콩나물로 끓인 굴국이었다. 얼큰하거나 맑거나 뻣뻣하거나 무른 찬들에선 바다 냄새가 났다. 바다가 키우고 파도가 살 찌운 축축한 것들이 모두 반가웠다. 여기가 내 시칠리아지 싶었다.
생각은 이어진다. 일주일 짐 싸들고 다녀온 집에 대해서도. 낯설고 익숙한 골목들을 누비는 일에 대해서도. <아이 엠 러브>의 엠마도, <대부>의 비토 돈 코를리오네, <파친코>와 <백만장자의 공짜 점심>에 대해서도. 살던 곳과 작별하고 새로운 땅으로 떠나는 삶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게 된다. 용기는 가상하고 의지는 분연하나, 입과 혀는 간사하기에 나는 가끔 아니 아주 자주 엄마의 밥상을 떠올릴 것 같다. 어느 날 차가운 부엌에 서서 톳무침을 그리워하며 울음 터뜨리는 날이 올까? 멸치 육수를 우려내다 엄마 생각을 하는 날이 올까? 어쨌거나 설은 설, 푸짐한 식탁과 달고 귀한 술. 바삭거리는 세뱃돈과 가끔 목이 메일 것 같은 짜증까지. 대단히 가족적인 일주일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