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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Oct 12. 2021

할머니와 헬리녹스

시어머니, 이 예사롭지도 사사롭지도 않은 이름은 무엇인가. 남자친구의 어머니에서 남편의 어머니, 그리고 아기의 할머니가 되기까지 많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실 남자친구의 어머니나 남편의 어머니란 이름도 수 틀리면 털어버릴 수 있는 이름이다. 꼭 털어버리겠다는 게 아니라, 만에 하나 가능한 일이긴 하다는 거다. 님이란 글자에 점 하나 찍고 돌아서고 나면, 그 어머니야 말해 무엇한담. 허나 아기의 할머니란 이름이 되자 관계의 무게가 달라졌다. 아기의 어떤 눈짓, 엄지손가락의 모양, 아직 우리가 채 발견하지 못한 특성들은 분명 할머니에게서 온 것이기도 하니까. 얼굴을 안 볼 수는 있으나 몸에 새겨진 것을 어쩌진 못하겠지. 여하튼 강산이 변하는 시간 동안 나와 어머니 사이에도 어느덧 역사가 쌓였다. 이 역사엔 기쁨과 눈물, 고뇌와 회한, 그리고 사랑이 숨어있다.


우리가 서로를 생각하고 그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살아온 길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어머니의 사랑은 이렇다. 보고 싶고 그리운 자식들에게 손수 만든 무엇들을 잘 차려 먹이고 싶은 것, 그게 어머니의 사랑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서울에 오시는 길엔 해먹이고 싶은 것들을 바리바리 싸오신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해보려 하나, 어떤 지점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예컨대 어린 시절 여름휴가 갈 때나 보았던 커다란 아이스박스 같은 것이 그렇다. 어른 둘이서도 끙차 하고 들어야 하는 아이스박스 안에선 저녁에 차려먹을 불고깃감과 상추, 깻잎, 고추 세트가 들어있다. 어디 그뿐이랴. 여러 종류의 김치들과 세세히 준비해 온 밑반찬들이 한가득에 커다란 갈치와 새우, 밤과 고구마, 깨와 고춧가루 같은 것들도 켜켜이 숨어있다. 이것들은 귀하고 맛있다. 그 자체로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반찬통으로 빼곡해진 냉장고를 들여다볼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이 순간 귀한 정성과 사랑은 '상하기 전에 다 먹어야 할 의무'로 둔갑한다. 어른 둘에 아직 두 돌이 안 된 아기에겐 분명 과한 분량이다.


힘들게 준비해 온 것들을 잘 먹어주는 것이 효도일진대, 고작해야 20분 남짓의 식사를 위해 수고로이 차리고 치우는 과정을 지켜보다 보면 수저를 들기도 전 진이 빠지고 만다. 한 걸음 떨어져 바라봐도 부엌은 북적북적하다. 압력솥의 김이 끓고, 팬에선 고기가 지글거린다. 간소한 살림에 얼마 안 되는 접시들이 총동원되고 덕분에 식기세척기는 대낮부터 열심히 돌고 돈다. 아, 나는 못 하겠다. 나보고 하라고 한 것도 아니지만 여기에 더 동참할 수 없다. 동조할 수 없다. 아침을 먹지 않는 내가 오랜만에 아침을 먹었으니, 그 김에 점심은 먹지 않겠다고 말한다. 불고기는 그윽한 냄새 풍기며 다 익어가는데 분주하게 준비하는 식탁 위에 찬물을 뿌린 셈이다. 어머니는 입맛이 없어도 다 같이 먹는 김에 먹어야 한다는 지극히 어머니다운 말로 나를 회유하지만, 나는 편히들 드시란 말과 함께 아기와 방에 숨는다.


내 안에 드는 거부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한때는 나에게도 본인과 같은 그 길을 걸으라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그 거부감은 더욱 강렬했다. 남자들은 소파에 앉아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고, 여자들은 이리 동동 저리 동동 바쁘게 뛰어다니는 장면. 식사를 마친 뒤에도 남자들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빠져나와 커피와 과일을 기다리고 있다. 정치니 경제니 같은 이야깃거리 사이


 '내가 할게. 엄마가 금방 한다. 기름기가 많아서 엄마가 해야 해.'

 '아니에요. 어머니. 제가 할게요. 이리 주세요.'


