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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Apr 12. 2024

나의 작은 민원인

그분은 특히 소극행정을 싫어하신다고

나에겐 작은 민원인이 있다. 다음 달이면 네 돌이 되는, 키는 약 1미터, 몸무게는 15kg 남짓인 사람. 인바디를 해 본 적은 없으나 최근에 급격히 근육량이 늘어난 게 분명한 그런 민원인. 이 민원인은 본인의 성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늘 그래왔던 대로 엉겨붙길 즐기나, 이젠 그게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쪼그려 앉아 뭘 하고 있노라면 뒤에서 덥석 어부바 자세로 달라붙는데, 그 튼실하고 말캉한 부피와 따뜻한 체온이 좋기도 하나 그걸 말로 하긴 힘들다. 아니, 어떤 소리든 입 밖으로 내기 힘들다. 달려들며 감은 팔이 절로 초크를 걸기에. 나는 허우적거리며 하지 마, 하지 마, 엄마 아파, 짜내곤 한다. 그럼 그걸 서운해하는 민원인. 소극행정을 몹시 싫어하는 성정을 지니고 있다.


미운 네 살, 미운 네 살, 말로는 많이 들어봤는데 작년을 떠올려보면 크게 걸리는 일은 없다. 그 시기가 조금 늦게 찾아온 걸까. 아니면 은은하고 잔잔하게 이어져왔는데 내가 몰랐던 걸까. 아마 완충지대가 있었음이 분명한데 그건 바로 어린이집이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던 그곳. 생각만 해도 가슴이 마구 저려온다. 그게 사라진 지금, 나와 민원인은 대부분의 시간을 한 치의 틈도 없이 붙어 지낸다. 이 새털처럼 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나는 지속적으로 머리를 굴려야 한다. 틀에 박힌 듯, 어제도 오늘 같고 오늘도 내일 같은 태도로 임했다가는 역시 각종 불만이 빗발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만을 최전방에서 감당할 이도 역시 나이기에 그냥 머리를 굴리는 게 낫다.


머리를 굴리다 못해 짜내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는데, 시계를 보면 열 시. 오전 열 시의 마법이다. 그럴 때면 별 수가 없다. 나가야 한다. 자전거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때론 끌고 동네 공원들을 섭렵해 나간다. 곳곳의 놀이터에서 훈련을 한다. 이때도 민원인은 절대 '혼자' 놀지 않는다. 중심을 잡도록 손을 잡아줘라, 올라갈 수 있게끔 엉덩이를 밀어 올려달라 등등. 그중 요즘 심취한 것은 시소 타기로 당연스레 자신을 높이 붕붕 뜨도록 태워달라고 요청한다. 이곳 놀이터의 시소는 한국 시소와 다르게 두껍고 무거운 통나무로 되어있다. 게다가 충격 방지용 타이어도 깊이 파묻혀 있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게다가 시소 자체의 높이도 높아 흥을 맞추려다 보면 중량 높인 스쿼트를 하는 기분이다.


꾀를 부려 시소에서 내려 손으로 오르락내리락 태워주자니 이번엔 랫풀다운 돌입이다. 나는 절로 횟수를 센다. 그래, 딱 서른, 서른 번만 하자. 하고 결심하지만 보통 이십 번에서 두 팔을 번쩍 들고 만다. 좀 쉬었다가 할게. 그러면 마지못해 내려와 다음 놀이기구로 달려가는 민원인. 언젠가는 이상한 규칙을 만들어 설득한 적도 있다. 너 오전에 시소 탔으니까 오늘은 끝이야. 시소는 하루에 한 번만 타야 하거든. 이게 말이 되나? 갸웃하더니 요새는 꼬치꼬치 이유를 캐묻는다. 그래서 나는 내 내전근의 부실함과 상완근의 허약함에 대해 조곤조곤 늘어놓는다. 다행히 내 말을 알아듣는 이는 민원인뿐이다. 그럼 그네 밀어줘! 하면 또 부들부들 거리며 그네를 밀어준다. 어서 혼자 타는 법을 익혔으면. 마음속으로 빌면서.


