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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May 18. 2024

40대, 혼잣말 자꾸 크게 한다?

세상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진 것일 수도

모처럼 친구들이 모였다.

공원과 식물원이 함께 있는 아름다운 곳에 위치한 한적한 카페에 들어갔다. 사람이 많지 않아 친절한 사장님이 천천히 주문을 받아주셨다.


"저도 아메리카노 주세요, 아, 디카페인으로 주세요. 지금 먹으면 잠이 안 와서요."


응? 그걸 왜 카페 사장님한테 말해?

옆에서 순서대로 메뉴를 부르던 우리는 쓸데없는 소리를 한 친구에게 한 마디씩 면박을 주며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래놓고는 주문한 음료를 마시며 너도나도 요즘 나타나는 이상한 증상에 대해 고백을 한다.


"사실은 나도 그래. 자꾸 묻지도 않은 말을 막 해. 옛날에 엄마가 시장 가면 물어보지도 않는데 자꾸 아줌마한테 집안 얘기를 오래 해서 진짜 창피했거든. 근데 내가 그러고 있어."


"맞아. 예전에는 모르는 사람이랑 눈도 안 마주쳤는데 요즘은 금방 친해진다. 물건 살 때 옆 사람한테 뭐 물어보기도 하고."


"난 자꾸 마음의 소리를 밖으로 말해. 회사에서 뭔가 짜증 나면 전에는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요즘은 줄줄줄 얘기하고 있어. 어제는 누가 실수해 놓고 남 탓을 하길래 속으로 욕을 했는데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이 말을 밖으로 중얼거린 거야. 누가 들은 거 같지는 않은데 자꾸 혼잣말 크게 한다. 미치겠다."


"그니까, 버스에서 엄마가 저 사람 들고 있는 가방 특이하다, 막 이런 거 다 들리게 말하는 거 너무 싫었는데 내가 그러게 생겼어."



모두들 스스로 주의했던 것들이 느슨해졌음을 알아차린다.


낯선 곳에 가면 새초롬하게 앉아있던 우리들을 이제 모르는 사람에게도 궁금한 것을 서슴없이 물어볼 수 있게 되었다. 왜 그렇게 혼자서 구시렁대는 일이 많아졌는지 내가 정말 나이가 들어서 이러는 걸까, 흠칫 놀라곤 한다.


어찌 보면 그 혼잣말은 오히려 주위를 더 많이 의식해서 하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보통 중얼거림은 유쾌할 때보다는 불편한 것들, 만족스럽지 못한 것들과 맞닥뜨릴 때 자주 발생한다. 내가 좋아서 하는 게 아닌데 해야 할 때라든가, 못마땅한 어떤 것에 대해 남들이 은근슬쩍 알아줬으면 할 때 말이다.


하고 싶은 대로 막 하는 행동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나이가 들수록 주변이 더 신경 쓰이고, 자신의 판단과 행동이 맞다고 인정받고 싶은 약한 마음을 드러내는 행위가 아닐까.



세상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진 것일 수도 있다.

다들 비슷한 생각하고,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으며 산다는 생각에, 자기를 어느 정도 드러내고 공감을 받으려는 마음도 있지 않겠나 싶다.


'이 물건 괜찮지 않아요? 날씨가 너무 좋아서 일하기 싫네요.' 이런 머릿속을 스쳐가는 하찮은 것들을 내뱉ㅇ며 꽁꽁 막아두었던 생각과 말의 통로를 느슨하게 풀어낸다.


스무 살, 서른 살 때, 옆에서 모르는 중년 여인이 이말 저말 시킬 때 성가시고 싫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그러지 말아야지 바짝 긴장이 일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런 모습들이 다 살아가는 과정이지 뭐, 라고 생각하면 움츠렸던 어깨가 다시 풀어지기도 한다.



느슨해진 나를 데리고 사는 것은 어떤 면에서 더 편리해졌다.

이겨야 하는 회의, 일을 떠넘겨야 하는 회의에 참석하면서 전장에 들어가듯 다부지게 마음을 먹고 굳은 얼굴을 보였던 태도도 이제 조금 노련해졌다.

'다들 월급 받고 하는 일인걸, 저 입장에서는 저럴 수밖에 없는 거지, 그들도 나를 이해하겠지 뭐.' 이런 마음이 조금씩 늘어간다.


지난 주말에는 스스로에게 만족한 일도 있었다.

안경 코받침을 바꿔 끼우려고 안경원에 갔다. 안경을 맞춘 곳은 집에서 한참 먼 곳이라 가까운 대형 안경원에서 부탁을 할 심산이었다. 비용을 지불할 의향이 있으면서도 혹시 싫은 기색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이런 경우 그저 안된다고 하면 나오면 될 것을 몇 번을 망설이는 편이었다. 하지만 마흔여섯의 나는, 이제 딱 한 번만 망설이고 물어볼 수 있는 내공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이런 못난 면이 좀 있다.)


"고객님, 저희 집에서 맞춘 안경이실까요?"

"아, 그건 아니에요."

"네, 그럼 천 원이 부과되는데 괜찮으실까요?"

"그럼요, 감사합니다."


아마 안되다고 했어도 알겠습니다,하고 자연스럽게 나왔을 것이다. 이렇게 부드러운 질문과 요구를 어떤 스무 살은 당차게 할지 모르지만 나는 40년이 넘게 걸렸다. 어제의 나보다 나아졌다.


첫 대면에서의 어색한 인사말이 자연스러운 웃음과 다정한 노크 토크로 발전한 것도, 요구하고 거절당하는 것을 담담하게 할 수 있게 된 것도, 내가 사는 사십 대가 주는 괜찮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사십 대의 좋은 점들에 미소를 보내본다.


엄청나게 꽃 사진을 찍어대는 것도 물론 40대 증상 중 하나다.




2023년 4월 '내가 사는 40대'에 실었던 글을 편집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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