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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Apr 27. 2023

그때의 나는 내 아이보다 잘난 사람이었던가?

사실은 아들이 나보다 낫다. 참견 좀 접어두자.

중학교 1학년은 자율학기제라서 중간고사 대신 문화체험활동을 .


시험도 안 보는데 러도 간다고 하니,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존재하는 빡빡한 세상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자유를 맛보게 해주는 배려처럼 보인다.


장소는 을지로, 뮤지컬을 본다고 한다.

선생님 통솔하에 다 같이 관광버스를 타고 가는 대신, 삼삼오오 짝을 지어 대중교통을 이용해 목적지에 도착하는 중학생의 소풍을 갔다.


중학생이 되니 바뀐 것들이 많아 나도 어리둥절하다.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아 대견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다.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해서 교통카드가 필요하다는 말에 흠칫 놀다. 벌써? 벌써 그렇게 소풍 갈 나이가 됐다고?


생각해 보니 나도 그랬다.

중학교 때는 아이들과 지하철을 갈아타고 서울랜드로 소풍을 갔었다.


길눈이 어두운 나는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도 늘 친구들 사이에 끼어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따라다녔다.


아마 친구들이 없었다면 소풍장소까지 무사히 도착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반면, 친구들이 있어서 내가 더 길에 눈이 늦게 틔였을 수도 있다.

약속장소에서 만나기만 하면 똘똘한 친구 옆에 묻어서 갈 수 있으니 내가 교통수단을 알아볼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내 지난날들을 떠올리다 보니 그때의 감정도 생각났다. 영리한 친구들 사이에서 어리숙한 나는 조금 열등감도 느꼈었다.

개중에는 대책 없이 길 모르는 나를 악의 없이 구박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겉으로는 허허 웃었지만 그럴 때마다 자존심이 상했었다.


문득 아들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싫었다.

나처럼 어리숙한 모습으로 아이들 뒤를 졸졸 따라다닐 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았다.


나보다 똘똘하길 바라는 마음, 나 같은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길을 알려주고 싶었다.


우리와 이동할 때는 주로 자동차를 이용했고, 친구들과 멀리 어울려 가본 적이 없는 탓에 아들은 교통카드를 써본 경험도 거의 없다.


지난 주말, 교통카드를 충전해 주면서 버스를 시험 삼아 타 봤다. 본인도 부모 없이 대중교통을 타는 것이 처음이라 촌스럽게 보이고 싶지 않은지 지하철 역도 한번 들어가 보자고 한다.


"카드를 지갑 안에 넣고 찍어도 다 찍혀. 혹시 안 찍히면 당황하지 말고 카드를 꺼내서 찍으면 돼."


환승 시스템까지 설명하는데 이미 집중력이 떨어져서 딴짓을 하고 있다.

아무튼 카드 찍고 들어갈 줄 알면 되지 뭐.


그리고 어제저녁 친구들과 간식 사 먹으라고 만원을 쥐어주면서 네이버 지도 앱을 깔아줬다.


다녀올 시간이 한참 지나서 궁금해 연락을 해봤다.


잘 갔다 왔어?

재밌었어?

길은 안 헤맸고? 멀미 안 했고?


이놈에 자식, 응 말고는 할 말이 없나. 화통 터져


친구들이 길 잘 찾았나보네?

찾기 쉬워. 버스 타고 지하철 두 번 타면 돼. 금방 찾았어.

아...... 그래? 너...... 길 잘 찾는구나.


천연덕스럽게 얘기하는데 조바심 낸 내가 훨씬 못나 보인다.



아들이 겪어야 하는 고난이 훤히 보일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는 것이 괴롭다. 그래서 그 고난을 피해 갈 수 있도록 안내해 주고 싶고, 대신 겪어주고 싶다

혹은 아주 수월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시행착오가 적은 방법을 숙지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런 방식은 아들이 겪어내면서 배울 기회를 빼앗는 길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껍질을 스스로 까고 나오지 못한 병아리는 생에 대한 저항력이 낮아 오래 생존하지 못한다고 한다.

손가락 하나만 딱 대주면 힘들이지 않고 껍질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게 그걸 참아야 하는 것이 껍질을 홀딱 다 까주는 것보다 어렵다.


그 시절의 내가 겪은 어려움을 이 아이도 똑같이 겪을 거라고 짐작한다. 내가 이 아이보다 낫다는 우월감에 잘난 척을 하는 건 아닐까.


사실은 나보다 나은 놈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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