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읽은 작품으로 보나, 그의 성장 스토리로 보나 나이가 그정도 되었을 것이 분명한데 아빠와 동갑이라는 사실에 왜 그렇게 놀랐는지 모르겠다.
아빠와 동갑인 사람이 재즈를 들으며 사물을 그렇게 독특한 각도로 보고, 위트있는 문구를 구사하는 것을 상상해 보니 신기했던걸까. 음, 우리 아빠도 그렇게 지루한 사람은 아닌데 갑자기 미안해지니 아빠 얘기는 그만 두기로 한다.
아무튼 오랜만에 하루키의 책을 즐겁게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의 줄거리가 무엇이냐, 어떤 내용이냐고 누가 간단히 말해달라고 하면 못하겠다. 간단히 요약할 수 있는 문장력도 없을뿐더러 내가 이 소설들을 분석할 만한 역량도 없다. 그냥 읽었고, 재미있었다.
그의 장편소설들처럼 가슴을 콩닥이며 읽게 하는 스토리도 아니고 어떤 반전이 있는 드라마도 아니다. 그냥 그의 생각 속에 들어가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지만 한참을 몽롱한 상태로 헤엄치다 나온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나에게는 하루키의 책은 그러하다.
가끔 하루키를 잘 안다는 사람들이 모여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논하는 자리에 끼게되면 한마디도 거들지 못하겠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냥 책이 재미있고, 읽으면서 느껴지는 아늑함이 좋다. 그 상상력이 감탄스럽고 뭔가 염세적인듯 하지만 열정이 없는 것은 아닌, 나름대로 긍정적인 결말이 좋고, 기발한데 담담하고 어이없기도 한 유머에 소리 내어 웃을 때도 있다.
아주 오래전에 처음 하루키의 소설을 읽은 것은 '빵가게 재 습격'이었다.
하도 하루키가 유명하다고 해서 읽어보자 싶어 읽었는데 대체 이 이야기는 어디로 흘러가는 건지 헛웃음이 나왔지만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다 읽고 나서 허탈한 마음에 '뭐야~'하면서도 빵가게 1차 습격한 걸 찾아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날 친구들과 놀다가 하루키 얘기가 나와서 내가 읽은 '빵가게 재습격' 줄거리를 간추려 말해주었다. 그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얘기를 간추리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어처구니가 없는지... 말하면서 나도 웃었고, 읽어보지 않은 애들은 그게 뭐냐고 되물었다.
그때 하루키의 팬이었던 친구가 한심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걸 그렇게 설명하면......"
그때 약간의 부끄러움이 느껴졌던 것도 같다. 내가 모르는 심오한 세계를 표면적 줄거리만 줄줄 읊어 무식함을 내보였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그 많은 하루키 소설을 읽으며 20년을 보낸 지금도 별반 달라진 바는 없다. 아직도 '빵가게 재습격'의 깊은 뜻은 모르겠다. 조금 더 이해해 보고 싶어서 평론가들의 글을 읽어보면 그런대로 그런 내용이었구나 고개를 끄덕이지만 가슴 깊이 콕 박힌다거나 완벽히 그림이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냥 늘 하루키의 책은 그랬다. 어떤 빵 터지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데도 허무하지 않고, 읽는 중에 박진감이 넘쳐 손을 꽉 쥐었다가 막판에 흐느적 풀어져버려도 화가 나지 않는다. 한줄한줄 핥듯이 읽고 싶어 지는 글이라고 할까. 그냥 재미있다.
처음 '빵가게 재습격'을 읽었을때, '이건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책을 놓지 못하고 단숨에 읽어버리게 하는 흡입력. 지금까지도 그렇다.
일인칭 단수도 그랬다.
이야기 하나하나를 기승전결에 맞추어 말할 수는 없다. 그냥 그의 세계를 탐닉하는 만족감이 있다.
그중 가장 좋았던 것은 '야쿠르트 스와로스 시집'이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고 절대로 배신하지 않았던, 무던히도 지던 야구팀을 충실히 지켜보면서 보낸 세월에 대한 이야기가 뭐가 그리 재미있겠냐마는, 이상하리만치 재미있다. 그렇게 많은 패배를 보여주던 팀의 우승과 소설가로서 자신의 데뷔가 맞물릴 때 인연을 느꼈다는 말에 은근한 감동까지.
당시에 그가 썼다는 '우익수'라는 시는 두어 번 반복해서 읽으며 깔깔 웃었다.
뭐, 그런 거다.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만족감은 순식간에 그의 세계로 빠져드는 소속감 같은 것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소설 중 가장 이상한 이야기 중 하나라고 꼽을 수 있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며칠에 걸쳐 읽었는데 읽는 내내 마음이 편했고 묘한 충만감을 느꼈었다. 그 괴이하면서도 어두컴컴한 이야기가 왜 편안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신기한 세계에서 주인공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들이 멀찍이 떨어진 꿈 이야기 같았고, 마지막의 '딸깍' 하는 순간은 궁극의 평화 같았다. 나의 마지막 순간이 그렇게 끝난다면 평온하게 맞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마치 내시경 마취제가 들어가는 순간처럼.
오랜만에 하루키 단편집을 읽으면서 지난 하루키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생각해보니 내가 하루키의 소설을 처음 읽던 시절에 하루키는 지금의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아저씨였다. 강물같이 흐르는 세월을 따라 먼저 흘러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예전의 나로부터 지금의 나까지 모두가 이토록 오랫동안 즐길 수 있음이 새삼스럽게 고맙고 설레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