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라는 한 글자 (16)
오후 6시, 그리고 6시 반. 약속 시간을 조율하느라 몇 번의 통화를 나누다 A, C 부동산 모두 서로의 방문이 겹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건 그들의 호승심을 자극하는 듯 보였다. 나에겐 나쁠 것 없는 일이었다. 누구든 좋다. 와라. 와서 사라. 6시, 열어둔 문으로 들어오는 이는 모두 넷. 내가 아는 얼굴은 A 사장님뿐이었다. 아주머니 한 명. 안경 쓴 젊은 남자와 안 쓴 젊은 남자. 어떤 사이인지 궁금해하는 사이 특유의 빠른 브리핑이 이어졌다. 안경을 안 쓴 젊은 남자의 눈에 하트, 그야말로 싱싱한 하트가 뿅뿅 솟아올랐다. 그는 급기야 두 손을 모으고 나지막이 외치기 시작했다. '집이.. 집이 너무 예뻐요!'
공간을 옮길 때마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감탄을 표했다. 아마도 이 분이 손님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머지 둘은? 그들은 이 손님을 데려온 다른 부동산이라 했다. 그러니까 공동중개란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들은 지난번 하이에나 셋에 못지않은 부산스러움을 보여준다. '집은 밝게 봐야지!' 하며 난데없이 거실등을 다 켜고 (그건 내가 보여주고 싶은 집의 이미지와 전혀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손님이 궁금해하지도 않는 부엌 상부장을 열어보기 시작한다. 다행히 마구 쑤셔 넣은 잡동사니 칸은 아니었지만 이건 아니지. 식탁에 얌전하게 앉아있던 나는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하고야 만다. '그건 여시면 안 되죠.' 라고. 그건 준엄한 일갈에 가까웠다.
감탄을 더해가던 손님은 핸드폰을 꺼내어 쥔다. 그리고 공손하고 상냥하게 내게 청한다. '저, 집 동영상 좀 찍어도 될까요?' 네? 왜요? 반사적으로 경계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진정하자, 저분은 손님이야. 어쩌면 그냥 보러 온 사람일 수도 있지만. '아, 부모님한테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옆에서 A 사장님이 잽싸게 끼어든다. '부모님이 사주시는 거래.' 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자식사랑에 대한 리스펙이 섞인 목소리로 나는 답한다. '동영상은 좀 그렇고, 다른 짐 안 나오게 창 쪽으로 찍으시면 됩니다.' 좋은 사인일까? 첫 오퍼를 넣었던 B 손님도 사진을 찍었으니까. A 사장님이 묻는다. '다른 손님들도 온다고 했지? 아유, 그 사람들이 안 샀으면 좋겠네.' 나는 그저 웃고만 만다. 그건 사뭇 노련한 전술이었다. 손님에게 지긋한 압박을 선사하는.
그들이 나가고 조금 후 C 사장님과 젊은 부부가 들어왔다. 그들의 눈도 반짝반짝해진다. 내년에 아기가 태어날 예정이라고. 원래 내가 타겟으로 생각한 후보군이 이런 분들이었다. 어린아이가 딸린 부부. 커피 대신 보리차를 대접하며 그들을 식탁에 앉히는 데까지 성공했다. 이어 아이를 키우기에 좋은 점들을 슬슬 늘어놓았다. 대화가 잘 통하는 느낌이었다. C 사장님도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내가 다 하고 있으니 어찌 좋지 않으랴. 한편으론 이 사람 어지간히 급한가 보다 싶기도 했을 거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몸이 달아있었다. 야수의 심장으로만 가능하다는 선매수 후매도는 내게 불가능했다. 일단 팔고 사야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내 마음은 여기 부동산이 아닌 그곳, 종로의 부동산을 떠돌고 있었다.
종로의 부동산.
