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Ones own Seoul

사랑니 소회

ones own seoul

by 한량

몇 년을 기다린 끝에 용기를 냈다. 사랑니를 뽑기로 했다. 누워서 났지만 별다른 통증은 없었기에 없는 척 모르는 척 해왔다. 그러나 있는 것을 없다고 숨길 수는 없다. 핸드폰 플래시를 켜 입 안을 비춰보니 조금씩 충치가 생긴 게 보였다. 이젠 때가 온 것이다.


사랑니 뽑기로 유명하다는 병원에 전화를 했다. '저희 병원 방문하신 적 있으신가요?' '네, 예전에 간 적 있습니다.' 하고 이름과 생년월일을 읊으니 '아.. 4년 전이시군요. 예약 언제로 잡아드릴까요?' 란 답이 돌아왔다. 분명히 들었다. '아' 다음에 이어진 짧은 침묵과 내적 탄식을. 쓸데없이 영민한 귀는 접어두고 나는 가까운 날짜를 말한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무서운 마음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이다. 이런저런 정보를 습득해 무서움을 물리치는 대신 나는 흐릿한 무지를 택한다. 가까운 이의 경험담을 듣는 것으로 만족한다. 달과 아기의 선생님. 공교롭게 둘 다 대학병원에서 사랑니를 뽑았다. 대학병원이라, 괜히 물어본 것 같다. 두려움을 발에 매달고 예약 시간에 맞춰 병원에 찾았다. 접수를 마치고 나니 대기 의자에 앉으라 한다. 벽 따라 늘어선 대기 의자엔 이미 다른 이들이 가득하다. 마스크 위로 자못 불안한 눈동자들이 떠 있다. 간신히 빈자리를 찾아 엉덩이를 붙인다. 눈앞엔 지극히 아름다운 겨울의 산과 해를 받아 빛나는 대학 캠퍼스가 보인다. 그리고 무려 9개의 진료 의자가 일렬로 놓여있다. 그 위엔 각각 9명의 환자가 앉아있는 모습이다. 마취 전문 선생님이 9개의 벌린 입에 주사를 놓으러 돌아다니고, 그 뒤를 따라 치과 선생님이 차례로 자리를 옮긴다. 뽑고 이동하고 뽑고 이동하고 뽑고 이동한다. 찰리 채플린이 울고 갈 풍경이다. 요란한 드릴 소리, 간혹 들리는 '아! 아아!' 하는 외침, '움직이지 마세요. 어어? 움직이면 안 돼.' 하는 다그침까지. 울고 싶은 건 찰리 채플린뿐 아니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발치 이후 과정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들은 다음 손가락 가리키는 곳에 사인을 했다. 곁눈질로 초록 천 위에 놓인 커다란 주사를 보았다. 입 안을 헤집을 도구들도 보았다. 의자가 뒤로 눕고 내 몸도 따라 누웠다. 노랗게 켜진 등 아래 입을 벌렸다. 두 손을 마주 잡고 계속 생각했다. '애도 낳았는데, 그래. 애도 낳아봤으니 이 정도야 괜찮아.' 마취 주사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혹시 마취가 잘 들지 않을까봐 더 무서웠다. '자, 시작합니다.'는 소리와 함께 드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드릴 대신 그라인더였을까? 볼 안 쪽의 살이 곱게 갈리는 게 느껴졌다. 마취 덕분인지 아프지는 않았는데, 당연히 상쾌하고 개운한 기분은 아니었다. 볼에 구멍이 나진 않겠지? 혀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 뭔가가 우지끈 거리는 느낌도 났다. '움직이지 마세요. 이제 조금 남았어.' 그 상황에서도 존대와 반말을 섞어 쓰는 이상한 화법이 귀에 들어왔다. 다시 한번 쓸데없이 영민한 귀를 생각하며 두 손을 부여잡았다. 또다시 그라인더 소리가 났고, 나는 총에 맞은 들짐승처럼 낮은 신음을 뱉었다. '이제 다 뽑았고 꿰매는 것만 남았어요.' 일단 뽑았다니 다행이다. 꿰매는 것쯤이야. 이렇게 대범한 나, 이렇게나 늠름한 나다. 빠르게 이어지는 후처치에 정신 못 차리는 와중에도 초록 천 위에 놓인 사랑니 사진도 찍었다. 무려 4조각으로 나눠진 사랑니였다. 조그맣게 자란 부분만 생각했는데 잇몸 안에 그것의 3배 되는 크기의 뿌리가 숨어있었다. 참으로 잠재력이 강한 친구였다.


얼얼한 볼과 더 얼얼한 정신으로 의자에서 내려왔다. 마스크를 쓰고 짐을 챙겨 나오는데 의자에서 대기하고 있는 불안한 영혼들이 보인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은 이렇게나 다르다. 수납을 마치고 약을 탄 다음 집으로 향한다. 아기는 볼에 아이스 패치를 붙인 나를 이상하게 여긴다. 웃으면서 내 볼을 가리키기에 '엄마 아야 해서 이거 붙인 거야. 아야 하고 왔어.' 라고 말하자,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린다. '응, 괜찮아. 엄마 사랑해요 해 주면 돼. 안아주세요.' 하니 안겨서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린다. 그러더니 제 귀 근처를 가리키며 '볼!' 한다.


재택근무를 마친 달에게 아기를 넘겨주고 저녁으로 먹을 죽을 만든다. 불린 쌀을 믹서에 갈고 참기름에 볶은 다음 멸치 육수를 넣어 오래 끓인다. 미미한 영양을 더하기 위해 계란 하나도 푼다. 발치하지 않은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조심스레 죽을 삼킨다. 이렇게 허술하게 만들었음에도 향도 맛도 기막히게 좋다. 열 시 방향으로 머리를 기울인 채로 계속 떠 넣는다. 이 정도면 약 먹기에도 괜찮겠지. 오늘 밤 믿을 친구는 오직 하나, 소염진통제다. 그럼에도 자는 중간 몇 번 몸을 뒤척였다. 편도가 부었을 때처럼 침을 삼키기 어렵다. 아이스 패치의 위치를 몇 번 고치고 뻐근한 느낌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쓴다. 아픈 건 다 끝났어. 이제 회복만 남은 거잖아? 그러니 불편해도 무서운 게 아냐. 나는 스스로를 달랜다. 조용히 달랠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흘러 붓기가 가라앉고 잇몸의 빈 공간에 살이 잘 차오르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내 손을 떠난 일들은 내 의지 아닌 다른 힘들로 작용하곤 하니까. 하며 나는 내 손을 떠난 원고를 생각했다. 마지막 수정을 마치고 보낸 파일을 다시금 불러내 보았다. 한글 뷰어가 친절히 일러주길 공백 포함 157,722자. 39,771개의 낱말. 3,651줄. 996개의 문단. 200자 원고지 816장의 원고라 했다. 도합 816장, 선풍기를 틀고 흩날려도 제법 흐드러지게 날릴 나의 과거다. 너 최선을 다 했어? 물어보면 자신있게 응! 이라고 답할 수 있다. 쓰는 내내 웃고 울며 열심을 다 했고 그래서 보람차게 보낸 시간이다. 한 해를 녹여 쓴 원고의 교정교열과 편집을 마치고 최종 표지를 기다리는 지금, 담담히 행복하다. 사랑니 뽑은 자리에 설렘이 차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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