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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Mar 02. 2022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1)_ 페미니즘 고전

결혼과 이혼, 정조에 대하여...

쓰인 단어와 말투만 옛날 것이지 생각은 웬만한 현대 여성보다 훨씬 진보적이다.

사람이 어떤 시대에 속하여 살다 보면 그 시대가 주는 규정에 자기도 모르게 익숙해져 버릴 텐데, 저 시대에 살면서도 시대와 문화가 주는 불공평함을 깨닫고 그것을 깨기 위해 애를 쓰고, 더구나 세상 사람들의 질책을 받으면서도 자기를 잃지 않고 살았던 것을 보면 타고난 인재이다.

해외 여러 나라 문물을 보고 온 영향도 있으나, 일본 유학을 한 여성이 없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그중에서도 난 사람이긴 할 것이다.


‘독신자의 정조론’ 편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이성을 그리워하는 애타는 마음 때문에 결혼을 하는 것은 구속된 생활에 빠지는 것이다. 그보다는 자신을 찾기 위해 번민하면서 구속된 생활을 미룰 필요가 있다. 그를 위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제도가 유곽이다. 성욕 한 가지로 인하여 일찍이 자기 몸을 구속할 필요가 없으며 그런 이유로 여자 공창뿐 아니라 남자 공창도 필요한 것이다.

[나혜석, 글쓰는 여자의 탄생_ 독신자의 정조론 中 일부 요약]

이 글은 당시의 어르신들 뿐 아니라 지금 세상에서 평범의 범주에 속하는 웬만한 사람들까지도 혀를 차며 욕을 해댈만한 의견이다. 당시에 이런 생각을 한 것만 해도 특출하며, 그것을 공개적인 글로 지어 올리는 것도 대단하다.


그가 문란하게 생활했거나,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가정을 내 몰라라 한 것은 아니다. 글 중에 가정일을 소홀히 하며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문구도 나온다. 세상 사람들의 비난에 대항하여 자신의 생활에 부끄러움이 없음을 외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유럽에서 최린을 만나 얼마나 깊이 사랑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가정을 깨고 싶지 않았고, 그런 사랑이 남편을 비롯한 사회 전반에게 이해될 수 없었으니 그의 결혼은 지속될 수가 없었다.

만일 이런 생각을 가진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드라마로 나오고 있다면 그 내용을 보면서 목청 높여 욕을 해대는 우리 엄마와 이모들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남편이 아닌 남자를 사랑한 것이 자랑할 일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사랑한 것이니 남편의 질투를 살 만하고 비난받을만한 이유가 된다. 그것을 참아낼 수 없어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했다면 김우영의 결정은 존중받을만하다.


하지만 혼 과정에서 보여준 김우영의 태도는 어떠한가. 남의 말에 휩쓸려 아내를 판단하고, 결혼한 성인이 부모 형제 일가친척을 뒷배 삼아 아내를 공격하고, 결국 가장 현실적인 돈 문제에서도 불합리한 월권을 행사한 부분은 이 사람의 못난 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혼 고백장이 나혜석의 입장에서 쓴 글이었으니 김우영도 억울함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감정적인 부분은 제외하고라도,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음에도, 빠듯한 살림 안으로 일가친척들이 몰려와 생활을 어렵게 한 일, 친지 자식들 학비를 책임지게 한 일, 아내의 외도 때문에 이혼하려는 의지를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면서 정작 자신은 기생들과 생활한 일, 서류처리를 하자마자 새로 아내를 들인 일들은 거짓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서양에나 동경 사람쯤 하더라도 내가 정조 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이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의 정조를 유인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 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종종 방종한 여성이 있다면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 말살시키고 저작[입에 넣고 씹는] 일이 불소하외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_ p200]


이혼 과정에서 겪은 일들로 터져버릴 것 같은 분통의 일부를 한 단락으로 표현한 이 글은 거의 백 년이 흐른 지금 보아도 아주 옛날 얘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현대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부조리를 날카롭게 짚어낸 통찰력 있는 문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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