이제 가자고 하며 신발 속 모래를 털어달라기에 벤치에 앉혀놓고 신발과 양말, 발가락 사이까지 다 털어 다시 신겨주는데 해먹그네 한 번만 더 타고 갈래! 하면 빡이 치겠는가, 안 치겠는가. 나는 자꾸만 단호해지고 민원인의 마음엔 앙금이 생겨난다. 가장 좋은 수는 그럴싸하게 감언이설을 동원해 구슬리는 것인데, 이제는 매번 그러기에 내 인내심이 너무 짧아졌다. 방금 모래 다 털었잖아? 오늘은 그냥 가자. 내일 다시 오자. 하여 집에 가는 길엔 다시금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한다. 사실 고민도 의미 없는 게 금세 민원인의 요청이 빗발친다. 고분고분 청에 따라 팬티스타킹을 머리에 씌우고 두 발을 댕기모양으로 땋아준다. 거기에 흰 배스타월을 망토처럼 두르고 큰 집게로 고정시켜 준다. 그러면 이곳은 겨울왕국이 되고, 민원인은 엘사로 돌변한다.


나는 이명처럼 렛잇고를 반복해 들으며 끊임없이 엘사놀이에 동조해 주어야 한다. 반전은 민원인이 겨울왕국을 보지도 않았다는 거다. ost 클립 몇 편 본 게 다인데,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엘사는 미국사람이야? 미국어 써? 하며 신상을 캐묻고 나도 아이스스케이트 타고 싶어! 하며 사월 날씨가 무색한 소망을 연발한다. 그 수많은 질문과 요청에 매번 영혼 그득한 답을 하기란 정말 어렵다. 눈은 흐릿해지고 머리는 멍해진다. 이 놀이에서 탈피하기 위한 방법은 단 한 가지, 다른 놀이로 옮겨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겨우 놀이에 나의 취향을 접목해 본다. 혹은 해야 할 일들을 끼워 넣는다. 햇살 좋은 발코니에서 모종을 심고, 또띠아로 피자를 만든다. 배추를 절여 함께 겉절이를 담근다. 깨는 언제 싹이 나와? 를 감수하면서.

청소기 놀이를 하고(무선 청소기 헤드를 휘두르는 것), 빨래놀이를 하고(내가 버튼 누를래!), 그러다 진짜 휴식이 절실해지면 나는 커피부터 만든다. 진한 커피에 얼음을 띄우고 코코넛밀크와 연유를 붓는다. 컵을 들고 은근슬쩍 제시한다. 콩순이 볼래? 똘똘이 볼래? 그렇게 아이패드를 세팅해 주고 잠시 방에 틀어박혀 커피를 마신다. 당과 카페인이 이렇게나 소중하다. 10분 남짓이라도 민원인의 들이닥침이 없는 이 순간이 너무 귀하다. 그러다가도 복도 건너 엄마! 하는 소리가 들리면 다시 일어나 나가야 하는 일상. 이건 약간 병리적인 측면으로도 발전했다. 다른 언어로 재잘대는 어린이들 목소리에도 뇌와 심장이 동시에 긴장하는 현상. 하지만 제겐 돌아버릴 시간도 없다죠.


지난 주말엔 달과 민원인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잠시 홀로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레스토랑 건너편에서 트램을 타려고 길을 건너는데 신호등 색이 바뀌었다. 그래서 총총 뛰어 건넜다. 나중에 달이 말하길, 서둘러 뛰어가는 뒷모습이 되게 짠했다고. 아니, 그거 신호 바뀌어서 그런 건데?라고 말했지만 어쩌면 내 뒷모습에 진심이 묻어있을지 모르겠단 생각도 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내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detached' 였으니까. 진짜 그랬다. 불쑥 그 단어가 떠올랐다. 그렇게 detached 상태로 보낸 오후, 특별히 한 것은 없었다. 트램에서 내려 거리를 걷고, 강변의 벤치에 앉아 그냥 쉬었다. 행진하는 시위대도 보고, 요란한 음악과 함께 달리는 자전거 무리도 보았다. 그럼에도 세상은 고요하고 차분하게 느껴졌다.

강변의 놀이터, 그곳의 소요를 보면서도 귀가 긴장하지 않았다. 나와 관계없는 아이들이 찧고 까부는 것엔 긴장감이 들지 않았다. 그저 느슨하고 평화로웠다. 바로 다음 날, 민원인을 대동해 그 놀이터를 찾긴 찾았지만서도. 며칠 지난 오늘도 그랬지만서도. 여전히 모래를 퍼담아 날라주고, 엉덩이를 떠밀어 높은 곳에 올려주었다. 놀이를 마친 우리 두 손은 온통 흙빛이었다. 물론 내 얼굴도 그랬을 것이다. 이게 내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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