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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Jan 13. 2021

다시 소설을 읽는 2021년

그 충만한 쾌락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

2020년 다이어리를 정리하며 올해 읽은 책 목록을 훑어보았다. 생각보다 많이 읽지 못한 것도 아쉬웠지만, 내가 좋아하는 책이 많지 않다는 점이 더 아쉬웠다.
나는 소설을 좋아한다.

아빠는 트레일러 운전기사였다. 트레일러 기사들은 출장이 잦았으나, 여관 방값이 만만치 않았던 탓에 차에서 숙박을 해결해야 했다. 가끔 아빠 차를 타보면 운전석 뒤에 마련된 좁은 잠자리에 둘둘 말린 담요와 함께 책이 가득 쌓여 있었던 기억이 난다. 빠듯한 월급이었겠지만 책을 좋아하시는 아빠는 자주 우리에게도 책을 사다 주곤 하셨다. 퇴근하시는 아빠 손에 월간 만화 보물섬이나, 어린이용 단행본들이 비닐봉지에 싸여 들려 있을 때 나는 환호하며 받아 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새 책을 읽곤 했다. 그래도 항상 책에 목이 말랐고, 동네 친구 집 책장 가득한 세계명작과 셜록홈스 시리즈가 부러워 그 집에 갈 때마다 누가 뭐라 하지도 않는데 쫓기는 마음으로 그 책들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에 동네에 책 대여점이 문을 열었다. 지금처럼 도서관 시스템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절에 글방은 큰 혁신이었다. 하굣길 집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아늑히 자리 잡은 '열린 글방'에 나는 거의 매일 들렀고, 자주 천 원씩 내고 소설책을 빌려다 보았다.
중학교 때에는 연애소설에 빠져 있었다. '노은' 작가의 책을 좋아했는데, '물망초'라는 소설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우연히 마주친 순간을 '가슴이 서늘해졌다'라고 표현한 문구가 얼마나 마음에 와 닿았던지 지금도 그 소설을 생각하면 정말로 가슴이 서늘해진다.
조정래 작가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느꼈던 분노와 슬픔도 동네 글방이 주었던 값진 경험이다. 한 권을 읽고 나면 그다음 권을 빨리 읽고 싶어 그냥 가도 가까운 글방을 뛰어서 가곤 했고,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빌려갔으면 매일 글방에 들러 빌려간 책이 들어왔는지 확인하며 애를 태우기도 했었다. 고등학교 때 읽기 시작한 '토지'는 권수가 많아 대학에 들어가서야 그 긴 독서가 마무리되기도 했다.
대하소설은 나에게, 시대의 불행이 개인에게 주는 고난, 신분이라는 것의 허망함, 인생은 왜 이다지도 불공평한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안겨주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나의 열린 글방 사랑은 계속되었다.
고3 때 한번 읽은 삼국지를 대학에 가서 다시 한번 읽었는데, 두 번째 읽는데도 어찌나 흥미진진하던지 수업시간에 책상 아래에 숨겨놓고 읽는 짓까지도 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 2학년 때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 아르바이트를 했다. 책 정리를 하고 나면 남는 시간에 도서관의 책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꿀 같은 아르바이트였다. 학교 도서관은 동네 글방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책이 있었다. 당시에 나는 한국 문학에 빠져있던 때라 한국 근현대 소설을 많이 읽었었다. 특히 이문구와 박완서의 소설을 좋아했는데, 어쩌면 그렇게 물 흐르듯 글을 쓸 수 있는 것인지, 작가란 그런 타고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거룩한 칭호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 밖에도 읽고 나면 여행을 다녀온 것 같은 담백함을 주는 일본 소설, 퐁당 빠져들어 한시라도 빨리 결말을 보고 싶어 후루룩 읽곤 했던 판타지 소설, 가슴이 아릿하면서도 줄거리가 재미있었던 은희경이나 양귀자와 같은 작가들의 현대소설 등 소설을 탐독하는 것은 가슴 벅찬 희열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내 청소년기를 윤택하게 해 주었던 동네 글방은, 사양 산업이 되어 문을 닫게 되었고, 나의 젊은 시절 자양분이 되어주었던 소설도 직장생활에 허덕이면서 내 마음속에서 천대받는 존재가 되어갔다.
빨리 발전하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자기 계발서만 주로 읽게 되었고, 아이를 갖고부터는 육아서를 열심히 읽어야 할 것 같았다.
한가로이 소설을 읽는 것은 어쩐지 죄책감이 느껴져 휴가 때만 특별히 나에게 주는 선물처럼 읽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렇게 십여 년을 소설책 읽는 즐거움은 뒤로 미루고 살았다.

그런데 유독 올해 들어, 중년의 문턱이라는 40대가 중반을 향하는 탓인지, 오롯이 나의 즐거움만을 위한 시간이 갖고 싶어 졌다. 부쩍 소설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진다. 다시 그 충만한 쾌락을 만끽하고 싶다. 숨 막히게 빠져들던 대하소설의 물결을 다시 한번 타보고 싶고, 다음 권이 궁금해서 글방으로 달려가던 흥분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

내년에는 좋아하는 소설을 마음껏 읽겠다. 밤을 새도 좋을 만큼 가슴 설레는 사랑이야기도, 분노와 슬픔에 가득 차 책을 읽다가 고개를 번쩍 들고 숨을 돌려야 하는 역사 소설도, 오싹하는 공포감에 발가락을 오므리며 읽는 추리소설의 짜릿함도 내년에는 꼭 마음껏 누려 보리라 다짐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2021년 읽고 싶은 책 리스트를 작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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