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류진 장편소설
얘들 그냥 행복하게 해 주세요! 네?
소설을 읽는 내내 오십 번은 마음속으로 외쳤을 것이다.
비트코인에 눈이 뒤집혀 묻지마 투자를 한 것이 아니라서, 직장이 다니기 싫어서 무작정 탈출구를 쫓은 한심한 사람들이 아니라서, 그들이 허망하게 전 재산을 다 잃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 힘든 삶을 꾸역꾸역 사는 결말이 아니라서, 작가님 감사합니다. 흐뭇한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엄청난 기승전결을 가진 스토리가 아님에도 가슴을 졸이며 주인공들의 해피엔딩을 간절히 바라는 건 이 이야기가 내 옆자리의 김대리, 이 대리, 박 과장의 이야기 같아서일 것이다.
장류진 작가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디테일이 살아있다. 심리묘사가 마음에 든다. 직장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만한 하찮고 사소한 에피소드가 딱 뭔지 알겠기에 꿀맛같이 읽힌다.
이더리움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블록체인에 투자한 젊은 여성 직원들의 이야기이다.
강은상, 김지송, 정다해 셋은 '마론 제과'에 다니는 회사 내 절친들이다. 이들이 절친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흔치 않은 비공채 3인방이라서.
그래서 약간은 아웃사이더인 이들의 채팅방 이름도 B03이다.
'비 공채 출신 3인'
작중 화자인 다해가 은상 언니라고 부르는 강은상은 가장 연장자로 이재에 밝고 돈을 좋아한다.
어느 날 이더리움에 투자하여 벌써 이득을 보고 있는 은상 언니의 추천을 받고, 다해는 전 재산을 털어 투자에 동참한다. 처음엔 부정적이었던 가장 어린 지송이도 몇 번의 다툼 끝에 뒤늦게 가담하여 셋은 '달까지 가는' 꿈을 꾸며 매일 채팅창에서 '가즈아'를 외친다.
이들은 완벽한 흙수저이다. 잡화상을 하는 부모를 가진 은상, 시골 마을버스를 운영하는 엄마의 딸 다해, 회사 내에 몇 안 되는 계약직 형태의 고용에 잡혀있는 지송. 모두 열 평이 되지 않는 원룸에 살고 있었고, 늘 그날이 그날인 채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 보일 듯 말 듯 한 삶이었다. 코트에 커피를 쏟아도 드라이클리닝 값이 아까워 지르잡기로 얼룩을 지울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런 이들이 탈출을 꿈꾸며 투자한 가상화폐가 'J' 곡선을 이루며 급상승할 때 아직 주머니에 들어오지도 않은 돈 때문에 세상이 즐겁고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1ETH이 63만 원을 돌파했다. 우리는 매일 점심시간마다 커피 빈의 4호 칸에 모였다. 그날의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우선 음료 한 잔과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씩을 주문했다. 케이크는 어쩌다 기분 좋을 때 한 번씩 먹는 특식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매일 사 먹을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얼마나 여유로워졌냐면 초콜릿 무스케이크와 뉴욕치즈케이크가 둘 다 당겨서 고민되는 날에는 두 개다 시킬 정도였다.
<265 페이지>
케이크를 매일 사 먹고 심지어 두 개를 사 먹을 때도 있다는 설명으로 얼마나 마음이 여유로워진 것인지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고, 강은상이 운 만 믿고 투자한 것이 아니라 매일 분석하고 번역기를 돌려 레터를 읽으며 노력했는지 느껴지기 때문에, 또 답 없는 청춘들에게 우연히 열린 또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포털 같은 기회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혹시 망할까 봐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어차피 소설인데 원하는 것을 가져보고 싶은 이들의 꿈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조바심이 났다. 결국 끝이 궁금해서 못 참고 마지막 장을 넘겨 결말을 보고 나서야 다시 읽던 곳으로 돌아와 편안히 마저 읽을 수 있었다.
내 떡두꺼비 같은 3억 2천이 그걸 막아줬다.
(중략)
일단은, 계속 다니자.
<마지막 페이지>
다 읽고 나서 다시 표지를 보니 현란한 그림 안에 책 속의 내용들이 깨알같이 들어 있었다.
서울의 빽빽한 건물들 위로 해처럼 눈부신 달, 그 달이 보이는 사무실 창문 앞에 잡다한 물건들이 놓인 책상. 책상 위 모니터에 띄워진 우상향하고 있는 그래프와 그래프 창 뒤에 반쯤 감춰진 제주도 사진들,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난 것은 2017년임을 알려주는 탁상달력, 커피빈 빨대컵과 마론 제과 과자들, 행운을 잡길 원하며 걸어놓은 것 같은 드림캐처, 그리고 책 등에 그려진 달까지 가는 자동차.
결국 '돈도 돈 좋아하는 사람한테 간다'라는 은상의 명언과 함께 이들의 즐거운 투자 이야기는 끝이 난다. 가장 안쓰러운 캐릭터였던 지송이도 어느 정도 돈을 벌어 대만 남자 친구와 흑당 밀크티를 국내 최초로 들여와 보겠다는 계획을 비췄으니 지송이도 성공할 것이라고 믿고 싶다. 지금이야 차고 넘치지만 국내 최초로 들여온 게 지송이었다면 돈 많이 벌지 않았을까.
내 주변에는 강은상은 없고, 뒤늦게 뛰어드는 스낵팀 팀장 갖은 사람들뿐이라서 이런 성공 스토리는 건너 건너 사람의 사례로밖에는 들은 적이 없다.
강은상이 비트코인으로 돈을 벌어 회사를 나간다는 소문을 들은 직원들이 회식 때 모여 질투와 부러움에 은근히 은상을 욕하는 장면도 왠지 모를 통쾌함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내 동료가 비트코인으로 33억을 벌어 회사를 나간다면 조금은 배가 아플 것 같기도 하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이더리움의 날짜별 시세는 당시의 시세를 반영한 것으로 작가는 글을 쓸 때 이더리움 창을 띄워놓고 썼다고 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퇴사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 우리가 모두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엑싯'의 시기, 다 팔고 나와야 할 시기를 알려주는 장면을 기억해야 한다.
세 사람이 떡상까지 맛보고 이제 언제 나와야 하나 고민하던 시점에서 진상에 못난 놈의 대표주자인 다해의 팀장은 혹시 비트코인 할 줄 아는지 다해에게 물어본다. 그리고 다해는 팀장의 핸드폰에 비트코인 앱을 깔아준다. 그때 느낀다. 이제 나와야 할 때라는 것을.
주식이 한참 미쳐있던 작년에 그런 말들이 있었다. 도통 관심 없던 옆집 언니가 나도 주식해야 할까 봐라고 말하면 나올 때라고. 역시 이런 풍문은 진리인가 보다.
불로소득을 바라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인 인생의 바른 지침이겠지만 그래도 원하는 것이, 행복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싶은 보통 사람들의 희망사항을 유쾌하게 풀어놓은 이야기를 읽으며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