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Ones own Seoul

SEOUL HOTEL

언젠가의 서울 호텔

by 한량
000338550021.jpg 니스에서 모나코 가던 길에 만난 호텔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점심>의 케이시는 어떤 환상을 볼 때가 있다. 느닷없이 떠오르곤 하는 한 장의 이미지. 이런 이야기를 남에게 하면 미쳤다고 볼까 봐 말을 삼가지만, 케이시는 그 이미지에 마음을 두고 있다. 이건 내 운명의 장면일 거야. 하며 일종의 예지몽처럼 여긴다.


소설의 구절, 이리저리 스크롤을 내리며 찾아본 정보들, 출처 없이 흘러들은 이야기들. 매서운 칼바람과 그에 굴하지 않는 음악들. 이 모두가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어떤 그림을 만들어냈다. 작고 단정한 하얀 건물. 야자수 나부끼는 가운데 또렷한 검은 글씨의 간판. 거기엔 SEOUL HOTEL 이라 쓰여있다. 이곳은 서울호텔. 서울에 있어 서울 호텔이 아니라, 서울 사람이 운영하기에 서울 호텔인 곳이다.


사시사철 보사노바가 흐르는 로비에는 넉넉한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있다. 커다란 그림 몇 점, 문고판과 양장본이 나란한 책장, 높이가 다른 식물들이 창문 사이사이에 자리 잡았다. 웰컴 드링크 한 잔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아 체크인을 기다린다. 높은 천장에선 팬이 천천히 돌아간다. 까페에 앉은 손님들은 머리를 맞대고 저녁의 일정을 의논하고 있다. 햇살이 그들의 정수리를 동그랗게 비추고 있다. 반쯤 비운 잔의 얼음이 녹고 있다. 마주한 테이블에 앉은 호스트는 웃는 얼굴로 여권을 주길 요청한다. 간단한 입력이 끝난 뒤, 호스트는 여권과 함께 작은 카드를 건넨다. 이제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호텔 이용에 관한 안내가 쓰여있습니다. 문의하실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편하게 연락 주세요. 자, 가방 주시죠. 호스트는 익숙하게 캐리어의 손잡이를 끌며 앞장서기 시작한다.


이런 장면은 내 마음에 꽉 차게 다가온다. 검박하고 정갈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쯤은 대담하고 거대한 오브제가 장식된 곳. 집처럼 편안한 곳이지만 결코 집과 같지 않은 곳. 미술관이나 도서관, 박물관의 경험을 끌어들이는 곳. 그러면서도 무료로 제공되는 조식엔 가정식의 따뜻함이 스민 곳.


멀고 먼 나라, 낯설고 물 설은 도시들에서의 경험을 녹여 이런 곳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아주 오래전부터 해왔다. 삐걱거리는 이층침대의 도미토리, 창을 열면 야자수와 얼굴을 맞댈 수 있는 열대의 호텔, 현지인의 방 한 칸, 잘 깎은 잔디냄새가 밀려오는 풀빌라, 친구의 집, 한옥스테이, 빌딩 숲 속의 코너 스위트, 원베드 스튜디오, 원색의 컬러가 강렬한 국영호텔. 이제껏 지나온 방들을 늘어놓으면 성긴 은하수 정도는 될까. 두 손을 담갔다 들어 올리면 좋은 기억들, 특별한 추억들이 고여들고.


집을 짓는 친구들을 몇 보았다. 그들의 대담한 용기와 추진력에 여러 번 감탄했다. 집 짓기에 관한 책들을 탐독하기도 했다. 머리를 싸매며 고심하고 줄어드는 잔고에 동동거리는 이야기들이 거기에 있었다. 계약서에 싸인을 하고 나면 내 집임에도 내 손을 떠난 일이 되어버리는 사연들. 축원과 축수를 아니 드릴 수 없었다. 고생 고생 생고생이 지난 뒤 상량식을 할 땐 울어버릴지도 몰라. 집 짓다가 10년 늙는다는 이야기는 마음에 콕 박혔다. 그래서일까. 비슷한 시도를 시작할까 고민하던 때, 집을 짓고 건물을 짓는 일은 아직 내게 너무 먼 일이라고 나는 지레 손사래를 쳤다. 작은 까페와 서점, 그리고 그 위엔 우리 집. 상상은 즐거웠으나 용기가 모자랐다. 아직 경험을 더 많이 쌓아야 해. 은하수만큼의 숙소로도 모자란다고. 우주를 가로지르는 기차라도 탈 기세로 분명하게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서울 호텔의 그림은 어른거리고 있다. 야자수도 한들한들 나부끼고 있고. 부푼 구름이 흘러간다. 그리고 시간도 흘러간다.


단번에 역작을 지을 필요는 없지. 달이 말했다. 지어보고 모자란 점은 다음에 참고해 새로 지으면 되니까. 아, 그렇군. 귀 얇은 나는 단번에 수긍했다. 하지만 한 번 지을 때 10년 늙는 거니까, 그렇게 계속 10년씩 가불해가다가는 아무래도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을 것 같은데. 같은 애매한 비관론을 펼치려는데 다시금 달이 말했다. 길게 보면 돼. 집 지은 친구들을 봐. 그들도 지금 우리보다 더 많은 나이에 시작했어. 우리도 그렇게 마음에 목표를 품고 오래 생각하다 보면 거기에 이르게 될 거야. 마흔이 어려우면 쉰에 지으면 되는 거지. 나이 쉰에 서울 호텔의 오너가 되는 거, 멋지지 않아?


멋졌다.


쉰은 아직 많이 남았으므로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때까지 돈을 모으고 경험을 쌓으면 되는 거니까. 더 많은 도시를 누비고, 더 다양한 숙소에 머물며 좋은 것들을 만나고 발굴하면 된다고. 그런데 그, 그때도 우리가 여행이란 걸 할까? 그 사이 특이점이 와 버리면 어떡하지. 커즈와일이 그랬듯이 우리가 현실에 살지 않고 다 온라인에서만 살게 되면 누가 서울 호텔에 와 주지? 하다가 다시금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럼 내가 살면 된다. 음악을 고르고 테이블을 닦으며, 침대보를 끼우고 수건을 개며. 장르는 조금 달라질 수 있겠으나 어쨌거나 서울 호텔에 살면 된다. 서울에 있어 서울 호텔이 아닌, 서울 사람이 운영해서 서울 호텔인 그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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