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라하우스와 중립국 탐방
월화수목금이 바쁘게 굴러가는 탓에 정신을 차려보면 금요일 저녁이다. 특별한 이벤트가 없고 몸과 마음의 컨디션도 괜찮다면 이쯤에서 누가 툭 질문을 던진다. 주말에 뭐 하지? 어디 놀러라도 갈까.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폭넓게 열려있다. 머리 맞대고 열어본 구글맵처럼. 동서남북 빙글빙글 지도를 돌리며 갈 만한 곳을 찾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미지未知의 세계가 차고 넘칠 듯 펼쳐져있다. 거기에 적당한 주행거리, 볼 만한 곳, 쉴 만한 물가 등을 고려해 좁혀가다 정한 곳은 스위스 바젤. 그리고 국경에 인접한 비트라하우스였다.
사실 스위스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은 로잔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로잔연방공과대학교. 그곳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한 전도유망한 유학생의 애절하고 구슬픈 기타와 여리디 여린 목소리를 감상하는 것, 그런 바람이 있었다. 여기서 앨범은 당연히 <국경의 밤>. 그러나 그곳은 조금 멀다. 물론 서울에서 보다야 가깝겠지만, 당일치기로 다녀오기엔 살짝 부담스러운 거리다. 그렇다. 당일치기로 국경을 넘었다 돌아오는 일정. 사실상 고립된 섬나라에선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던 나들이. 문득 <광장>의 구절이 떠오른다.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다시금 묻고 물어도 명준의 대답은 같다. 최인훈과 루시드폴의 세계를 지나 우리는 남쪽으로 떠난다. 하리보와 카프리썬, 프렛첼과 탄산수. 실로 가볍고 맹한 출발이다.
꼬마의 강력한 요청으로 들린 휴게소 놀이터에서 한참 놀고 난 뒤, 얼마 지나 비트라캠퍼스에 도착했다. 넓은 부지에 뮤지엄, 가구매장, 물류센터, 컨퍼런스센터 등이 있고, 각 건물들은 잘 조성된 산책로로 연결되었다. 안내도를 보자마자 깨달았다. 여기에서 하루 종일 놀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일단 밥부터 잘 먹어야겠지. 하우스 지상층의 카페테리아를 찾는다. 당연히 모든 가구는 비트라다. 볼로네제 스파게티, 구운 야채 샌드위치, 밥을 곁들인 칠리 꼰 까르네 그리고 스위스 맥주. 테이블 위의 작은 생화, 동화 속 고양이 같은 오브제, 벽에 나란히 걸린 신문철이 인상적이었다. 만석에 가까운 시간임에도 상냥했던 직원들도. (병맥주를 유리컵 안에 수직으로 꽂아 따르는 것도!)
흡족하게 부른 배를 안고 건물의 층층을 오르락내리락한다. 무수한 의자와 쇼파에 몸을 맡기고 감촉과 질감을 느껴본다. 어디까지 등이 젖혀지나 각도를 시험하고 팔걸이의 안락함 정도를 체크한다. 키가 작은 내겐 언제나 의자 높이가 중요하므로 발끝의 편안함도 민감하게 살펴본다. (키 큰 사람은 모르는 그런 게 있다. 애매하게 뜬 발끝은 다리를 꼬게 만들고 당연히 불안정한 자세를 유발한다. 집 아닌 장소에서 딱 맞는 높이의 의자를 발견하는 경우는 드문데, 가장 적절한 의자를 만난 곳은 우래옥이다. 역시 그냥 유서 깊은 곳이 아니구나, 고전적인 평균키를 가진 손님들 시절부터 이제껏 성업하는 가락이 의자에서도 드러나는구나 하며 엉덩이 깊이 감동했다.) 역시 난 무게중심이 낮은 의자가 좋아, 취향을 재고하고 확신을 얻는 순간.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들을 몰라도 브랜드의 정체성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 그게 결국 브랜딩의 목표 아닐까. 