싱크대 앞, 고무장갑을 두고 다투는 그 신경전이란 참을 수 없었다. 식기세척기의 등장 이후엔 잔반을 버리고 밥풀을 떼어내는 애벌 설거지에서 그 장면이 답습되었다. 더 이상 이럴 수는 없다. 우리 모두 알약 먹는 시대가 속히 도래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건 누가 먹을 알약, 또 이건 언제 먹을 알약. 물을 따르고 약을 챙겨주는 것은 또 누가 할지 이 구도라면 답이 뻔했다. 지난 시절, 나는 시종일관 냉소로 무장해 그 모두를 비웃었다. 어머니 앞에선 절대 못하고, 블로그에 주구장창 써댔다. 그렇게 일목요연 생각을 정리해 달과 싸우고 나와 싸웠다.


'전 안 먹을래요. 많이들 드세요.' 


이 말은 그래서 어쩌면 관계의 진전에 가깝다. 꾸역꾸역 먹고 돌아서 분노하지 않고, 나의 싫음을 표시하는 것. 그건 이제껏 내가 잘하지 못했던 일이어서 홧병을 불러일으키는 주범이기도 했다. 물론 그 말이 매끄럽고 세련되지는 못했기에 어머니는 속이 상하신 모양이다. 그 속상함까지 내 책임이라 생각했던 때엔 또 안절부절못하며 전전긍긍했을 터인데, 이번의 나는 어쩐지 그걸 그냥 스쳐버린다. 흘려버린다. 못 하는 것을 억지로 해서 탈이 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에.


대신 나는 내 방식의 사랑을 준비한다.


부모님께 축하드릴 일을 요란하고 뻑적지근한 이벤트로 만들어낸다. 그냥 박수와 찬사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찬란한 빛깔의 가랜드 위에 인쇄해 온 축하 문구를 단다. 상완과 하완이 공기주입기와 협력해 부풀린 열다섯 개의 풍선으로 풍성한 자리를 만든다. 어울리는 음악을 선곡하고 부모님이 깜짝 놀라는 장면을 촬영한다. 마침 아기는 적절한 때에 난입해 자리에 웃음을 더한다. 우리 모두는 깔깔 웃는다. 또 다른 장면도 있다. 이른 오전, 아기와 다 함께 소풍을 간다. 나무 아래 알맞은 자리를 찾고 준비해 온 캠핑 의자를 꺼내 척척 조립한다. 두 분이서 나란히 앉으실 수 있도록 의자를 놓고 가방 속의 간식과 음료수도 꺼낸다.


'와, 너무 예뻐요. 제가 사진 찍어드릴게요.'


나는 대여섯 발 물러나 두 분의 사진을 찍는다. 마침 배경도 근사하고 아름다워 숲 속의 별장에 온 것만 같다. 노란 꽃과 보라색 꽃이 예쁘게 어우러지고 두 분은 싱글벙글 밝은 얼굴로 웃고 있다. 아름답고 흐뭇한 풍경이다. 이것이 나만의 만족, 나만의 사랑 표현은 아니었나 보다. 나들이에서 돌아온 아기가 자는 사이 나는 달과 부모님께 드라이브를 권한다. 목적지는 캠핑용품샵이다. 그냥 둘러보기만 하실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길 두 분의 손엔 두 개의 캠핑의자가 들려있다. 아까의 짧은 피크닉이 꽤 마음에 드셨나 보다. 꺼내어 펼쳐 보이는 자리에 다시금 아기가 난입한다. 아기의 동작은 민첩하고 날렵해 완성된 의자에 제일 먼저 올라탄다. 그러고는 소꿉놀이 장난감 컵을 들고 마시는 시늉을 한다. 모두가 아기의 귀여움에 어질어질해하는 순간, 아기는 재롱의 방점을 찍는다.


'캬~'


모두들 할 말을 잊고 그저 웃음만 터뜨린다. 아기의 모든 움직임엔 충만한 사랑받고 있음이 묻어난다. 달과 나, 이렇게 셋이서 지낼 때와 다른 농도의 미소, 다른 크기의 자신감이 드러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의 힘이 그렇게나 센 것을 본다. 안아주고 얼러주고 끊임없이 감탄해주는 사이 3박 4일이 흘렀다. 이런 만남이라면 참으로 좋다고 9년 차 며느리는 생각한다. 며느리의 구력, 구력 말만 했는데 9년차에 이르러 조금씩 완성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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