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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Oct 05. 2021

9주년, 스시조에서

오래된 나라의 마지막 황제, 그가 만든 작은 단의 둘레를 따라 걷는다. 마침 바람이 불어 무성한 잎들이 일렁인다. 한눈에도 나이를 많이 먹은 나무들이 여러 겹의 그늘을 만들어 준다. 우리는 자연스레 손을 잡고 어깨를 붙여 걷는다. 그래도 좋은 날, 결혼 9주년을 기념하는 날이다.


마주한 우리 앞에 뜨거운 물수건과 따뜻한 차가 놓인다. 이거 보니 기내식 먹기 전 주는 것 같아, 하며 우리는 킬킬댄다. 집게로 놓아줄 만큼의 뜨거운 물수건과 달그락 소리가 나는 플라스틱 트레이. 그리고 기대할 것 없음에도 자꾸 기대감이 들던 기내식의 추억을 생각한다. 오늘은 그보다 조금 더 땅과 가까운 곳에서 먹는 점심이다. 찬찬히 메뉴를 들여다보고 낯선 이름의 조합들이 어떤 맛을 자아낼지 상상해 본다. 여름의 끝과 가을의 시작이 교차하는 때, 바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제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다행히 다소곳이 놓인 접시들 위론 재료와 조리 방법을 알려주는 설명도 함께다. 고개를 끄덕이며 첫 수저를 뜨기 전 서로를 바라보며 다짐한다.


'오늘은 좀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자.'


그래서 우리는 평소의 식탁에서보다 많은 이야기들을 나눈다. 옆에 앉아 뽀로로 포크를 휘두르는 누군가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손으론 작은 크기의 김밥을 말면서, 눈으론 아기의 동작을 따라가며, 머리론 지금까지 먹인 양과 남은 양을 가늠하지 않아도 되는 오후다. 테이블을 담당하는 서버가 흰 린넨을 펼쳐 무릎 위에 깔아줄 때, 나는 비슷하게 손수건을 펼치고 훔치고 탁탁 털어내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러면 뭉개진 밥풀이나 으깨진 버섯 같은 게 함부로 떨어졌다. 식탁 주변을 기며 다 닦아냈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아기는 제 의자 주변에서 마른 밥풀 같은 걸 주워 먹으며 씨익 웃곤 했다.


'에이, 지지야. 지지.'


하며 손사래를 치면 그게 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낼롬낼롬 주워 먹었다. 그래, 맛있게 먹어라. 언제나 두 손 먼저 드는 것은 나였다.


작고 귀여운 뚜껑을 열면 진한 농도의 수프,  점의 그림 같은 사시미, 소스에  조린 스테이크와 드디어 등장한 주방장 특선 스시까지.  계절의 물고기들은 적당히 살이 오르고 알맞게 달짝지근해지는 모양이었다. 우리의 위도 적당히 알맞게 채워졌다. 마지막 디저트 스푼을 내려놓자 기분 좋은 포만감이 밀려왔다.  김에 우리는 아까의 환구단을 다시 한번 돌아보기로 한다. 해는 더욱 쨍쨍해져  아래 명암이 짙었다. 모래 위를 자박자박 걸으며 얼마 남지 않은 자유 시간을 음미했다. 그렇게 9주년은 막을 내렸다. 그럼 내년엔 어디에서 무엇을?  그렇듯  상상은 보폭을 휙휙 넓히고 그래서 나는 벌써부터 즐겁다. 좋은 일이 있을  같아, 지레짐작 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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