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넘어서 만난 관계는 학창 시절 친구들처럼 깊어지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나이 들어 만난 인연이 깊이 있는 관계로 발전했다면 행복한 일이다.
반면에 시기별로 인연이 정리되기도 한다.
과거 어떤 시절에 너무 좋았던 우리들은 이제 만나서 시간을 보낸 후 피곤함만을 남기기도 한다.
마치 회식자리처럼 말을 나누는데 신경이 쓰이게 될 때, 그 인연은 예전과 다르게 대해야 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몇 년 전, 여러 친구 그룹 중 한 그룹이 정리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친구 A가 우리 세계 밖으로 나갔다.
A는 친구들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는 편이었다. 내게도 잊기 힘든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학착시절, 옮겨야 할 짐이 있는데 택배 부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트럭 운전사인 우리 아빠가 본인 집에 잠깐 들러서 자기 짐을 옮겨주면 안 되냐고 물어봐서 당황했었다. 당연히 안된다고 했다.
A뿐 아니라 우리 모두 미숙했지만 어리고 마음이 몽글몽글했던 우리들은 잠깐 멈칫할 뿐 즐거움으로 당황스러움을 상쇄하며 서로를 통째로 받아들였다.
마흔이 조금 넘어선 어느 날, A가 단톡방에 부탁을 남겼다.
2주간 매일 같은 시간에 어떤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체크를 하고 인증샷을 보내 달라는 부탁이었다. 생업과 관련된 일은 아니었다. 취미생활 정도의 일이었다고 해 두자.
모두들 성가시다며 투덜댔지만 다들 해 주었다. 그중 한 친구가 바쁜 일상에 밀려 인증을 며칠 건너뛰었고, 미안한 마음에 하지도 않은 인증을 했다고 말하는 바람에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렸다.
A는 자신에게 거짓말 한 친구를 용서하지 못했고, 결국 우리 모임에서 나가버렸다. 친구들은 A를 붙잡지 않았다. 학창시절 모습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그를 붙잡고 마음을 풀어주기에 우리는 삶이 너무 바쁘고 지쳐있었다.
최근 내게 소중했던 또 하나의 인연이 변색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그 역시 한 시절을 함께 보냈던 좋은 친구였다. 어떤 얘기도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삶을 산 지 십여 년이 흘렀어도 가끔 안부를 묻는다. 우리들은 일 년에 한두 번은 만나서 시간을 보낸다. 지난 일을 얘기하고 나이 듦에 대한 얘기를 나눠왔다. 그 시간들은 휴식이었다.
비슷한 업계에서 일하는 우리는 서로의 직장생활에서 겪는 애환에 대한 얘기를 주로 나눴다.
회사에서는 할 수 없는 속 답답한 얘기를, 말이 새 나갈 일 없는 친구에게 나누며 속풀이를 하고 개운함을 느끼곤 했었다.
작년쯤부터일 것이다. 전과는 다르게 이 만남이 끝나고 나면 업무를 마친 듯 피곤했다.
그리고 이 관계를 잠시 쉬어가야 한다는 것을 지난달 깨닫게 되었다.
지난 달, 나는 회사에서 팀장 때문에 약간 피곤했었다.
오래 함께 일했고 직급도 같았던 사람인데 내 팀장이 되었다. 그 후 나와의 관계에 약간의 서먹함이 생겼다. 그도 나에게 지시하는 것이 껄끄러운 것 같고, 나도 내가 하던 일을 어떻게 그에게 설명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중이었다. 큰 일은 아니다. 회사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과도기일 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서로 익숙해진다. 그저 지금 그 시간을 지나고 있으니 피곤할 뿐이었다.
지난 모임에서 현재의 나의 고민인 이 이야기를 털어놨다. 지금 이래서 내가 좀 피곤한 상황이야,라고.
B가 말했다.
나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본인이 조직장이 되었을 때 자기와 동급인 조직원 때문에 불편했다고, 그 후 그 조직원이 1년 후에 회사를 그만뒀을 때 좋았다고. 편안해졌다고.
B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두 가지 중 하나라고.
