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북토크, 미래의 북페어 그 사이 허덕이는 오늘
정신을 차려보면 날이 훌쩍 지나있다. 언제나 목요일쯤이 피로의 절정이다. 일교차가 큰 날씨 속 독한 감기를 앓았다. 목에선 쇳소리가 나고 코에선 맑은 콧물이 흘렀다. 나뿐이 아니다. 밤새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던 꼬마와 소아과를 찾았을 땐, 작년 다니던 어린이집의 동창회가 열린 줄 알았다. 그중 꼬마의 상태가 제일 좋지 않았고, 진료 순서도 제일 마지막이었다. 그날의 마지막 환자가 되어 병원을 나오며, 안아달라는 꼬마의 청을 뿌리치지 못했다. 안아달랄 때 안아줄 수 있는 날이 그리운 때가 분명 오겠지. 힘에 부치고 고될수록 정신은 먼 곳을 서성인다.
업무와 살림, 꼬마의 시중까지 우리의 매일은 바특하게 굴러간다. 그 사이사이 여러 책을 열고 닫았다. 몇 편의 문학상수상집, 소설, 에세이가 사무실 책상 위에 조붓하게 쌓여있었다. 틈나는 대로 짧게 읽어나갔다. 박서련, 하야시 후미코, 데버라 펠드먼. 출근과 퇴근길엔 오디오북을 들었다. 그래서 다시 덧붙이는 이름은 샬롯 브론테.
꼬마가 잠들고 이른바 '육퇴'라 불리는 시간이 찾아오면 그새 손이 간질거렸다. 문득 재규어의 대사를 떠올린다. '너에 대한 불만을 적은 노트가 오늘부로 10권에 이르렀어.' 였던가. 삶에 대한 불만이든 외로운 감상이든 어딘가 헛헛한 마음이 들 땐 손을 꼼지락거리고 싶었다. 아이패드를 잡고 그림을 그리고, 레고로 꽃을 만들었다. 그렇게 그린 그림은 여러 장, 꽃들은 작은 화병을 가득 메웠다. 그러니까 재규어처럼 말한다면, 힘들 때마다 만들었던 꽃이 다발을 이루었어.
다발을 넘어 동산을 이루지 않도록 노트북을 폈다. 작고 옹졸해진 마음이 더 얄궂게 굴기 전에. 문득 이 시간들이 어떻게 기억될지가 궁금하다. 불쑥 울리는 알람에 핸드폰을 들여다보면 1년 전 오늘, 2년 전 오늘, 3년 전 오늘을 띄워주는데, 그럴 때 시간은 비선형으로 흐른다. 앞으로만 내달리던 생각은 잠깐 멈추어 거꾸로 향한다. 그러다 생각한다. 지금 여기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는 환생, 아니면 멀티 유니버스. 이런 작품들이 흥하는 이유는 아마도 지금 우리 모두가 너무 지쳐서라고.
기억은 문득 작년 초의 어느 밤을 떠올린다. 코로나가 모두를 긴장하고 위축되게 만들었던 때, 그래서 더욱 비밀스러웠던 북토크. 영업 마감한 볼링장에서 나누던 조용한 환담. 신간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한참 한 뒤였다. 나는 연거푸 들이킨 맥주에 힘입어 쭈뼛쭈뼛 토크를 이어나갔다. 어쩌면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게 아닐지 몰라요. 3차원에 시간을 덧입혀 4차원의 관점에서 살펴본다고 했을 때, 과거와 현재 미래는 같은 지점에 존재하고 있다고요. 가로로 긴 선을 그려볼까요. 여기에 조금 두께를 만들어볼게요. 마치 롤케이크처럼요. 선형적으로 시간이 흘러간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이를 세로로만 쪼개기 쉽죠. 쪼갠 지점을 중심으로 왼쪽은 과거, 오른쪽은 미래. 따라서 미래를 예측할 수 없죠. 아직 도달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칼을 눕혀 롤케이크를 가로로 자른다고 생각해 보세요. 가로로 자른 단면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들어있죠. 그래서 저는 문득 찾아오는 어떤 예감, 낯선데 익숙한 기시감 등이 이런 데서 비롯된 게 아닐까 생각해요. 잘은 모르겠으나 왠지 그럴 것 같다는 느낌. 그건 우리가 겪지 않은 미래를 이미 겪어 알고 있기 때문이죠. 자자, 이쯤에서 옥장판 팔면 사시렵니까?
농담을 섞어 말했으나 그 순간 나는 매우 진지했다. 다시금 이야기를 이었다. 도서관에 방문해 서가를 거니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많은 책들이 꽂혀있죠. 책과 책 사이로 고른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사람도 보여요. 어쩌면 저 사람은 미래의 독자다. 저 사람이 읽고 있는 책은 미래에 내가 쓴 책이다. 무슨 내용,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모르나 언젠가 쓰게 될 그 책. 바로 그걸 읽고 있는 사람이 여기 이곳에 이미 존재한다.
모인 이들의 눈은 반짝인다. 분명 이상한 소리인데 귀가 쫑긋하는 건, 거기 모인 모두가 책을 좋아하고 책 곁에 머무르길 즐기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도착할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있다고. 그래서 너무 두려워말고 깊이 좌절하지 않고 계속 쓰겠노라고, 작은 자리는 그렇게 끝났다. 그때는 이걸 떠올릴 오늘은 아직 몰랐다. 피로에 절어 늘상 허덕이나 문득 그날의 웅변이 느닷없이 생각날 줄은. 그리고 그게 나에게 알 수 없는 힘을 불어넣어 준다는 것을. 그래서 잊고 있었던 미래의 서가를 상상하게 된다. 쓰고 싶고 쓸 수밖에 없고 쓰다 부스러진 이야기들을 다시 모아 엮은 책들로 가득한 서가. 언젠가 그 서가를 배경으로 그때의 얼굴들과 함께 다시 농담 섞은 진담을 나누게 될 거라고. 그게 오늘의 나를 버티게 한다. 거듭 쓰게 한다.
5월 26일~28일 코엑스 라이프플라자에서 열리는 리틀프레스페어에 참가합니다. 남해의 아마도 책방, 충무로의 스페인 책방과 함께 '아마도스페인한량'이란 이름으로 나갑니다. <Barcelona 27 dias>, 엽서북 <Cuba>, <Barcelona>, <Paris>, <Bangkok>에 이어 이번에 새로 나온 <Portugal>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구매자 분들께 <Portugal>에 수록된 사진으로 제작한 포토카드도 드리오니, 많이 방문해 주세요! (저는 토요일, 일요일 부스를 지킬 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