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춘춘 May 11. 2024

생선가게 아주머니가 겨울에도 반팔을 입었던 이유

갱년기 땀, 응급조치가 있다.

1.

어릴적 우리 동네 삼원연립 앞 골목 모퉁이에 생선가게가 있었다. 선 살 때마다 엄마와 아주머니 대화했던 생각은 나는데, 그 분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맨질 맨질한 방수 앞치마 안에 패딩 조끼를 입고도  팔은 맨 살이었던 기억하다.

체력이 좋으셔서 별로 춥지 않으신걸까?생선 다듬기가 힘들어서 더우신걸까?그런 생각을 했던것 같다.

나는 추워서 꽁꽁 싸매고 있는데 맨 살을 내놓고 있 그 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아주머니를 생각하면 반팔이 떠올랐다.


그분 뿐만이 아니었다.

아마도 고등학교 무렵이었을 텐데, 늘 추위를 타던 엄마가 언젠가부터 한겨울에 집에서 부채를 자주 부치곤했다. 파란색 플라스틱 부챗살에 매끈한 종이가 단단히 붙어있고, 기업은행 마크가 크게 새겨진 부채를 노상 파닥거렸다. (최근에도 친정집에서 화분을 놓은 철재 앵글 사이로 그 파란 손잡이가 삐죽 나와있던 것을 본 것 같다.)


이제 알겠다.

그때 그 어머니들이 한겨울에 반팔을 입고 부채를 부쳤던 이유가 갱년기때문 이었음을 99% 확신한다.

옷 입으면 덥고 벗으면 추웠을 테니 생선가게 아주머니는  얼마나 짜증스러웠을까. 한편, 우리 엄마는 우리에게 그렇게 짜증을 부리면서 자기가 왜 그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덕분에 나의 고등학교 시절도 참으로 피곤했다.)


2.

초겨울이었고, 난방이 잘 된 곳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훅 얼굴이 달아오르며 땀이 흘렀다.

마치 전기장판을 댄 것처럼 몇 초 만에 등판이 뜨끈해지기를 반복했다. 정말 그것에 온 것인가 의심되기 시작했던 초기 증상들이었다.


산부인과 정기 검진을 가서 물어보았다.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닌데. 너무 이른데? 뭐, 혈액검사 한번 해봅시다. 다음 주 화요일에 전화로 알려줄게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이유 없이 홀가분했다. 아직 이르다는 의사의 말이 희망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뭐, 맞다고 해도 할 수 없지.' 혼자서 고민만 하다가 검사를 맡기고 나니 오히려 대범해졌다.


7일 후, 화요일 오전 10시.

약속한 시간에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음...... 많이 불편해요? 수치가 많이 낮은데. 약 먹어야 될 정도야. 그렇긴 한데...... 아직 나이가 어리니까 조금 참아봐요. 감정기복이 심해지거나 너무 불편하면 바로 오고."

"네, 그럴게요."

"그래요. 운동 많이 하고, 즐겁게 생활해 봐요."


출산 후부터 십여 년간 진료를 본 곳이었다. 어렵게 애 낳았으니 앞으로 미역국을 일 년에 두 번 먹으라며 손을 꼭 잡아주던 의사 선생님의 참아보라는 말이 가족의 위로처럼 든든했다.

약을 꼭 먹어야 한다는 말보다 나았다. 운동하고 즐겁게 생활하면 된다는 말이지 않는가.


그런데 웬걸. 이성은 그렇게 담백하게 돌아가면서 눈물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이건 뭐 감정기복이 벌써 심하구만. 내 꼴이 웃겨서 울면서 웃었다. 전화로 상담했으니 망정이지 직접 가서 결과를 들었으면 진료실에서 주책 떨고 올 뻔했다.


3.

벌써 증상이 나타난 지 3년쯤 되어간다. 이제 그럭저럭 적응이 되긴 했지만 불쑥 소용돌이치는 짜증과 무력감, 밤에 갑자기 깨서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을 때 외로움은 여전하다.


그래도 집에 있을 때 그러는 건 좀 낫다.

