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Ones own Seoul

사교의 계절

내 안의 아저씨와 을지로의 밤

by 한량

의무에 종속되는 삶을 아니 살자던 다짐은 맥없이 무너진다. 촘촘한 알람보다 언제나 먼저 눈을 뜨는 아침이다. 1분이 10분 같은 아침엔 뚜렷한 생각 없이, 그저 기계처럼 단계를 수행한다. 꼬마가 울음을 터뜨려도 짠하고, 멀건 얼굴로 '다녀오세요.'하고 인사를 해도 짠하다. 달에게 꼬마를 딸려보내고 나는 시동을 켠다. 그들은 강 건너 남쪽으로, 나는 강을 따라 서쪽으로 출근하는 아침이 이어진다. 그러니 매일이 매일 같아 엊그제 아침엔 화들짝 놀라고 만다. 오늘이 금요일이야? 아니 벌써 금요일이라고? 월요일부터 금요일은 그렇게 뭉터기로 날아간다.


업무와 업무 사이, 어린이집 어플의 알람을 확인하고 필요한 물품을 주문한다. 바깥놀이용 크록스를 사고, 반팔 티셔츠를 몇 장 산다. 영어활동 어플에 가입해 댓글을 달아달라는 요청에 응답하고, 영유아 검진 예약을 위해 병원 예약 어플을 헤집는다. 토요일은 검진을 하지 않는다 하니 평일 예약을 잡아야 하는데 6시 마감인 병원엔 도달할 수 없다. 늦게까지 문을 여는 소아과에 전화를 하니 원장님 한 분이 요즘 안 계셔서 당분간 검진 예약은 받지 않는다고 한다. 맘까페에서 영유아 검진으로 검색해 가능한 병원을 찾는다. 여긴 평일엔 7시까지 하는 소아과이므로 6시 예약을 하면 가능하다. 달과 꼬마가 그 시간까지 도착할 수 있는 요일을 찾아 가까스로 예약을 잡는다. 겨우 한숨을 돌린다.


세탁기와 건조기는 쉼 없이 돌아간다. 식기세척기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나는 2주 간의 불규칙한 야근이 잡혔다. 달은 급기야 도움의 손길을 요청한다. 멀고 먼 도시에서 어머니가 당도한다. 느지막이 터덜터덜 돌아오니 집은 반들반들하다. 모든 빨래는 깔끔하게 접혀있고, 냉장고엔 갓 만든 반찬들이 가지런하다. 나뒹구는 재활용품 하나 없고, 부엌 서랍의 잡동사니들도 온 데 간 데 없다. 베란다에 방치된 화분들도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죽은 식물은 솎아내고 빈 화분은 켜켜이 쌓아두었다. 모든 것이 말끔하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다음 주엔 엄마가 도착했다. 우리가 쏜살 같이 빠져나간 아침부터 오후까지 엄마는 집안 곳곳의 묵은 청소를 해치운다. 봄동과 부추로 김치도 담가둔다. 그러곤 퇴근한 꼬마와 한참을 부비며 논다. 이제야 숨을 돌리는 우리다. 엄마 찬스를 믿고 덥석 잡아둔 약속이 떠오른다. 그리하야 평소와 같은 금요일, 우리는 집에 들르지 않고 약속 장소로 향한다. 집 아닌 곳에서 만나는 일, 그것도 꼬마 없이 단 둘이. 흔하디 흔했던 그 일이 이토록 설레는 것은 이게 너무나도 귀한 저녁이기 때문이다. 을지로 3가역 11번 출구. 빌딩 사이로 해는 지고 있다. 서성이는 사람들을 제치며 약속 장소로 가는 길, 현란한 간판과 한 집 건너 한 집이 골뱅이집인 그 거리를 걸으며 내 안의 아저씨가 설레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수십 년 전 이 거리를 걷던 아빠의 피가 내게도 흐르고 있기 때문일까. 힙하고 핫하지 않은 그냥 노포. 오래되고 부담 없는 밥집과 술집 앞에서 발하는 식욕. 아빠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면 그건 진정 아저씨 그 자체일 것이다. 만나기로 한 손님을 기다리며 먼저 맥주를 따고야 마는 것도 그래서일 테고. 빈 속에 맥주 한 모금 마시며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자니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열 손가락 거의 다 써 가며 과거로 거슬러 오르는 인연, 첫 책을 만들고 열었던 출간 파티에 찾아와 주었던 귀한 얼굴이다.

평양냉면과 녹두전, 제육을 앞에 두고 맥주는 벌컥벌컥 들어간다. 그때의 구기동과 그때의 이글루스를 지나 뮌헨과 당산, 왕십리에 이르는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이직과 이직, 출산과 육아. 고민을 넘나들다 보니 밤이 깊다. 안내해 주시는 대로 성큼성큼 당도한 곳은 받침이 하트인 노래방도 아니고, 알 수 없는 지하의 술집도 아니고 바로 버번 위스키 바다. 그야말로 오크통 같은 울림이 있는 사장님의 설명이 이어지고 우리는 몇 개의 샘플러를 맛본다. 진하고 달다. 카라멜과 시럽이 떠오르는 묵직한 맛이다. 거기에 아이스크림을 곁들이니 천국이 눈앞이다.

달콤함 사이에서 노니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오늘의 손님은 애저녁에 해치운 위스키 다음으로 입가심 맥주를 들이켜고 있다. 한 잔도 아닌 두 잔 째다. 그걸 보자니 '입을 가시다.'란 표현의 아저씨다움에 또 한 번 반하고 만다. 터져 나오는 호쾌함과 은근하게 깔리는 멋짐, 만날 때마다 들려주는 술과 간식은 또 어떻고. 오늘은 독일빵과 포트와인이었다. 계절이 바뀌면 또 만나죠. 자정 전에 헤어지며 손을 흔들었다. 그때도 을지로, 어쩌면 종각의 열차집에서 막걸리를 기울일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꼬마와 씨름하며 먹고 놀아주고 씻기고 재운 엄마를 생각하며 밤거리를 걷는다. 불 꺼진 조명 가게와 시장 너머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깔깔대고 있다. 봄밤, 사교의 계절이 무르익고 있다. 그건 오직 내리사랑 덕분이다. 한 치의 의심 없이 그렇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강변북로 위 돌로미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