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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진 Nov 25. 2020

데이터의 갬성

2020년 11월 25일

'데이터'와 '감성'

정말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팀에 그동안 쓰지 않았던 월간 리포트를 쓰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팀원들은 내가 준 초안에 맞춰서 열심히 데이터를 기입해보고 있다. 대행사 생활을 하면서 이 골이 나게 쓴 것이 리포트였다. 데일리 리포트, 먼슬리 리포트, 중간 리포트, 결과 리포트, 결과 리포트 퀵 보고 문서 등등등. 


대행사에 있을 때 쓴 리포트의 대부분은 클라이언트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서 작성된 리포트들이다. 지금은 브랜드 마케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보고를 위한 리포트는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불필요한 페이퍼웍에 업무 시간을 쓴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문서 만들 시간에 일을 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고, 나도 월간 리포트를 시키면서 엄한 곳에 시간 쓰게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영 애매했다.


그래도 월간 리포트를 써야겠다고 결정했다. 나는 불필요한 보고서는 필요 없지만, 최소한의 리포트 작성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리포트를 쓴다는 것은, 내 생각을 글로 옮긴다는 것이다. 데이터를 보고, 생각하고, 분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글로 정리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 생각도 한번 더 정리하게 된다. 


나는 이 부분이 꽤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리포트에 정리하는 글은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타당해야 하고,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막연해서는 안 된다. 막연하지 않으려다 보니 조금 더 논리적일 수 있어지고,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감정적이지 않게, 논리적으로 마주 할 수도 있어진다.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 때 '이건 틀린 생각일 수도 있어!'라고 생각하면 바로 틀린 이유를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월간 리포트가 정돈될 때까지, 팀원들이 월간 리포트를 쓰는 것에 익숙해질 때까지, 이 문서를 보고 용도로 사용할 생각은 없다. 다만 월간 리포트를 쓰는 과정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월간 리포트를 쓰며 데이터를 찬찬히 뜯어보는 중이었다. 이때 팀원들 중 한 명이 데이터를 어떤 방식으로 분석해야 할지 물어보았다. 10월 한 달 간의 일별 전환 수치를 보며 10월 한 달 동안 이 날은 잘했고, 이 날은 못했다를 판별하는 것이 조금 애매하고, 별 인사이트가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순간, 당황했다. '그런가? 이걸 분기 별로 써서 월별로 비교를 하는 것이 더 나으려나?' '주 별로 데이터화해서 보는 것이 더 나으려나?'라는 생각을 하다가. 막대그래프 30개를 놓고 비교해봐도 아무것도 안 나오는데, 막대 그래프 4개나 12개 놓고 본다고 해서 별게 나오지는 않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피드백을 수렴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설명을 잘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내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조금 이상했는데, 퍼포먼스 마케팅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 우리가 과거를 되돌아보는 이유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잖아요. 그냥 과거에 잘했던 것을 추억팔이하고, 잘못했던 것을 후회/자책만 하면 좀 그렇잖아요. 괜히 불필요 한 곳에 에너지랑 시간 쓰는 것 같고.. 데이터도 똑같다고 생각해요. 그냥 그래프를 보고 잘했네, 못 했네만 보기보다는 '내가 이때 어떻게 변화를 줬지? 어떤 액션을 했지? 그 반응이 이렇게 나온 건가? 지난번에 했던 방법이 좋으니까 유지해야겠다 혹은 다시는 그 방법을 쓰지 말아야겠다.'라고 인사이트를 수집하는 것이 생산적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일기 같은 것을 쓰는 거고요. 하루를 돌아보며 더 나은 삶을 살아가려고. "


쓰다 보니 다시 리마인드 되는 것 같다. 이게 뭔 거지 같은 소리인가. 일기는 안 쓰면 선생님이 손바닥 때리니까 쓰는 거고, 무슨 더 나은 삶을 살아가려고 일기를 쓰냐. 데이터 이야기를 하는데 과거 회상과 일기라니.. 하.. 뇌절해버렸다.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하고 되뇌어 본다.


우리는 그동안 살아왔던 데이터를 토대로 친구들을 만나고, 분석을 통해 인사이트를 얻어 좋아하는 사람에게 환심을 사기도 한다. 사소하게는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맛없는 음식/나와 맞지 않는 음식을 다시 시키지 않는다. 이렇게 데이터 분석은 우리의 삶 속에 녹아져 있다. 


뭐, 정당화해봐도 소용없다. 쓸 때 느낀 건데 정말 혼자 주저리주저리 길게 말했구나 싶다. 

휴우.


여하튼, 나는 대행사에 다녔다 보니 데이터를 볼 때 분석을 하기보다 단순히 잘했다, 못했다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항상 잘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데이터를 만들어왔고, 클라이언트도 상부에 보고해야 하니, 우리가 잘했다는 형태로 써달라고 요청한 적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이건 분석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브랜드에 오게 되면 진짜 성장을 위한 데이터 수집과 분석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월간 리포트는 회사에 맞춰 적절한 양식으로 정리되고, 리포트를 작성하는 사람들이 온전히 숙련, 이해하기 전까지 보고 하는 용도로 사용할 생각은 없다. 리포트가 보고의 수단이 되어버리면 본질이 흐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이 다 써지고 나면, 이것도 나에게는 지나간 데이터가 된다. 그리고 이 데이터는 나에게 정말 큰 인사이트를 줄 것 같다. 저렇게 말하면 절대 안 된다고 말이다.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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