여기에 대해선 할 말이 차고 넘친다. 이제껏 다닌 부동산은 다양했다. 그런데 종로의 부동산은 말 그대로 '종로의 부동산'이라 묶어 칭할 만한 요소들이 있었다. A 부동산이 그랬듯 다른 부동산과 공동중개를 거의 하지 않았다. 공동중개는 동과 호수만 알면 대략의 시세와 견적이 나오는 아파트 시장에 특화된 시스템 같았다. 직접 가서 발품 팔지 않아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니까. 대신 자신만의 단골과 그들의 주소가 적힌 장부가 있었다. 원하는 집의 조건을 이야기하면 일단 '어디 보자'로 운을 떼는 알고리즘. 그다음은 장부의 종이를 팔랑팔랑 넘기고, 동시에 눈 앞에 앉은 내 관상도 눈여겨보며 서로의 궁합을 맞추는 시스템. 그래서 종로의 부동산은 부동산이 아닌 복덕방처럼 여겨졌다. 거래 성사를 위해선 복과 덕, 그리고 운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린 몹시 공손한 자세로 부동산을 방문하곤 했다. 구입 목적과 시기, 가족 구성원의 수 같은 소개가 끝나면 갑자기 애를 하나 더 낳으라는 주문이 이어졌다. 평소라면 대놓고 얼굴 빛깔을 바꿨을 테지만 애매하게 웃고 말았다.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었다. 왕년의 무용담, 자식 흉, 손녀 자랑, 이 동네 공무원에 대한 험담까지. 그렇다고 마냥 정신줄 놓고 흘려들을 수 없는 것이, 그러다 갑자기 '이 집은 어떨까?' 하고 매물 소개가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다시 자세를 고쳐 앉고 정보를 들을라치면 이번엔 집주인과 자신의 막역함에 대한 브리핑이 이어졌다. 동네가 오래된 만큼 그 역사는 최소 10여 년 넘게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래서 내가 그때 이 집을 사 줬던 거지.'로 끝나는 친구소개의 시간. 물론 여기서 '사 준' 것은 매물 중개를 뜻한다.
애초에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던 것도 우리가 예의바른 얼굴로 경청했기 때문이었다. 때때로 갑자기 들어와 '여기 시세 어떻게 해요?' 라고 묻는 이들에게 사장님은 굳은 표정으로 '매물 없어요.' 라고 말했으니까. 우린 똑똑히 느꼈다. 사장님의 무뚝뚝한 표정은 '사실 저희가 신혼 때부터 여기에 계속 살았는데요. 북촌이랑 구기동이랑 삼청동에서요. 이제 다시 돌아와서 살려고요.' 라고 말하는 순간 단박 누그러졌다. 가드를 내린 거다. 이건 확실한 곤조다. 종로인의 곤조. 종로인들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그런 곤조. 다른 이 같았으면 뭐야? 장사를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하고 휑하니 나가버렸을 그런 곤조. (실제로 그렇게들 했다) 하지만 알기에 아무렇지 않았다. 고, 진, 감, 래. 좋은 것을 얻으려면 인내해야 한다. 특히나 종로에서는.
두 팀의 손님을 쳐낸 저녁. 달과 꼬마는 씻으러 들어가고 나는 집을 치우고 있었다. 분명 한 시간 전 말끔했던 집은 꼬마의 귀가와 동시에 어지러워졌다. 그 흔적들을 하나씩 줍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A 사장님이었다. 아까 보고 간 손님이 집을 사고 싶다고 한다. 우리가 부른 호가에서 오백만 깎아주면 바로 사겠다고. 원래는 더 싸게 사고 싶어했는데, 자기가 딱 잘라 그건 안 된다고 했다고. 대신 잔금 일자도 잘 맞춰준다고 하는데 어때요? 마음이 쿵쿵거렸다. 네, 잠시 상의하고 바로 전화드리겠습니다. 나는 욕실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산대! 사고 싶대! 욕조 안 꼬마가 내 말을 따라 했다. 산대! 사고 싶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