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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Oct 23. 2021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_아름다운 것에게 압도당하다.

마쓰이에 마사시 _ 김춘미 옮김

무라이 슌스케가 실존 인물은 아니다.

그가 살았던 1900년대 중반의 건축에 대한 이야기, 여름 별장이 있는 기타아사마 아오쿠리 마을의 생생한 묘사 때문에 정말 있었던 일인 듯 실감이 난다. 덕분에 읽는 내내 여러가지 사건들을 찾아보기도 하고 실제 소설 속에 인용된 건축물들의 사진을 찾아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었다.


잔잔하지만 웅장한 묘사, 숲과 건축물에 대한 아름다운 설명만으로도 충분해서 긴박한 이야기 전개 같은 건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대치 않은 국립현대도서관 경합이라던가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까지 더해진 소설의 밀도에 가슴이 벅찼다.


주인공 '사카니시 도오루'가 '무라이 슌스케' 선생님의 설계사무소에 들어간 것은 1982년 봄이고, 선생님은 70대 중반이었다.  보낸 시간은 채 일 년이 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대한 기록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선생님의 건축 인생과 평생의 경험이 녹아있어 화자는 사카니시군 이지만 사실은 무라이 슌스케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원제는 <화산 자락에서> 였다고 한다. 미안하지만 그런 제목으로 출판되었다면 사지 않았을 것 같다.

'miryo미료의 독서노트'라는 유튜버의 영상을 보다가 이 책이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책으로 읽는 듯한 느낌이다.'라는 말을 듣고 제목에 매혹되어 읽게 되었다. 


책의 뒤 표지 문구에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이울어가는 것들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진혼'

물 흐르듯 흘러가는 세월의 한자락을 조용히 얘기하는 듯했지만 모든 순간은 결국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울어진다는 생각에 마음이 찡했다.


우리는 건축물 안에 살고 있고 생활의 모든 부분은 건축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작가는 건축가가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건축에 흥미를 가지고 있어 자신에게 축적되어 있던 것을 꺼내놓은 것이라고 했다는 인터뷰 내용이 있다. 그런 생각들이 책의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손이 닿는 부분은 현관 손잡이 빼고는 나무가 좋아."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현관문은 안과 밖의 경계선이니까 금속을 쥐는 긴장감이 있는 편이 좋지. 밖에 있는 문손잡이가 나무로 되어 있으면 실내가 밖으로 삐져나온 것 같아서 뭔가 쑥스러워."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p145


아, 분명하게 이해했다. 현관 손잡이가 나무로 되어있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다. 어떤 기능성에 대한 설명 없이도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이야기하는 선생님의 얼굴을 쭉 보고 있었다. 조몬시대의 움막집이나 매장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현관문을 안쪽으로 열 것인가 바깥쪽으로 열 것인가를 생각하고, 개방형 부엌과 거실의 경계를 어떻게 나눌까 생각하고, 부모 침실과 아이 침실을 어떻게 배치할까 생각하는 것과 같다.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나 하는 이치가 선생님 건축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건축은 예술이 아니다, 현실 그 자체다"라고 선생님이 말씀하는 것은 그런 얘기인지도 모른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p337


건축에 대한 마음가짐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Taliesin (studio) _ Wikipedia

선생님이 사사했다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실존 인물이다. 

무라이 슌스케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만든 일종의 건축학교인  탈리에신에서 배웠다는 설정이다. 라이트와 탈리에신의 건축물을 찾아보았고, 탈리에신에 얽힌 비극적인 스토리도 알게 되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8121170019368

2차대전 이전 미국으로 와 라이트의 제자가 된 선생님은 전쟁 때문에 일본으로 귀국한 것으로 나온다.