가장 곤란한 것은 회사에서 동료들과 있을 때 갑자기 흐르는 땀이다.


작년 여름의 일이다.

외부에서 워크숍이 있어 삼삼오오 짝지어 자가용으로 이동을 했다. 나는 후배 사원 김대리의 차 뒷좌석에 앉아있었다. 분명히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고 있었는데 그놈에 발한 증상이 급발진하기 시작했다.

남의 차를 잠깐 얻어 타느라 가방도 가지고 있지 않아 땀을 닦을만한 휴지도 없었다. 그저 흐르는 땀이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얼른 내려서 바람을 맞으며 땀을 식히고 있는데 짓궂은 동료 하나가 내 땀을 목격해 버렸다. 하필 놀릴 거리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 자에게 걸렸다. 내가 갱년기 발한증이라는 것을 알 턱이 없는 그는 장난칠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

"어, 차장님. 땀을 왜 그렇게 흘리세요. 김대리 에어컨 안 틀어 드렸어? 아유, 뭐 기름 아까워서 그랬어? 에어컨을 틀어드렸어야지."

"어머, 더우셨어요? 말씀하시죠."

당황한 김대리는 쓸데없이 사과까지 해야 했다.

"아냐 아냐. 괜찮아. 그냥 좀 땀이 난 거야."


코로나에 걸린 것은 만 천하에 알릴 수 있으면서 왜 갱년기임은 죽어도 밝히기 싫은 걸까. 그냥 난 거 치고는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손바닥으로 연신 닦아대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별것도 아닌 그 일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을 때는 웃겼는데 당시에는 어처구니없게도 서럽기까지 했다.


4.

이제 마흔여섯인데 내가 갱년기임을 아직도 알리고 싶지는 않다.

갱년기의 비애를 모르는 삼십 대들은 병도 아닌 이 현상을 재미로 들어 넘길 것이 뻔하다. 그리고 하이에나 같은 장난 만렙 동료들에게도 아직은 먹잇거리를 제공할 수 없다.


다행히 갑작스러운 발한을 빨리 물리칠 나만의 응급조치를 몇 가지 만들어 두었다.

일단, 가장 안쪽에 얇은 옷을 입어줘야 한다.

아주 얇은 여름니트라던가, 헐렁한 티셔츠를 제일 안쪽에 입어서 땀이 솟아오를 때, 겉옷을 빨리 벗어야 한다. 추운날도 얇은 옷을 껴입었다가 위기 상황이 오면 바로 벗는다.

이제 두툼한 터틀넥 니트 같은 것들은 당분간 겨울에 못 입는다. 그런 것은 호르몬이 날뛰는 시기가 넘어가면 입기로 하고 서랍 안쪽에 고이 간직해 두었다.


다음은 냉수 한잔이다.

회의 중이거나 누군가와 마주 보고 얘기를 할 때 땀이 나면 상대방도 놀라면서 덥냐고 물어본다. 땀이 웬만큼 나야 말이지 이마에 흥건해져 버리니 누군들 물어보지 않겠는가.

그럴 때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마시면 땀이 급히 식는다. 건강에 좋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당장 급할 때 유용한 방법이다. 그래서 언제나 텀블러에 냉수를 담아서 회의할 때 들고 들어간다. 이 방법을 알고 당황스러운 순간을 여러 번 무사히 넘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땀이 그냥 막 나올 때가 있다.

자리에 앉아서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데, 등이 급격히 뜨거워지면서 얼굴과 목에 땀이 흐르면 빨리 닦아내야 한다. 그럴 때 크리넥스 티슈나 두루마리 휴지를 쓰면 필시 휴지 조각이 얼굴에 붙게 된다. 바로 거울을 보지 않으면 휴지조각을 얼굴에 붙이고 다니는 낭패를 보기 쉽다.

이럴 때는 카페에서 사용하는 칵테일 냅킨이 제격이다. 조직이 단단해서 얼굴에 휴지조각이 떨어져 나와 붙을 일이 없다. 카페에 가면 여러 장 주는 휴지를 한두 개 주머니에 넣었다가 땀나면 즉시 닦아준다. 카페에서 받을 수 없다면 따로 구입할 의사가 있을 만큼 내게는 필수다.


