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비 어서 오고

집이라는 한 글자 (18)

by 한량

'언니네 집은 언제 짓는대?' 경축 무슨무슨 인가 확정! 단지 곳곳엔 플래카드들이 걸려있었다. h 언니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대동강 자이 지어지고 나서.'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만 해도 재건축이니 재개발 같은 용어를 구별하지 못했다. 그저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의 느낌 아닐까, 집이 낡아가니 허물고 새로 짓는 건가 보다 했다. 언니는 매주 녹물 필터를 간다고 했다. 늦은 저녁 귀가할 때면 주차자리가 없어 단지 밖 도로에 댔다가 딱지를 끊은 적도 있다고도. 그래서 언니네 집은 유난히 주차 관리가 엄격했다. 방문자 확인증이 없는 차량엔 가차 없이 스티커를 붙인다고 했다. 확인증을 받으러 간 경비실의 풍경은 나 어릴 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런 색의 인터폰 장치, 벽에 걸린 손전등, 철끈으로 엮은 근무일지.


재개발, 재건축, 리모델링. 비슷해 보이는 단어지만 조금씩 다른 개념을 지닌다. 기존의 집을 허물고 다시 짓는다는 것은 같으나 각각의 양상은 세부적으로 다르다. 동네 전체를 밀고 도로, 전기, 상하수도를 비롯한 제반 시설부터 아파트까지 새로 짓는다: 재개발. 부지는 그대로 두고 기존 아파트 단지만 부수고 새로 짓는다: 재건축. 기존 아파트의 골조 대부분을 그대로 두고 일부 시설(지하주차장, 층수 추가, 면적 추가 등)을 새롭게 짓는다. :리모델링. 기본적인 목표는 같았다. 주거성을 개선해 삶의 질을 높이자. 그리고 집의 가치를 키워 집값을 높이자. 나부끼는 플래카드마다 의욕과 야심이 묻어났다. 그 정도 에너지가 없이는 실현되지 않을, 말 그대로 '사업'이었다.


우리가 마음에 둔 곳은 재개발 예정 구역이었다.


궁을 넘어 우리는 산을 탄다. 낡은 집, 허물어진 집. 공가空家임을 알리는 팻말. 인왕산의 다른 자락에선 들개떼들이 돌아다니기도 했으니 인적 드문 골목에선 걸음을 바삐 옮긴다. 산전수전 다 겪어 넋이라도 다 풍화되었을 것만 같은 조합도 기웃거려 본다. 조합의 역사는 길고 지리하다. 구역 지정과 재개발 조합 결성, 시공사 선정, 시장 직권에 의한 조합 해체, 시공사의 포기, 현금 청산 위기에 놓인 조합원들의 고소 고발, 잇단 항소와 분투를 지나 결국 대법원에선 시의 조합 해체가 부당하다는 선고를 내린다. 그리고 조합 재인가 완료. 시공사 재선정 성공. 여기까지 강산이 두 번 바뀔 시간이 흐른다. 신선답지 못한 놀음에 도끼 자루만 썩어난 셈이다.


이 세계는 실로 복잡하다.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룬다. 많은 시간이 지나 마을은 복잡해지고 주택과 시설들은 낡아간다. 허물고 다시 지을 필요들이 생긴다. 재개발 조합 추진 위원회가 발족한다. 어디까지나 '추진' 위원회다. 재개발 동의가 기준치를 넘어야 조합이 설립된다. 당연히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의견 수립이 쉽지 않다. 진통을 거쳐 조합이 설립되면 각 조합원의 재산 가치를 평가한다. 향후 지어질 세대수가 산정되고, 아파트 평수와 타입 신청을 지나 각 조합원의 추가 분담금이 정해진다. 이주가 끝나면 철거 및 착공에 들어간다. 공사가 끝나면 새로 지어진 집에 입주한다. 그리고 이 모든 단계마다 관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조합이 비리를 저지르고 (혹은 그랬다는 의혹을 받고) 이에 반발해 비상대책위원회가 생겨나기도 한다. 조합이든 비대위든 이익을 관철하고자 일부러 사업을 지연시키기도 한다. 소송이 줄에 줄을 잇는다. 공사비의 증가로 당초 고시한 금액보다 더 많은 분담금이 발생하기도 한다. 얼마나 층을 높일 것인가, 세대수는 얼마나 늘릴 것인가, 일반 분양 물량은 얼마나 되며 그걸로 공사비용을 어디까지 충당할 수 있을 것인가. 자재는 무엇을 쓰며 공용부지는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등등. 땅과 집, 돈이 얽힌 일이니만큼 분란과 갈등의 씨앗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게다가 이건 어디까지나 내부의 일이다. 경제 위기나 정치적 논란이 겹쳐 들면 매 과정이 순탄하지 않다. 앉은자리에서 몇 년씩 지체되기도 한다. 여기도 그런 케이스였다.


이런 걸 보면 예산을 가늠해 인터넷에 올라온 매물을 보고, 직접 집을 찾아가 둘러본 후 마음을 정해 계약서를 쓰는 것은 너무나 쉬워 보였다. 실제론 매 단계마다 진땀을 흘렸음에도. 그런 우리가 이걸, 이 '사업'을 감당할 수 있을까? 긴 시간의 인내, 설득, 모략, 협잡, 음모, 담합. 어쩌면 투쟁과 시위까지. 궁세권에 살고 싶다는 욕망이 우릴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을까. 우리 눈은 이미 멀어있었으나 사실 볼 수 있는 물건 자체가 드물었다.


온갖 사건 사고를 겪은 곳이니만큼 못 버틴 사람은 진작에 손을 털고 떠났고, 여태 남은 사람들은 오기로라도 더 기다리는 듯 보였다. 아주 예전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크고 작은 난항을 겪는 사이 새로 매수한 사람들. 공평한 것은 그사이 한참 나이를 먹었다는 것뿐이다. 난도 높은 이 시장에 어떻게든 진입해 보려, 내놓은 매물에 맞춰 자금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다. 그런데 몇 안 되는 매물들의 주인은 마음을 바꾼다. 첫 번째는 단순 변심, 두 번째는 양도세 계산 후 남는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역시 변심, 세 번째는 가계약금까지 넣었으나 리스크가 있는 물건이라 결론을 내려 우리가 변심. 전 재산을 걸고 모험할 수는 없으니까. 마음과 눈빛은 이미 제대로 모험꾼이면서 말은 그렇게 했다. 두꺼비 앞에 선 파리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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