그는 그저 내 얘기를 듣고 비슷한 자기의 사례가 떠올라 아무 생각 없이 자기 얘기를 한 것이다. 내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한 말인지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내 얘기를 내 팀장의 관점에서 들은 것이다. 내가 퇴사를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겠지만 내 팀장의 불편함에 공감한 것이리라.
그 두 가지 중 어떤 쪽이었더라도 나는 더 이상 B에게 내 얘기를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동안 B가 비슷한 방식으로 은근히 화 나게 했던 일들이 줄이어 떠올랐다.
집에 돌아오면서 기분이 씁쓸하고 머리가 아팠다.
왜일까.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그렇다면 왜 그때 "그럼 나 회사 그만둬야 해?"라고 되묻지 못한 걸까. 나는 왜 아무 말 안 하고 고개만 끄덕였을까. 대응하지 못한 내가 답답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 것 같지는 않았다. 친구들과 만나다보면 가끔 짜증스러운 일이 생길 수 있다. 그전 성향으로 받아들이거나 화가 나도 속으로 투덜 거리면 끝날 일들이다.
이번엔 분노 말고 또 다른 복잡함이 머릿속을 시끄럽혔다. 며칠간 의도하지 않아도 그 생각이 곱씹혔다. 그리고 긴 생각 끝에 나는 답을 찾았다.
모임 이후로 기분이 이렇게 좋지 않은 것은 B에 대한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그를 대했던 내 태도 때문이었다.
B의 말에 신경이 거슬렸던 나는 그에게 대항하는 화법을 쓰고 있었다. 내 마음이 다친 만큼 그의 마음도 다치게 하고 싶어서 독하게 말하고, 내 말을 끊고 하는 그의 말을 다시 한번 끊고, 평소에 하지 않던 은근한 자랑도 했다. 그 자리에서 형편없는 사람이 된 내 모습이 보였다. 상처 주려고 기를 쓰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팀장 문제로 화가 났음에도 B에게 톡 쏘아주지 못한 것이 억울해서 버둥거렸던 것이다.
어쩌면 다른 주제의 대화에서는 내가 B를 화나게 했을지 모른다. B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 때문에 받은 마음의 상처를 달래느라 고통받았을지 모른다. 누가 먼저일 수 없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내가 먼저 상처 줬을 수도 있다.
슬프지만 지금의 우리는 서로에게 Toxic Friends가 되어있는 상태다.
최근 유튜브에서 인간관계를 손절한다는 단어를 본 적이 있다. 인연을 정리해야 하는 단계에서 좋았던 날들이 떠오를 때 양가감정으로 힘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를 한 번 더 다지기 위해 쓰는 야멸찬 말이 아닐까 싶다.
40대는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기다.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고단하다. 어깨에 너무 많은 것들이 얹혀 있어 친구를 통째로 품을 수 없는 시기, 위로받고 싶으면서도 남을 위로할 여유는 없는 시기다. 변해가는 몸과 마음이 버거워 가족에게도 이기적인 면을 자주 보여준다.
현재 삶에서 친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린 시절에 비해 터무니없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그 인연을 동일한 강도로 이어갈 수가 없다.
그렇다면 B와의 인연을 정리해야 할까?
완전히 정리하기에 B와 나의 인연은 깊고도 따뜻했다.
예의 친구 A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자 친구들과의 관계를 먼저 끊어냈다. 오랜시간 불균형한 관계였다. 그때는 A를 잡지 않았어도 아쉬움이 없었다.
하지만 B에게는 정리하기에는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마음의 고리가 남아있다. 피곤하지만 일부러 관계를 끊어낸다면 한동안 더 피폐할 것이다.
대신 잠시 쉬었다 가는 쪽을 택했다.
이 인연은 지금 너무 지쳐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B도 나의 가시 돋친 말들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잠깐 쉬어가자.
연락을 끊지도, 냉정해 지지도 않을 생각이다. 아마도 B는 내가 관계를 쉬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다. 인연의 색깔을 바꾸는 쪽으로 정리했을 뿐이다.
앞으로 살면서 상황은 셀 수 없이 바뀔 것이므로 다시 이 인연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다.
지금은 관계를 잠시 쉬는 것으로 실타래 같이 복잡한 머릿속을 풀지 않고 그냥 둬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