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 어떻게 되는 거 아냐 싶었지만 인간은 의외로 강하더군요
2박 4일로 한국을 다녀왔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인천, 김포에서 김해. 그리고 다시 역순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비행시간만 26시간으로 이건 뭐 웬만해선 이르지 못할 자리, 중역쯤 되어야 이런 스케줄로 출장을 다니려나 싶었다. 기내용 가방엔 수트와 잘 닦은 구두가 들어있고, 페이퍼를 넘기는 손목엔 묵직한 시계가 번쩍이는. 그러나 우리는 풀부킹된 이코노미석에서 반쯤 고꾸라져 실려갔다. 특히나 꼬마는 뒷좌석의 육중한 첼로 덕에 자리를 뒤로 젖히지도 못했다. 이 정도 거리를 날아가며 이렇게나 간소한 짐을 꾸린 적도 처음이다. 몇 벌의 옷들이 다였다. 우리의 행색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검은색. 도착하자마자 바로 장례식장에 가기 위함이었다. 시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받고 떠난 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외할머니. 그러니까 달의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시'자가 붙었음에도 내 마음은 '외'자에 더 끌렸다. 할머니는 겹겹의 산 사이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시골마을에 사셨다. 오랫동안 여러 번 손을 보며 덧댄 시골집. 뒷마당엔 푸성귀들이 자라고, 우리 안엔 장닭이 그리고 닭장 앞엔 꼬리를 휘휘 돌리는 백구가 살았다. 그 모두가 일용할 양식이기도 했다. 꼬마는 육촌 형, 누나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찾아내 울퉁불퉁한 장판 위로 늘어놓았다. 때론 통역을 통해 들어야 했던 진한 사투리. 할머니는 재치와 유머 감각이 있으셔서 나는 그분이 어렵거나 낯설지가 않았다. 나에게도 꼬마에게도 쥐어주시던 용돈. 맛있는 거 사 먹어라. 마른 나뭇가지 같던 할머니의 손.
구순이 넘은 연세에 노환으로 인해 차츰 쇠약해지지시며 가족들은 마음의 준비를 해 왔다. 오래 고생하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가셔서 그래도 다행이란 인사들을 들었다. 시차를 거스르며 긴 비행을 한 탓에 정작 허둥지둥한 건 나였다. 시종일관 구름을 밟으며 걷는 느낌이랄까. 슬프긴 슬픈데 오랜만에 보는 가족들을 보니 또 반가운 마음이 앞서기도 했다. 꼬마는 국화꽃 한 송이를 들고 뱅글뱅글 돌며 춤을 췄다. 지나친 각성 상태로 인한 증상임이 분명했다. 우리는 자리를 물러나와 겨우 숨을 돌렸다. 바닥부터 컵 끝까지 얼음 충만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켜자 고국에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니, 인천공항의 한글 안내문들을 볼 때부터 그랬다. 절로 눈이 밝아지는 심 봉사의 심정.
독일과 한국의 시차는 8시간. 곧 돌아갈 예정이니 어느 시간에 맞춰 깨어있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비행기에서 음료를 주면 음료를 마시고, 기내식을 주면 그걸 먹었다. 불을 끄면 눈을 감고 잠을 청했고, 미등이 켜지면 다시 간식을 먹었다. 아무 때나 먹고 아무 때나 잠들었다는 이야기다. 이건 뭐 짐승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러는 내내 겹겹의 피로가 쌓였다. 피로를 녹이는 감동의 순간이 몇 있었다. 처음으론 인천공항의 사우나였다. 찜질방 대신 목욕탕만 이용하는 것은 2시간에 만원. 시설은 꽤 말끔하고 쾌적했다. 종아리 압박밴드 위아래로 퉁퉁 부은 발을 뜨거운 물로 지지자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고 나자 잠시 사람다워진 기분이었다.
