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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Mar 14. 2021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저

귀여운 아이들의 이야기에  미소 짓다가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

작가는 어린이책 편집을 오랫동안 하던 사람이고, 지금은 독서교실 선생님이다. 


어린이들을 만나면서 일어나는 소소하고 아름다운 사건들, 정성스럽게 얘기해 보지 않으면 영원히 느낄 수 없는 사소하나 감동적인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김소영 쌤, 재밌는 분이에요. 기회 되시면 북토크 같은 것도 한번 보세요." 

책을 선물해 준 동생이 작가 김소영 선생님의 북토크도 추천해 주었다. 한번 찾아보아야겠다. 


특별할 것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귀여워서 즐겁게 읽다가 결국 아이들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의 불완전함과 어른의 책임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삶을 선택한다는 것' 챕터를 읽다가 기어코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그 일은 나도 보았던 그 뉴스인가 보다. 

그때, 다섯 살 아이의 사망 기사를 보고 한참 괴로웠다. 

아이가 죽은 것도 가슴 아팠지만 죽음 전에 그 오랜 고문 같은 시간을 겪었다는 사실이 자꾸 생각나 힘들었었다.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 숨이 막히기도 했다. 

이 책의 작가도 아이를 많이 만나는 사람이니 더 그런 생각이 들었겠지. 

그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 아이였을까를 궁금해하다가, 좋아하는 것마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궁금해할 수조차 없었다고 했다. 

작가의 말처럼, 우는 것도 자기만족인 것 같아 울음도 참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눈물이 났다. 지금 이 문장을 쓰는 동안에도 가슴이 답답해서 숨을 크게 쉬었다. 

그저 아이의 명복을 빌고,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무슨 일이든 동참하자고 나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받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항상 미소를 띠게 만들지만 이 세상에는 반대의 경우가 항상 존재한다. 안타까운 기사를 읽고, 슬퍼하고, 댓글을 한 줄 남기는 것 이외에 더 현실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노 키즈 존'에 대한 나의 생각도 한 번 더 정리해 볼 수 있었다. 


어린이는 공공장소에서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어디서 배워야 할까? 당연하게도 공공장소에서 배워야 한다. 다른 손님들을 보고, 잘못된 행동을 제지당하면서 배워야 한다. 좋은 곳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그에 걸맞은 행동을 배워야 한다.
<어린이의 세계> p213


나는 '노 키즈 존'을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다. 

그것이 완전하게 정당하다고 보지는 않지만 상인들로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조용함을 기대하고 들어간 찻집이나 레스토랑에서 아이들로 인한 소음으로 자신의 시간을 방해받는다면, 비용을 지불한 사람은 불만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아늑한 공간을 제공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돈을 받는 상인이 그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이를 동반한 손님의 출입을 거절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아이를 데리고도 그런 곳에 가고 싶은 부모의 마음도 알고 있지만 자신들도 아이가 없이 조용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니 이해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공공장소에서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공공장소에서 배워야 한다'라는 말에 매우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프거나 많이 불편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이들도 조용히 해야 하는 환경을 본능적으로 인지한다. 특히 자신들이 '좋은 대접'을 받거나 '좋은 옷'을 입은 경우에는 격식 있는 자리라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점잖은 행동을 한다. 


예전에 가족과 함께 사이판으로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리조트 뷔페에서 조식을 먹었다. 

사이판 리조트는 제2의 대명 콘도라고 할 만큼 한국인이 많은 곳이다. 조식 식당 손님도 반 이상이 아이들을 동반한 한국인들이었다. 그곳에서 우리 한국의 어린이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식탁 사이를 전속력으로 뛰어다니는 모습을 흔치않게 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식당 종업원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작게 하는 말을 듣고 말았다. 

"Korean..."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던 종업원의 멘트에 기운이 쭉 빠졌었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 아이들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이들은 당연히 어른에 비해 주의력이나 경험이 부족할 터이니 다른 나라 아이들도 그랬을 수 있다. 


내가 다른 나라 아이들을 본 경험이 많지 않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심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그 식당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특히 많이 봐서 그런 것 일 수도 있으니 그 고민까지 하는것은 일단 접어두자. 


아이들의 성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말려도 듣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무리 활동적인 아이들도 주변 분위기를 감지하고 부모가 조용히 얘기한다거나, 엄숙하다는 생각이 들면 주의하며 소음을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특히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가 대접받는 사람이다. 이곳에서는 나도 체면을 생각하고 주변을 배려해야 한다.'라는 것을 배운 아이들은 때와 장소를 분명히 가릴 수 있다. 한두 번으로 배울 수는 없다. 지속적으로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어린이를 대접해 주는 것과 버릇없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다르다. 

아마도 이런 것은 개인의 노력과 함께 사회 전반적인 문화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요즘은 많은 부모들이 이런 부분을 인지하고, 공공장소의 예절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시끄러운 경우가 많이 줄었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들이 어른만큼 조용히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이는 불편하면 울거나 칭얼거리는 것이 당연하므로 이는 이해되어야 한다. 잘 생각해 보면, 대부분 주변의 어린이가 내는 소음에 기분이 거슬리는 경우는 아이 자체 때문이 아니다. 아이가 소음을 낼 때, 미안해하거나 제지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부모를 보며 화를 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아이가 소음을 내면 더 큰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제지하는 경우, 자신의 아이가 주변에 피해를 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이해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에 갈등이 유발된다고 생각한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어디에서나 다들 마스크를 쓰고 주의한다. 여러 장소에서 감염이 발생한 뉴스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확진자가 나온 장소에 다녀왔다는 알림을 받으면 다들 불안해한다. 그런데 한 가지,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초등학교에서 나왔다고? 괜찮아, 애들은 마스크 잘 쓰고 잘 지켜서 잘 안 옮아."

이것은 아이들이 전파력이 약하다거나 하는 의학적 사실에 대한 얘기만은 아니다. 아이들은 정말 잘 지킨다. 마스크도 꼭 쓰고 손 소독도 잘한다. 마스크를 제대로 쓰지 않은 아이가 있으면 담담하게 말해주고, 지적을 받은 아이도 화를 내지 않고 자기 마스크를 점검한다. 어른들보다 훌륭하다. 

나도 아이를 키우면서 강압적으로 무엇인가를 시키거나, 대충 거짓말로 둘러대면서 무성의하게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순간적으로 아이를 움직이기는 쉽지만 공감이나 설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조용히 해야 하는 장소, 가기 싫지만 꼭 참석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경우, 어른에게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금 쉽게 차근차근 설명하면 대부분은 싫어도 협조를 해준다. 내가 흥분해서 제지하면 더 말을 듣지 않는다. 그것은 어른들도 똑같지 않은가? 

어린이를 존중하는 것은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고려할 때 어린이가 차지하는 '비중'이라는 것이 있다. 현재를 사는 사람들 중 한 부류가 '어린이' 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가 고려해야 하는 다양한 집단중에 '어린이'가 있음을 인지하고, 그들의 존재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받은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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