비트라의 일관된 정서를 눈과 손, 엉덩이로 확인하는 시간은 꽤 즐거웠다. 밖으론 넉넉한 정원이 이어졌다. 작은 울타리 안에 무지개색의 코끼리 의자들이 놓여있다. 작은 팻말에 주의하란 안내가 있기에 들여다보니 코끼리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라고 쓰여있다. 울타리와 의자가 다인 그곳에서 아이들은 꺅꺅거리며 놀고 있다. 울타리 밖의 의자에 앉아 아이들이 노는 것을 마음 편히 본다. 과연 의자 인심이 좋은 곳이군 생각하면서. 달과 꼬마는 나무에서 체리를 따 먹더니 내 입에도 쑤셔 넣어준다. 덕분에 핏기 묻은 입을 하고 산책로로 나선다. 자연스럽게 흐드러진-그러나 꽤 공을 들였을-꽃들을 지나는데 모래 위로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
동전인가? 유로는 아니고 이케아 아이스크림 코인 같네 하며 집어든 것은 5프랑, 스위스 동전이다. 오! 좋은데? 바로 환율을 검색해 보니 1,543원. 산책하다 7,500원 주웠네. 괜히 신이 나는 것은 이제 곧 바젤로 떠날 참이기에. 다시금 차에 올라 국경을 넘는다. 작은 검문소를 그냥 지나친다. 아트바젤을 앞둔 도시는 분주해 보인다. 여기저기 공사하는 곳이 많고-한 주만에 마무리할 수 있을까?-행사를 알리는 깃발들도 펄럭이고 있다. 강변을 걷고 저녁을 먹으면 좋겠다 싶은데 다리 아래로 흐르는 강물이 매섭다. 싯누런 강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다. 부표에 묶어둔 작은 배들은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요동치고 있다. 이건 황허강 느낌인데. 그야말로 세파를 앞에 두고 많은 이들은 토요일 저녁을 즐기고 있다. 우리도 작은 레스토랑을 찾는다.
테라스 자리에 앉아 메뉴를 펼친다. 돼지고기찜과 뇨끼, 봉골레 파스타를 시키기로 한다. 대략 한 접시에 35프랑 정도. 35 곱하기 15 하면 얼마야,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가지만 곁들일 와인도 한 잔씩 주문한다. 식전 빵을 물어뜯고 있는데 갑자기 웅성웅성한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야외에 있던 손님들이 자리를 뜨고, 직원들은 재빠른 손놀림으로 파라솔을 접는다. 우리는 어닝 아래 있으니 괜찮겠지, 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이윽고 테이블 위로도 빗물이 튄다. 뒷골목의 밴드들도 자취를 감췄다. 다행히 실내로 자리를 옮겼으나 비는 이제 폭우 수준으로 바뀌었다. 주차장까지 돌아갈 것을 걱정해야 할 참이다. 비가 좀 잦아들기를 기다려 볼까? 꼬마는 주전부리로 나온 튀긴 펜네를 깨문다. 짭짤해진 손가락도 쪽쪽 빤다.
주운 5프랑은 팁으로 놓고 간다. 후두둑 내리는 비를 맞으며 우리는 주차장까지 걷는다. 한산해진 거리. 군데군데 파헤쳐 놓은 공사현장을 지난다. 프라이드 먼스를 알리는 무지개 깃발이 크게 걸려있다. 그 옆엔 정사각형의 스위스 국기도. 문득 비를 맞으며 잰걸음을 걷는 모습이 웃겨 웃음이 난다. 스위스에서 눈 대신 비를 맞고, 메뉴판 가격 보고 놀라다 이젠 종종거리며 돌아가네. 그렇게 다시 북으로 북으로 향한다. 하루 만에 국경 넘는 여행을 했네. 이제 다음엔 어디까지 가 볼까? 지도 위 손가락은 거침없이 움직이고 그때마다 도시 이름들이 모였다 흩어진다. 언젠가는 꼭 로잔에 가겠어. 가서 국경의 밤을 듣겠어. 그리고 잠은 이탈리아 가서 잘 거야. 스위스는 안 되겠어. 그렇게 귀한 배움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