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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Oct 16. 2023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집이라는 한 글자 (19)

파는 게 더 쫄릴까, 사는 게 더 쫄릴까. 팔 때는 기약 없이 집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이 조금 힘들었다. 그냥 둘러보는 이, 진짜 구매의사가 있는 이, 어딘가엔 '임장 스터디' 과제를 위해 방문하는 이들도 있다 하는데 보여주는 입장에선 이를 구별할 수 없었다. 가격 흥정 역시 어렵긴 매한가지였다. 우당탕탕 좌충우돌 뚝딱뚝딱의 연속. 하지만 어쨌든 집은 팔렸다. 내놓은 지 딱 3주되던 날이었다. 계좌로 받은 계약금은 허겁지겁 마이너스 통장에 욱여넣었다. 가까스로 플러스로 돌아선 계좌, 계좌들.


매도가 끝났으니 매수 차례인데, 매물 찾기가 정말 어려웠다. 온라인엔 등재되지도 않는 매물들이라 발품을 팔고 눈도장을 찍고 마음과 주머니가 모두 준비되어 있음을 확실히 알려둬야 했다. 실제로 어떤 이가 구매하겠다, 대신 자기 집이 팔려야 돈을 마련하니 잔금 일정을 넉넉하게 잡아달라 요청한 사례가 있다고 했다. 그러자 집주인은 허허 웃으며 돈 준비되면 오시라고 잘랐다는, 그렇게 매수요청을 거절했단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다. 누구에게? 바로 부동산 사장님에게.


왕년에 전국을 돌며 한가닥 제대로 이름을 날렸다는 사장님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흥미로웠다. 거기엔 의리와 맹세, 배신과 응징이 거듭 등장한다. 어느새 이야기는 구전설화에서 느와르를 넘나든다. 파란만장한 서사는 그리스의 영웅, 시칠리아의 두목, 홍콩의 따거를 떠오르게 한다. 이뤄본 사람만이 말할 수 있다. 많은 곳을 다니며 위업을 달성했으나 지나고 보니 세월이 무상하다고. 나는 이야기에 충분히 매료된다. 그 호탕함과 걸출함에 반하고 만다. 사장님의 총평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래도 그렇게 전국팔도를 돌아다닐 때가 좋았지. 진짜 재미있었어.' 여기서 다시금 깨닫는다.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그러니까 인생은 한 방이다.


이게 부동산에서 손님과 사장님이 나눌 대화인가 싶지만, 여기서 그걸 알아차린 이는 아무도 없다. 컴퓨터는 있으나 그쪽 책상엔 앉아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곱게 컬러인쇄된 조감도나 도면도 같은 건 어디에도 걸려있지 않다. 대신 손으로 지번을 그린 지도가 벽에 붙어있다. 손녀가 그린 그림, 조악한 종이 접기와 함께. 아, 그런데 공인중개사 자격증은 따신 거 맞나? 싶은데 드디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무용담도 서서히 막을 내린다. 우리는 희미한 기운을 감지한다. 테스트라면 테스트를 통과한 것 같다. 너희를 내 고객 리스트에 올려주겠노라는 테스트. 역시 지성이면 감천, 어른 공경엔 매도콜이렷다.


이제껏 세 번 물먹은 우리를 가엽게 여기며 어떻게든 새로운, 그리고 확실한 매물을 마련해 보겠노라 말한다. 그러곤 두툼한 장부를 뒤적이는 것도 모자라 새로운 리스트를 손수 작성하기 시작한다. 이 집은 대지지분이 얼마에 감정평가금액이 얼마고, 이 땅은 몇 평인데 주인이 팔고 어디로 이사 가고 싶어 하고 등등. 아직 그들은 모른다. 자기 집이 이렇게 거론되고 있는지. 하지만 동네 길목에 있는 부동산, 늘 문을 열어둔 그 부동산을 지나는 길에 덥석 손목이 잡힐지 모르는 일이다. 혹시 집 내놓을 생각 없어? 상냥하고 나긋하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그 소식만을 기다리며 날을 보낸다. 보채고 재촉한다고 될 일이 아니기에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다시 기다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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