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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Dec 07. 2023

#12. 235 사이즈 좀 찾아주세요

허당의 끝판왕

내가 이 얘기를 안 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속이 쓰려서 해야겠다.


그러니까 235mm를 샀어야 했다.

구두는 220mm를 신는 주제에 아무리 넉넉하게 양말 들어갈 자리를 고려한다고 해도 235mm 이상 욕심내는 건 무리였다는 말이다.




14년간 신었던 롱부츠는 이제 놓아주기로 올해 12월에 결심을 했다.


그래도 작년까지 이 녀석을 포기하지 않았었다. 동네마다 흔적을 감춰버린 구둣방을 수소문해서 장인정신으로 구두를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시는 분을 찾아내기까지 했다. 멀쩡한 바깥쪽 가죽과는 달리 너덜너덜해진 인조내피를 구두 장인은 깔끔하게 천을 대서 막아주었다. 앞 바닥이 얇아져서 발바닥이 아팠는데 그것도 오돌 토돌 한 밑창을 붙여서 해결해 주었다.

구두를 처음 샀을 때부터 바깥쪽에 밑창을 붙여주면 더 오래 신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앞으로 새 신발은 무조건 처음부터 바닥을 붙여서 신으리라 다짐도 했다. 

뒷굽도 통째로 갈고, 싸구려 신발 한 켤레 가격을 주고 14년 된 롱부츠를 올 수선해 두었다. 올 겨울이 시작되자마자 뿌듯하게 꺼냈는데, 그는 내가 생각한 그 모습이 아니었다.


얘가 이렇게 못생긴 애였던가. 왜 작년에는 예뻐 보였지? 구둣방 사장님이 고쳐주신 부분은 말끔했지만 전체적으로 아무리 감추려 해도 촌스러움이 드러났다. 요즘 나오는 것들과 비슷한데 뭐가 달라진 거지.

무엇보다 5cm밖에 되지 않는 굽이 이제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원래 하이힐을 신지는 못했어도 5cm 정도는 신고 뛰기도 했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현재 신발장 속 내 신발은 모두 플랫 아니면 운동화다.

결국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새로운 부츠를 사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결혼기념일이라고 남편이 부츠를 사주겠다고 했다. 결혼을 나 혼자 한 것도 아닌데 남편에게 선물을 받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좀 파렴치한 일이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그 감정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이것 또한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제저녁, 매장을 몇 군데 둘러본 끝에 마음에 쏙 드는 놈을 만났다. 굽은 3cm로 납작하고, 가죽도 좋아 보인다. 너무 어려 보이지도 않고 적당히 클래식했다.


다시 말하지만 내 발 사이즈는 220mm이다.

220mm의 발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소소한 애환이 있다. 우선 사이즈 구하기가 힘들다. 225까지는 잘 나와주는데 220은 꼭 주문을 해야 한다.

주문까지 해서 일주일 기다렸다가 택배로 물건을 받아보면 그때 매장에서 봤던 그 물건이 아니다. 사이즈가 너무 줄어들면 구두의 모양이 달라진다. 딱 230이나 235에서 가장 황금비율이었을 구두가 220이 되면 묘하게 짧뚱해 보인다. 그래서 주로 앞코가 뾰족한 구두를 선택해서 최대한 길어 보이는 걸 산다. 


그렇더라도 부츠나 운동화는 한 두 치수 큰 사이즈를 살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어 좋다. 구나 부츠는 겨울에 두꺼운 양말을 신어야 하니까 235mm를 사겠다고 다짐을 했다.


"진열된 게..... 어 240mm인데 느낌 한번 보세요."

두꺼운 타이즈에 양말까지 신은 상태에서 부츠는 240mm에 적당히 들어맞았다.

"양말을 벗으면...... 아무래도 한 치수 작아야 할 거 같아요."

"아, 그래요 그럼 35 사이즈 찾아드릴게요."

창고로 들어간 매장 아저씨가 새로운 박스를 들고 나오셨다.


새 박스에서 꺼낸 신발은 진열된 것보다 더 잘 맞았다.

"이게 낫네요. 아까는 좀 커서 발목이 헐거웠는데. 이걸로 할게요."

신발을 벗어서 아저씨에게 주려고 보니 어라, 이것도 240mm다.

"어? 이거 240인데요?"

"아, 그게 진열된 건 손님들이 많이 신어보셔서 거의 5mm 늘어나 있어요. 이게 좀 작을 거예요.

"그치만 나중에는 이것도 진열된 것처럼 늘어나지 않을까요?"

"아, 그게 그건 너무 늘어났어요."


아저씨의 비 논리적인 설명은 235mm가 없다는 뜻인가 보다. 웬만하면 다른 매장에서 구해다 줄 법도 한데 저렇게 나오는 걸 보니까 구하기도 어려운 게 아닐까? 저 친절하신 말투와 표정으로 그냥 귀찮아서 그러는 건 아닐 것 같은데.



이런 순간에 나는 황당하게도 무기력증에 빠지고 만다. 한두 번이 아니다. 결정장애가 오면 부담과 무기력에 최대한 변동 없는 선택을 하는 못남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 구해달라고 할까? 그럼 다시 오거나 택배 받아야 해서 귀찮은데. 근데 지금도 잘 맞는 거 같은데. 오히려 한 치수 작으면 너무 작은 게 아닐까? 

괜찮아. 어차피 겨울 내내 두꺼운 양말 신을 거야. 그리고 결정적으로 통이 좀 넓은 걸 사려고 했는데 이건 통이 좁잖아? 오히려 235를 사면 통이 좁아져서 안 예쁠 수도 있어. 그냥 240을 사자.