당시 일본의 진주만 습격 이후 미국 내 일본인에 대한 압박이 시작되었고, 미국 주권을 가진 일본계 미국인까지 재산을 몰수하고 강제 수용소에 가두는 시기였으니, 선생님이 머물 수 없었음이 설명되었다. 동시에 세상과 동떨어져 예술과 건축에만 몰입한 것으로 라이트나 선생님의 정치적 입장은 없었음을 넌지시 짚어준다.


한편으로 화산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한 부분들도 인상적이었다.

내게 화산은 두려움의 존재이다. 아주 어렸을때 어린이 만화잡지 소년중앙의 별책부록쯤 되는 자료에서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기사를 사진과 함께 보았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다. 화산의 분출물 아래에 한순간 도시가 그대로 굳어져 버렸고, 오랜 시간이 지나 그 아래에서 찾아낸 인간들은 죽기 직전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 소설에서 화산은 경외로운 대 자연이다.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나 화산이 폭발하는 것을 재앙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그것이 해야하는 당연한 일 정도로 여긴다. 무구한 시간 속에서 화산은 자연의 순리대로 때때로 분화하고 인간의 생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려는걸까.



소설의 배경인 아사마산, 실제로 1982년, 1983년에 분화 기록이 있다.


더불어 다양한 설계 물품들을 찾아보는 소소한 재미도 맛보았다.

사무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당시의 설계용품은 지금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판매되고 있다. 연필을 깎고 긋는 사각사각 소리가 가득한 사무실에 가본 적도 없으면서 향수를 느꼈다.




입사하자마자 선생님이 주셨다는 연필깎이 용 '오피넬 폴딩 나이프'와  짧아진 연필을 끼워 썼다는 '리라홀더'


실측 노트는 이 년이 채 못 되어 열일곱 권이나 되었다. 모은 데이터는 오십 건이 넘는다. 이런 일을 혼자 하고 있으면 앞으로 어떻게 될 건지 이따금 불안해지기도 했지만, 누가 부탁한 것이 아니라서 계속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72페이지
*독후감_작중 화자가 건축학과 학생 시절 견학하며 스스로 공부하던 일을 회상하는 장면. 과제도, 돈벌이도 아닌 일을 홀로 해내는 과정이 담담하고 아름다웠다.

 

의자가 있는 계단의 수평면과 경사각이 만든 단차에 오차가 없다면, 즉  정확하게 일을 했다면 부분부분은 똑같은 규격이면 된다. 단 나중에 끼워 넣었다는 걸 알 수 없을 만큼 꼼꼼하게 마감되어 있는 것을 봐도, 시공업자가 단순한 작업으로 생각하고 한 일은 아니었다. 공사하는 사람들은 무라이 슌스케의 이러한 디테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손을 움직였을까. 그들의 생각은 끝내 알려지지 않는다 해도, 한 일은 이렇게 남는다. 선생님의 설계는 시공자의 긍지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74페이지
*독후감_선생님이 설계한 야스카야마 교회를 견학하면서 화자가 느낀 경이로움을 묘사한 부분이다. 소설 전체에서 뭉클한 울림을 받았던 장면 중 하나였다.


독서중에 내게만 있었던 에피소드가 있다.

주인공이 연애를 하며 스콘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클로티드 크림을 듬뿍 떠서 스콘에 발라 먹는 부분이 어찌나 맛있게 느껴졌던지 나도 모처럼 클로티드 크림과 스콘을 사먹었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며 찾아본 자료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스톡홀름 시립도서관'이었다.

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사진을 찾아보다가 상상이상의 아름다운 모습에 잠시 숨이 멎었다. 최근 국내에도 엄청난 양의 책을 소장한 건물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시립도서관이 이정도 수준이라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언젠가는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언젠가는 우리도 이런 도서관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http://www.weeklyseoul.net/news/articleView.html?idxno=36453




책을 여름 내내 읽어서인지 다 읽고 나니 나의 지난여름을 회상하는 것처럼 추억이 밀려왔다. 왠지 밤에만 읽고 싶어서 잠들기 전 조금씩 오래오래 읽었는데 벌써 가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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