둘, 영정사진 속 할머니의 미소는 평소처럼 인자했다. 흰 국화와 색색의 꽃을 함께 장식해 놓은 모습도 참 아름다웠다. 피로에 절은 눈에도 보일 만한 아름다움이었다. 장례식장 밥을 남김없이 말끔하게 비운 것은 아마도 그게 밥, 국, 찬으로 잘 차려진 한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생선조림의 무를 먹으며 잠시 감동했다. 적절한 간 너머로 무의 달콤함이 잘 느껴져서. 그리고 이렇게 생생하게 맛을 느끼는 스스로에게 패륜적 요소가 있는지 검토해 보았다. 결론. 할머니께서도 잘 먹고 가라고 하실 것이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래서 생선조림 두 접시를 잘 비웠다. 할머니, 프랑크푸르트는 내륙이라 제가 늘 바다에서 나는 먹거리가 고프답니다, 하면서.
셋, 출국 비행기가 점심 무렵이라 전날은 공항 근처에서 자기로 했다. 목적이 그것이니 별다르게 따질 것도 없이 공항 앞 호텔을 찾았는데, 그게 커다란 몰과 연결되어 있다니 참으로 감동이었다. 규모도 작은 다이소에서 나는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장바구니가 넘쳐나도록 쓸어 담은 것은 자잘한 살림도구들이었다. 독일에도 있겠으나 그 퀄리티와 가격이 항상 비례하진 않는 그런 소품들. 급기야 계산대 직원분이 바코드를 찍다 감탄하시기까지 했다. 다이소에서 7만 원, 제대로 플렉스 했다. 이어 마트에서 멸치액젓과 국물용 멸치, 마른미역을 마구 담았다. 바다와 먼 곳에 살다 보니 짠내 나는 것에 미쳐버린 것일까. 그리고 몰을 돌다 기장이 아담한 바지를 두 벌, 치마를 하나 산다. 독일에도 물론 작은 사람들이 있겠으나.. 휴, 아무튼 그렇게 되었다.
마지막은 인천공항에서였다. 출국 심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국으로 올 때 만났던 루프트한자 승무원들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를 보고 놀란 표정이었다. 그냥 놀람이 아니었는지 묻기까지 했다. 아니, 왜? 다시 돌아가세요? 아, 네. 저희가 프랑크푸르트에 살아서요. 그런데 왜 이렇게 빨리 가세요? 아, 상을 당해서 온 거라서요.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 어쨌거나 서로가 반가운 느낌이었다. 그래서 단골손님이 된 기분으로 비행기에 탔다. 꼬마는 루프트한자의 거의 모든 어린이용품을 선물 받았고, 그에 맞춰 아는 독일어(할로, 당케, 츄스)를 연발하며 장단을 맞췄다. 그래서 13시간의 비행이 그럭저럭 흘러갈 수 있었다. 비록 착륙 전 마지막 10분 동안 울음이 터지고 말았지만. 내리고 싶어, 내리고 싶어, 이어지는 흐느낌. 물론 나도 같이 흐느끼고 싶었다.
공항에 내리자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쓰기엔 늘 애매한 그런 비였다. 이상했다. 집에 돌아왔다는 감각이 들었다. 온 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여기를 집이라고 인식하게 되다니. 한국과 독일의 출입국 심사대에선 모두 거주증이 있냐고 물었다. 이제 관광비자로 오고 가는 여행자가 아닌 셈이다. 아직 캠핑 같은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기가 집인 것이다. 한 무더기의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는 사이, 달과 꼬마는 자전거를 타러 나간다. 오랜 비행으로 좀이 쑤시는 것은 이해가 가긴 하지만, 비 오는 저녁 자전거를 타러 가다니. 잠시 밖을 내다보고 발코니의 화분들을 점검했다. 가져온 짐들을 정리하고 (다행히 멸치액젓도 미역과 멸치도 모두 무사했다) 맥주를 꺼냈다. 첫 모금에 맥주에 관해선 완전히 독일 편에 서고 말았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