약 30초간 세상을 구하기 전 닥터스트레인지처럼 수많은 경우의 수를 쓸데없이 조합해 보고 가장 이상한 결론을 내렸다.


예쁘게 보장된 부츠를 들고 집에 오는 내내 즐거웠다. 집에 와서도 마루 바닥에 쇼핑백을 깔고 신어보고 또 신어보고 아무리 봐도 잘 샀다.




그날 밤,

깜깜한데 눈이 떠졌다. 12시 40분밖에 되지 않았다. 

화장실에 갔다 와서 물을 먹고 다시 누우니 눈이 말똥 하다. 요즘 한번 깨면 잠이 잘 오지 않는데 낭패다. 빨리 다시 자야지.


그럴수록 생각이 꼬리를 물고 삐져나온다. 

- 내일 아침에는 홍루이젠 샌드위치 사놓은 걸 도시락으로 싸가야지. 사과를 땅콩버터에 발라서 가져가야겠다. 월요일에 가기로 한 병원은 금요일에 가자, 월요일은 사람이 너무 많아. 그런데 부츠를 너무 큰걸 샀어. 사에서 비용처리할 게 있으니까 잊지 말고 기안을 올려야 해. 주말에 가족 여행이 있으니까 금요일에 물건 사야 해.


별일 없는 일들이라 한구석으로 접어버리고 잠들려는데 마음이 영 불편하다.

뭐지? 왜 평온하게 착 가라앉지 않고 불안하게 들떠있지? 불안할 땐 뭐가 원인인지 한 개씩 짚어본다. 역시 걸리는 건 부츠다. 외면하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불편해할 시점이 되었다.


- 그래, 240mm는 너무 커. 235를 샀어야 했어. 아, 괜히 아저씨한테 넘어갔어. 양말을 벗고 더 오래 신어봤어야 하는 건데.

1시 05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나는 부스스 일어나 신발장에서 부츠를 꺼내 신어보았다. 양말을 신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발이 휘휘 돌아가지 않는다. 이정도면 괜찮다. 마음을 놓고 다시 잠자리로 들어갔다.


다음 날, 기모스타킹을 장착한 발에 롱부츠를 끼웠다. 괜찮다. 털 깔창이 안정적으로 발바닥을 잡아주고 발목도 적당히 여유 있다. 이대로 240에 안착하자.

상쾌하게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예상치 못했던 통증이 왔다. 발목 부위 지퍼가 굽어져 안쪽 복숭아뼈 윗부분 뼈를 걸을 때마다 찔렀다. 강한 통증은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눌리면서 은근히 뻐근하다.


계단을 내려올 때는 평지보다 발목이 더 많이 접혀서 그런지 발목을 찌르는 지퍼의 힘이 점점 더해졌다. 

- 역시 240이라서 그런 걸까. 내 발과 발목보다 부츠가 크니까 지퍼 부분도 더 많이 접히고 그러면서 더 구겨지는 건 아닐까. 그럼 부츠의 수명도 줄어들 것 같은데, 나 이거 진짜 오래 신고 싶은데. 235사이즈 좀 찾아봐주세요. 이걸 한마디 못해가지고.

슬퍼지기 시작했다. 

- 아냐, 이게 뭐 5mm 크다고 더 많이 접혀서 그럴 리가 없어. 아마도 이 부츠가 그냥 발목을 좀 누르는 모양일 거야. 사이즈 때문이 아닐 거야. 


이건 또 무슨 궤변인가. 사이즈 때문이 아니라 원래 부츠가 발목을 찌르는 형태이기를 바란다는 거냐? 바보같이 사이즈를 제대로 달라고 하지 못한 사람이 되느니 원래 이상하게 만들어진 부츠를 산 사람이기를 바라는 거냐? 



이럴 때 생각의 결론은 긍정적인 교훈을 얻는 쪽으로 가는 것이 좋다. 

다시는 그런 미숙한 판단을 하지 않겠다거나, 꼭 원하는 걸 말하는 사람이 되겠다거나. 


솔직히 말해야겠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그렇게 아름다운 결론을 얻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쓰다 보니 그럴 마음이 사라졌다. 아저씨에 대한 약 오름은 더해지고 부츠 생각에 속은 더 쓰리다. 




10 시간 후.... 밤 11시경 


낮에 조~기 위에까지 글을 쓰고 점심시간이 끝났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드디어 결론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자기 합리화로 행복을 추구하는데 익숙한 나는 청바지를 입어봄으로써 구두매장 아저씨와 내면으로 나 혼자 화해를 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부츠를, 몇 달간 돈이 있으면서도 없는 척하며 아끼고 아낀 돈으로 남편이 사준 저 부츠를 완벽하게 좋아하기 위해 나는 밑단이 꽤 두꺼운 청바지를 입어봤다. 그리고 청바지 위로 롱부츠를 감싸 지퍼를 쑥 올렸다. 역시 잘 들어간다. 조금 큰 사이즈라 더 잘 들어간다. 통증을 유발하던 발목 부위도 청바지가 들어가자 접힘이 덜해져서 계단을 걸어도 아프지 않았다. 


- 어차피 추울 때 신으려는 건데 두꺼운 양말 신으면 되지 뭐. 청바지 입을 때 신으려고 한 이유도 크잖아? 잘 샀어. 240사길 잘했어. 


아, 찝찝하게 행복하다. 

오늘 부츠 고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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