또 하나의 필수 도구는 손 선풍기다.

물을 먹고 땀을 닦는 것도 좋지만 선풍기로 말려주는 것이 가장 좋다. 오래 할 필요도 없다. 갱년기 발한은 얼굴에 바람을 쏘이면 수초 내로 가라앉는다. 내 책상에는 탁상용 선풍기가 겨울에도 자리를 잡고 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화가 나거나, 민망할 때, 걱정거리가 가슴을 짓누를 때 더 급작스럽게 땀이 난다. 그러니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던지, 그런 상황이 되면 자리를 좀 피했다가 돌아오는 방법을 취하기도 한다. 심리적 불안정이 갱년기 증상들에 좋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5.

어차피 부끄러울 일도 아닌데 뭘 그렇게 숨기면서까지 증상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 걸까.

그냥 싫은 것이다. 내가 이만큼 나이가 들었고 노화의 증상을 앓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당당한 나이 듦이 쿨하다고 생각하지만, 주름과 흰머리를 보여주는 것과 갱년기로 인한 증상들을 오픈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감정적 변화가 끼어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널뛰는 감정 변화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버거울 때가 있다. 이것이 호르몬 급감으로 인한 자연적 노화증상임을 알면서도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미성숙함처럼 느껴져 스스로를 비난하게 된다. 그럴 필요 없다는 얘기를 아무리 들어도 자책감은 떨쳐내기 힘들다.


아마도 그게 밝히고 싶지 않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누구나 공감할만한 상황에서 분노를 표출하거나 슬픔을 드러낼 때조차도 그것이 갱년기 히스테리로 받아들여질까 봐 두렵다.


6.

외할머니도 오랫동안 줄줄 흐르는 땀을 닦아내다 못해 아예 목에 수건을 두르고 지내셨다고 한다. 큰 이모도, 엄마도, 작은 이모도 모두 쉰이 될 무렵에 호르몬제를 먹기 시작했다. 아마도 가족력 때문에 내 갱년기는 떠 빨리 심하게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이 듦을 그냥 받아들이라고, 엄마와 이모에게 입바른 소리를 했던 내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것이 딱 요즘의 나다. 그러면서도 당신들 힘들었던 얘기만 줄창 늘어놓으며 당신들은 처음에 그게 뭔지도 몰라서 더 힘들었다며 이제 너는 아니까 좀 낫지 않냐고 하는 말이 듣기 싫어서 성질을 바락 피우고 출근길에 또 후회를 하는 것도 요즘의 나다.


어리석으니까 인간이고 죽을 때까지 반성하는 것이 또 인간인가 보다.

산부인과는 애 낳을 때, 몸이 이상할 때나 가던 엄마 세대는 대체 내 몸이 왜 이렇게 이상해지는지 몰랐던 시기가 꽤 길었을 것이다. 먹고살기 바빠서 운동이나 식이요법 같은 것은 꿈도 못 꿨을 엄마들에게 위로와 사과를 보내고 싶다.


엄마 말대로 나는 아니까 좀 낫다. 세상이 좋아져서 다양한 예방법도 알고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운동이라고 한다. 정말로 만보씩 꾸준히 걸으면 컨디션이 안정적이다.

물을 많이 먹는 것도 효과가 있다. 하루 종일 물을 많이 먹은 날은 수면의 질도 높아진다. (이건 의학적 근거를 찾지 못했지만 지난 1년간 내가 찾아낸 방법이다. 물 많이 먹어서 나쁠 것은 없으니 그냥 진리라고 생각하면서 많이 먹고 살 생각이다.)


실천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답을 알고 있으니 모르는 것보다 수월하다. 그쪽으로 꾸준히 걸어가다 보면 쉬워지는 날이 오겠지.

많이 걷고, 좋은 음식 먹고, 즐거운 생각하고, 걱정을 떨쳐 버릴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