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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Oct 18. 2021

드라마 속으로 걸어 들어간 밤, 교토의 바에서

몇 년 전의 설 연휴, 교토에서 우리는 무엇을 했던가. 금빛으로 찬란한 절과 북적이는 드럭스토어를 들렀다. 고색창연한 까페에서 카레 정식을 먹고, 미술관 식당에선 늦은 점심을 먹었다. 동네 사람들이 자주 간다는 라멘집을 들리고, 많은 이들이 모여드는 독립서점도 찾았다. 발길 닿는대로 걷다 까페를 만나면 들어가 잠시 쉬었다. 언제 어디서나 검은빛에 가까운 커피가 나왔다. 빈 속의 여린 위를 짓밟고 끝내 나를 죽일 것만 같은 빛깔. 테이블 한켠에 놓인 크림을 부으면 부드러운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교토대학교 앞에서 충동적으로 머리를 잘라 단발이 되었다. 편의점에서 손톱깎이를 샀고, 슈퍼에선 달고 짠 주전부리를 샀다. 그러느라 낮의 강변을 걷고 밤의 다리를 건넜다. 별 다르게 할 일이 없었으므로 심심해서 들어간 성인용품점에서 오랜 구경을 했다. 요란한 진열장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카운터였다. 전당포 카운터처럼 방어적인 모습에다 어깨 높이 위론 가림막이 있어 점원과 손님이 얼굴을 마주칠 수 없었다. 쭈뼛거리며 결제하는 민망함을 대신하고 서로의 익명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을까? 그렇게까지 고객을 존중해주거늘 기어이 택스 리펀을 받겠다고 여권까지 내민 나는 떳떳한 성인, 참으로 어른다운 어른이었다.


이 사소한 경험들은 모두 그곳, 한밤의 선술집을 위한 복선이었다. 성인용품점을 포함해 그때 들린 곳곳의 크고 작은 기념품들은 모두 어디로 간 지 모르게 흩어졌으나, 우리는 잊을 만하면 그 술집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러다 노래하듯 술집의 이름을 크게 불러보기도 한다. 'Feel 京 good!'. 그렇다. 여기서 '京'는 교토의 '교'다. 필교굿, 도통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우리의 숙소는 역에서 조금 떨어진 주택가에 있었다. 작은 간판 아니면 호텔인 줄도 모를 평범한 곳이었다. 여행의 막바지, 그냥 잠들기는 아쉽고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할까 하는 마음에 늦은 저녁거리로 나섰다. 번화가에  미친 길가에 작은 술집이 보였다. 분위기가 어떤지 슬쩍 들여다보고 싶은데 간살이라고 해야 하나, 얇고  나무들을 이어 붙여놓아 안이  보이지 않았다. 허나 수상쩍고 무서운 분위기는 아닌 듯하여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안은 바답게 어둑어둑하다. 살짝 소박한 느낌도 든다. 디귿자 모양의 바가 있고, 그 안에 바텐더와 바텐더의 조수가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깨 위 가림막은 없어 환영의 인사도 받는다. 바텐더는 중년의 아저씨로 지극히 바텐더스러운 복장을 하고 있다. 잘 차려입은 와이셔츠 위로 조끼를 입었고 안경엔 기다란 금속 줄도 달려있다. 그렇다면 안주머니에 회중시계도 있을지 몰라, 나는 몰래 생각한다. 우리는 메뉴판을 받아 들고 간단한 인사를 나눈다. 여행자인가요? 어디에서 왔나요? 한국에서 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환영합니다. 웰컴 투 교토!


산토리 위스키 언더락 그리고 미도리. 잔을 홀짝이며  작은 바를 관찰한다. 디귿자의 위쪽 부분엔 제법 술이 취한 아저씨가 앉아있다.   가장  변에는  사람이 앉아있다. 외국인 커플  쌍과 홀로 앉은 아저씨다. 그리고 마지막 변에 우리 둘이다. 술이 많이 취한 아저씨는 커플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다.  덕에 나는  커플이 미국에서  것을 알게 되었다. "? 미국? 하하하 그럼 베이스볼 좋아해요? 나는 좋아하지~" 낮은 피치의 중얼중얼거리는 말소리에 우린 슬쩍 웃고 만다. 미국인 커플의 머쓱함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아저씨는 계속 중얼거리더니  고꾸라져 바에 얼굴을 묻는다. 풀어헤친 넥타이도 곁에 함께다.


뭐야, 여기 되게 웃긴데? 심야식당 같잖아.


나의 얕은 환상에 보답하려는  핑퐁 같은 대화가  너머로 건너 다닌다. 바텐더 조수는 인도네시아 출신의 아가씨로 여긴 워킹홀리데이로 오게  것이라 한다. 실무적인 표정으로 칵테일 제조 과정을 돕고 있다. 본격적인 조주와 접객은 바텐더가 맡은 모양으로 잔을 내어줌과 동시에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어진다. 아저씨는 원래 무역상사에 다니다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바를 열게 되었다고 한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에 잠시 미국에 살기도  영어를 조금   있다고. 그렇군요. 우리까지 합하면 4개국 사람들이  좁은 바에 모여있는 거네요. 정말 뭐랄까. 드라마 세트장에 들어온 느낌인데요.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까의 미국인 커플 옆 옆 자리에 앉은, 지금까지 말없이 지긋한 웃음만 지으며 술을 마시던 아저씨가 있다. 퇴근길 홀로 한 잔 하러 왔다기엔 또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정말 정석적인 캐릭터 모습이다. 흐트러짐 없이 잘 갖춰 입은 수트, 살짝 흰머리가 내려앉은 모습에 은은한 미소. 나는 그 어떤 퇴근길에서도 저런 아저씨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는 실로 여기 존재해 우아한 매너로 잔을 기울이고 있다. 아까 잠든 주정뱅이는 이제 제대로 두 팔을 엇갈려 괴고 쿨쿨 자고 있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깨울 생각을 않는다. 미국인 커플은 몇 잔을 더 마시다 자리를 떴다. 바텐더 조수는 마른행주로 유리잔을 닦고 있다. 우리는? 바 안으로 들어가 바텐더 아저씨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을 찍어주던 멋진 아저씨도 합류해 우리는 같은 프레임 안에서 웃고 있다. 팬서비스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착각일까. 어느새 나는 바텐더 아저씨의 이름을 한글로 써서 쥐어주고, 아저씨는 페이스북 주소를 알려주고 있다.


가게 문을 열고 나올 때도 어리둥절했지만, 자고 일어나니 더욱 그렇다. 비교적 맑은 정신으로 어제의 거리를 지나는데, 간살 안 실내는 어둠에 잠겨있다. 아침, 아직 술집이 문을 열지 않아 그런 것임에도 어쩐지 다른 세상에 다녀온 느낌이다. 하루키의 단편들에서 종종 그런 바를 만난 것 같다. 시공간을 한번 꼬아 다른 세계로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바. 여우가 재주넘기를 하고 토끼가 달려간다. 동그란 얼음이 짤랑 소리를 내고, 아무렇지 않게 영어로 안부를 묻는 인터내셔널한 밤. 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는지, 그런 일들이 어떤 맥락으로 흩어졌다 모여드는지 알 것만 같았다. 하루키 소설이 은근히 실증적이란 생각을 했다. 별다른 사연 없던 내가 교토에 사연을 만들고 온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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