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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Jul 19. 2023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하는 일상 #1.오래된 원형 테이블

추억을 간직한 물건

외할머니와 이모가 사시는 집은 H아파트 단지 안에 있었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책가방을 멘 채로 버스를 한 번만 갈아타고 H아파트 단지로 가곤 했습니다. 정류장에서 외할머니가 사시는 8동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나무가 많았고 노을이 보였습니다.

한 없이 느릿느릿 걸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에 도착하면 할머니와 이모가 있었어요.

"어서와라아"

화창하게 반기지도 무뚝뚝하지도 않은 뜨뜻한 할머니의 한마디에 복잡한 생각들은 사라지고 몸도 마음도 늘적해졌습니다.

"너는 집에서도 맨날 보는 테레비를 왜 거기 가서 보냐?"

엄마가 타박을 하곤 했지만, 가방을 팽개치고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보다가 이모가 고봉처럼 쌓아주는 밥을 먹는, 별장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이모의 테이블이 있었습니다.

복지관에서 영어를 배우던 이모가 소파 앞에 놓고 책상으로 사용하던 동그란 테이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원형 상판을 받치고 있는 네 개의 다리도 아름다웠습니다.

이모가 자리를 비우면 그 탁자에서 책도 읽고, 공부한다고 뭘 끄적거리기도 하면서 가끔 시간을 보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저는 직장인이 되었고, 생활이 바빠져 외할머니 집을 찾는 일은 드물어졌습니다.

할머니는 더 나이가 드셨고, 여러 가지 이유로 외삼촌댁으로 거처를 옮기셨지요. 이모도 집을 옮기면서 동그란 테이블은 다른 많은 물건들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몇 년 전 엄마네 시골집에 가서 그 테이블을 다시 만났습니다.

"어! 이게 여기 있었어?"

밭매고 와서 벗어놓은 모자를 올려두거나 채소 나부랭이를 널어두는 용도로 베란다 한쪽 구석에서 흙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채로 나름대로 몫을 다하고 있던 테이블을 보니 옛날 H아파트의 늘적한 추억이 떠올랐어요.

흙먼지에 쌓여있었지만 동그란 상판에는 아직 유리덮개도 있었어요.

"나 이거 줘!"

뭐 그런 걸 탐내냐는 눈빛으로 엄마는

가져가라! 했습니다.

조심조심 묶어서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추억은 늘 사실보다 아름다운 걸까요. 데리고 와서 보니 내 기억과는 달리 상판에 원목이 아니라 조악한 합판이 덧대있는 저렴한 가구더라고요. 시골에서 오래 묵은 탓에 상처도 많고 한쪽 구석은 거뭇하게 곰팡이 자국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때 그 추억을 간직한 테이블이니까요. 싹싹 여러 번 닦아서 먼지와 곰팡이 자국을 지우고 보니 그럴듯했습니다.

안방에서 협탁으로 쓰다가 요즘은 식탁옆 보조테이블로 쓰고 있습니다. 유리 밑에 레이스 테이블보를 깔아줬더니 느낌이 또 다르네요.

소중한 사람과의 추억을 간직한 오래된 물건이 집안 어딘가에 있다는 건,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지원군을 지니고 있는 것과 비슷한 기분입니다.


2023. 7.18. 춘춘문예




헤드라잇에 동시게재합니다.

https://m.oheadline.com/articles/CqEp3VGBxkDXlS5Pl9Aa0w==?uid=fjEdyhyxRsSw9audnSBY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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