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일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량 Jun 24. 2024

시속 130km로 너에게 갈게

독일에서 운전하기

운전경력 11년 차지만 독일에서는 초보다. 다행히 좌측운전은 아니지만 겁을 좀 먹긴 했다.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표지판과 신호등을 잘 읽기, 무엇보다 교통 흐름을 잘 파악하기. 머리로 반복해 본다. 꼬마를 뒤에 태우고 나선 아침,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오히려 좋아. 이런 날엔 조금이라도 자전거가 없을 테니까.


주택가 길에선 보행자나 자전거를 조심해야 한다.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서울에서와 조금 달랐다. 일단 자전거 수가 많거니와 그 종류도 다양했다. 그냥 자전거, 앞이나 뒤에 웨건을 달아 꼬마들을 태운 자전거(웨건의 투명창으로 조그만 헬멧들이 보인다), 보조의자를 달아 아기를 태운 자전거들이 도로를 달린다. 학교 주변 도로가에선 불쑥 튀어나오는 아이들을, 그리고 느긋한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노인들을 모두 조심해야 했다. 그들의 보행엔 '멈칫'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멈칫'은 나만 가지고 있는 듯했다. 보행자일 때 나는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초입에서 늘 '멈칫'했고, 자연스럽게 멈추는 차를 보며 늘 '꾸벅'했다. 몸이 절로 그렇게 움직였다. 본의 아니게 발하고 마는 동양의 예의범절.


서래 씨는요, 몸이 꼿꼿해요. 긴장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똑바른 사람은 드물어요. 난 이게 서래 씨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고 생각합니다.


자세가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듯, 운전습관 역시 그렇다. 내 운전에는 나란 사람의 성격, 사고방식,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드러난다. 거기엔 군데군데 얼룩 같은 결점들이 묻어있다. 배경으론 남산 아래 한강이 넘실거리고. 서울의 도로교통상황, 인구밀도, 출퇴근 시간, 스트레스와 압박의 정도. 그 도로에서 나는 서울사람답게 운전하는 법을 배웠다. 도로엔 나름의 위계질서가 분명했다. 네 바퀴는 좋고, 두 바퀴는 나쁘달까. 오토바이나 자전거, 보행자는 차례로 계급의 아랫단을 형성했다. 자기 안전은 스스로 지켜야 하는 것, 도로는 동물농장 아니 야생의 현장이었다. 설령 네 바퀴라 해도 그러했다. 왜냐하면 어떤 네 바퀴는 다른 네 바퀴보다 좀 더 좋은 거니까. 차의 크기, 엠블럼, 연식 등등이 훌륭한 지표였다.


차창 밖으로 척 내놓는다는 울긋불긋한 팔토시는 우스웠으나 그 마음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서울의 나는 적극적인 허세 대신 꼼꼼한 방어를 택했다. 썬팅은 가능한 진하게, 차량의 모델과 색은 무난한 것으로,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특히나 성별을 상상하기 쉬운 소품은 절대 두지 않았다. 대시보드에 올려두는 핸드폰 번호는 에이포지에 인쇄한 11개의 숫자가 다였다. (그 또한 검은색 바탕체에 그저 볼드다) 누가 운전하는지 알 수 없는 차.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차. 너무 흔해서 기억에 남지 않는 차. 그리고 절대 빵! 당하지 않는 차. 냉전 시대 스파이도 아니건만 내 목표는 올곧게 살아남았다.  


그래서 썬팅 없이 훤한 운전석에 앉았을 때 살짝 벌거벗은 기분이 들었다. 너무 환하고 훤하다. 안전을 위해 앞 좌석 썬팅이 금지라는데, 이게 과연 안전한 게 맞는지. 조심조심 길을 나서는데 (새 차라고 시동을 못 켜서 꼬마와 주차장에서 잠시 우왕좌왕한 후다) 상대 운전자들의 의도가 너무나 잘 보인다. 부슬비 사이로도 훤히 들여다보이는 손짓들. 먼저 가세요나 고맙습니다 같은 인사가 자연스레 계속된다. 그러니까 독일에서 운전은 오른발과 왼손으로 하는 셈이구나. 나는 새로운 문법에 젖어들기 시작한다. 마을버스 기사님들처럼 손짓에 여유도 생긴다. 그렇게 생긴 용기로 다음 단계에 진입해 보기로 한다. 여전히 창은 훤하고 왼손은 부드럽지만 더 이상 손짓을 살필 수 없는 도로, 아우토반에 들어선다.


속도제한 없는 고속도로, 요금도 받지 않아 톨게이트도 없다. 그저 램프만 돌면 바로 아우토반 진입이다. 가끔 속도제한을 알리는 전광판이 켜지기도 하나 조금 달리면 다른 전광판에 불이 들어온다. 동그라미 안엔 120이란 숫자가 번쩍인다. 그리고 동그라미를 가로지르는 긴 선. 120의 속도제한이 사라졌다는 의미다. 나는 도로의 제일 마지막 차선에서 교통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눈치껏 달리려 애쓰나 속도계는 이미 시속 100km를 넘어섰다. 곁눈질로 일차선을 맹렬하게 달려가는 차들을 본다. 추월차선은 제법 평등하다. 속도만 낼 수 있다면, 추월만 할 수 있다면 누구든 상관없다. 피아트 친퀘첸토도, 투 도어의 스마트도 맹렬하게 달려간다. 오토바이도 굉음을 내며 달려간다. 네 바퀴든 두 바퀴든 역량만 된다면 타 볼 수 있는 차선이다.


가끔 추월차선에서 평균 속도로 달리는 차 뒤로 매섭게 달려오는 차를 본다. 속도 안 낼 거면 비켜, 큰 동작의 빗자루질처럼 앞차를 쓸어버릴 기세다. 여기 사람들 진짜 속도에 진심이네 싶다. 내재된 기준에 따라 고른 내 폭스바겐은 지극히 무난하고 평범하지만, 얘도 언제든 달릴 준비는 되어있다. 마음먹고 액셀을 밟아보니 차의 마음가짐이 바뀌는 게 느껴졌다. 엔진 소리가 달라지며 쏜살같이 튀어나간다. 무게중심은 낮아지고 아랫배는 시트에 달라붙는다. 관성의 법칙을 단전으로 터득하는 순간이다. 동네 마실용 차도 이러한데 슈퍼카는 어떨까? 그런 상상을 하며 아우토반을 달린다. 뒷좌석의 꼬마의 수발-방울토마토 큰 건 엄마 먹어, 하고 건네주는 걸 오른손 뒤로 뻗어 받는다-을 들어가며 시속 130km로 달린다. 전속력으로 너에게 갈게.


여기서 '너'는 어린이집. 그렇다. 꼬마는 드디어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했다. 그러니 비 내리는 아침, 악셀을 아니 밟을 수 없다. 안전하고 늠름하게, 그러나 맹렬하게 주파한다. 아침에 두 번, 오후에 두 번. 하루 네 번 아우토반을 달리며 마음만은 이미 레이서다. 이렇게 등하원길의 퓨리오사가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종로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