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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Oct 09. 2021

어리석은 여행자

마지막 씬은 후련하도록.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울렸고, 전화를 받았다.

그쪽에서 말했다.

"죄송해요. 실수로 당신을 죽였어요. 실수였어요."

"무슨 말씀이시죠?"

"미안해요. 슬쩍 건드렸는데 죽은 것 같아요."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고 가슴이 답답했다. 숨이 쉬어지기는 하지만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다른 장소에서 죽었고, 그 죽음이 나에게도 전달되는 중이었다.

그러나 최대한 숨을 크게 쉬며 기다려봐도 생명이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그쪽으로 전화를 걸어 물었다.

혹시 다른 사람이 죽은 것 아닐까요? 착각일 수 있잖아요?


꿈속에서도 뭔가 오류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에서 깼다.


악몽도 아니었고, 무서워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꿈도 아니었다.

오히려 편안하고 아늑했다.

그 마음은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현재 활성화가 중단되는 것을 기다리며 맥주를 마시는 장면을 볼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조금 두렵지만 내 의식이 멈춰지는 순간이 은근히 기다려지는, 마치 내시경 마취약을 맞기 직전의 기분 같았다.


나는 가끔, 아니 자주 죽음의 순간이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란다. 사실은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라는 긍정적인 자세도 아니고 고통스러울까 봐 무서워하는 공포증에 가깝다. 이런 생각이 드는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고 특별한 대상에 대한 불안감도 없다. 영화에서라던가 뉴스에서 공포스러운 죽음의 장면을 간접 경험하고 나면 꽤 오랫동안 그 고통을 상상하며 힘들어하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조금 정신이 이상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종류의 생각에 뒤덮이기 시작하면 제정신을 차리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마도 어젯밤에 꾼 저 희한한 꿈도 죽음의 순간에 대해 깊이 생각해 온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꿈일 것이다.

해가 뜨지 않은 어둑한 방에서 조용히 눈을 뜨고 방금 전까지 흥미진진하게 꾸었던 저 꿈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저 정도면 무섭지도 않고 고통스럽지도 않은 바람직한 마지막 순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모처럼만에 참 긍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발생할 가능성이 희박한데도 끔찍한 순간들을 애써 머릿속으로 재생하며 두려움에 떠는 등장인물을 드라마에서 봤다고 생각해보자. 그 즉시 그 캐릭터를 정신병이 있는 사람이라고 규정지을 것이다.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고,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볼 때 나의 미래가 평범의 범주를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벗어날 가능성은 극히 적다. 불운과 고통을 예행연습까지 해가면서 체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이렇게 걱정되는 순간들을 자주 열심히 떠올려대다가는 자칫 온 우주가 오해할 판이다. 내가 그 모든 안 좋은 것들을 간절히 원한다고 말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은 후련하기를 바란다. 언제가 되더라도 아쉬운 것들은 있을 것이다. 여행을 마치며 아름다운 풍경을 여행지에 두고 오는 것처럼, 삶과 이별할 때 아쉬운 것들과 담백하게 헤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현재의 내 머릿속은 나만이 연출할 수 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현재를 훼손하는 짓은 이제 그만하자.

평온하고 후련한 마지막을 맞고 싶다는 가벼운 바람만 갖고 살자. 혹시나 하는 일들은 벌어졌을때 생각하고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겨야 한다. 

3박 4일 여행에 가서 마지막 4일째가 힘들까봐 첫날부터 걱정만 하며 시간을 보내는 어리석은 여행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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