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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Jan 21. 2023

사랑하는 책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한번 만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신간일 때 선물을 받았으니, 벌써 십여 년 전에 우리 집에 들어온 책이다.

중간중간 생각날 때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꺼내 읽었는데도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도 느낌이 강한 책이 있다. 무슨 내용이었냐고 물으면 쉽게 답을 할 수는 없지만 내가 너무 좋아하는 책이야, 너무 사랑스러운 책이야.라고 말 할 수 있는 책이다.


작년 말부터 잠들기 전에 조금씩 다시 읽었는데 마치 처음 보는 문구들처럼 아름답고 정겨웠다. 그렇다고 자연과 사람에 대한 잔잔한 이야기만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담담하게 풀어내는 기억들 사이로 작가가 겪어왔던 격동의 날들, 슬픔들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래도 말년에 정원이 있는 아름다움 집에서 꽃밭을 가꾸며 숲을 바라보며 평안한 날들을 보내신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가끔 책을 다시 읽을 때 놀라운 것은 전혀 처음 보는 문장인 것 같은데 줄이 쳐져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것 같은데, 또 나 말고 이 책을 본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도, 줄이 그어져 있다. 분명히 내가 그은 줄인데 그때도 이 문구가 가슴에 들어왔었나, 그럼 그렇게 강렬한 문구를 또 잊고 살았던 거구나. 새삼스럽게 놀랍고 허망하다.


유명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보면 아는 사람의 죽음을 접한 것처럼 충격적이고 슬플 때가 많다. 박완서 작가의 별세 소식에 대한 기사를 처음 봤을 때 몇 번을 다시 읽었다. 드라마 미망을 보고 나서 찾아 읽었던 대하소설 미망에 대한 감동, 수많은 단편들, 가슴아린 자전적 이야기까지 오랫동안 사랑했으면서 왜 한 번도 팬사인회 같은 곳에 가지 않았을까 아쉬웠다.


그런가 하면 지금도 좋아하는 작가와 연예인들이 있지만 막상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들은 놓치며 살고 있다. 언젠가 친구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하루키의 광팬인 친구는 그렇게 좋아했는데 늦기 전에 한번 만나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말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친구가 하루키를 만나기 위한 작전을 세울 것 같지는 않다.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다. 세상의 좋은 것들을 만들어낸 사람들을 다 직접 접하고 살 수 없고, 그들이 생산해 낸 것들이 그들 자체라고 할 수도 없으니 그저 그들의 성과를 즐기고 사랑하는 것이 맞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는 이 아름다운 책의 문구들을 적어볼 생각이다.

아마도 이렇게 다 적어놓아도 잊고 있다가 몇 년쯤 후에 분명히 다시 책장에서 꺼내 읽어보면서 또 새롭게 놀라겠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_ 박완서 저]


p79
그동안 경제제일주의의 뻔뻔스러움에 자존심이 상한 국민들은 그 옛날 김구 선생의 말씀을 표절해다가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참신한 지도자를 뽑게 되는 일도 생기지 말란 법이 없을 것이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 중에서 언제 들어도 마음에 깊이 와닿는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의 첫머리를 인용하는 것으로 감히 이 졸문의 말미를 장식하려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p 148
제목만 보고도 처음 읽었을 때의 행복감이나 감동이 젊은 날 그랬던 것처럼 가슴을 설레게 하는 책은 못 버린다. 책으로 젊은 피를 수혈할 수도 있다고 믿는 한 나는 늙지 않을 것이다.

p210
더 큰 보람은 그의 글을 읽으면 저절로 우러나는 그의 인격을 흠모하게 되는 마음이다. 우리가 미처 발견 못 한 미를 먼저 발견한 안목의 소유자들은 자신의 안목에 대한 자긍심 때문에 흔히 과장되거나 선동적인 문장을 쓰는 경우가 많다. 허나 최순우는 그가 발견하고 느낀 한국의 미를 내면 깊숙이 스며들게 한 뒤 비로소 글로 표현해서 읽는 사람에게 그의 것을 번지게 하는 힘이 있다.

p252
우리 속물들은 국산차만 타고 들어가도, 소형차만 타고 들어가도 주눅이 들 것처럼 럭셔리한 것으로는 서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특급호텔 현관에다가 온갖 촌스러운 것들을 풀어놓고 양 사장 몫과 제 몫으로 나누어 차에 실어주신 선생님 때문에 그날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고 통쾌하고 으쓱했는지요. 그 거침없으심은 만천하에 보여주고 싶을 만큼 자랑스러웠습니다.
(박경리 선생님을 추모하는 글 중에서...)

p263~264
나는 틈만 나면 고개를 곧추세우고 뒷짐을 지고, 화가들이 작업하고 있는 책상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그들의 그림 솜씨를 모욕적으로 평하기를 즐겼다.....
(중략)
그가 신분을 밝힌 것은 내가 죽자꾸나 열중한 불행감으로부터 헤어나게 하려는 그 다운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내 불행에만 몰입했던 눈을 들어 남의 불행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부터 PX생활이 한결 견디기가 쉬워졌다.
(박수근 화백 추모글 중에서)


특히 박수근 화백은 박완서 작가와 미군부대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으로 작가의 처녀작 '나목'의 한 축을 이루는 사람이다.  작가의 소설과 자서전을 여러 편 읽으면 어떤 것이 기억이고 허구인지 경계가 모호할 때가 있다. 사실인지 허구인지의 검증은 다시 책들 훑어보면 알 수 있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의 진위 여부가 아니라 그 글들 속에서 느껴지는 처절함과 강단, 희망 같은 것들이다. 그 색채와 서늘함이 읽을 때마다 가슴 깊이 파고든다.


박완서 작가는 미군부대 초상화부에서 일하던 시절 자신을 '더 전락할 수 없을 만큼 밑바닥까지 전락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불행감에 거의 도취해 있었다.'라고 표현했다.


263 페이지의 저 문장을 읽으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나목에서도, 이 책에서도, 그는 당시 자신의 오만함을 더할 수 없이 부끄러워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을 자책으로 표현하지 않고 자신의 '싹수없는' 모습을 조롱하듯 우스꽝스럽게 묘사하였다.  이렇게 당돌하고 세련된 그러면서도 확실한 반성문이 또 있을까.


박완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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