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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흑백필름 Jul 09. 2022

그냥 조금 달렸을 뿐인데


공원은 하나의 우주다. 

태양을 도는 행성처럼 해크니 공원 중앙에 있는 거목을 중심축으로 삼아 나는 반복해서 달린다. 


인력(引力)과 반발력이 조화를 이룬 원심력으로 나는 관성의 법칙에 따라 공원 갓길을 하염없이 달린다. 등골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종아리 뒷근육이 욱신거리며, 심장이 터질듯한 상태 속에서 무념무상의 멍한 상태로 앞만 보고 달린다. 스쳐 지나가는 별처럼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연인,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속에 나와 같이 행성처럼 공원을 뛰는 무리가 있다. 


행성의 공전과 나의 달리기가 다른 점은 행성은 우주의 탄생과 함께 수억 년 전부터 달렸고, 나는 이제 막 달린 지 20일이 지났다는 것이다. 황지우 시인의 '살찐 소파의 일기'의 표현처럼 나는 사무용 의자와 하나가 되어 내가 의자인지, 의자가 나인지 헷갈리는 상태에서 컴퓨터 앞에서 열 개의 손가락만 톡톡거리며 나의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는 삶을 살고 있다. 두 다리를 비롯한 나의 몸뚱어리는 열 개의 손가락이 집에서 사무실로 안전하게 옮기는 이동수단에 불과하다. 


그 외 내 몸이 하는 일이라곤 내일이라도 전쟁이 날 것처럼 비어 있는 곳마다 비곗덩어리로 꽉꽉 채워 비상시 에너지 공급원 창고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의 이성은 지금이 수렵시대와 농경시대를 지나 최첨단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가뭄이나 홍수로 인한 기근으로 굶어 죽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몸을 더 이상 에너지 저장창고로 사용하지 않아도 인류는 이미 놀라운 건조기술과 냉동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10분 이내 거리에서 화폐라는 걸 통해 식량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며, 집에는 성능 좋은 냉장고가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이성의 통제력을 잘 따르지 않는 내 몸이 25만 년 선조들의 유물과 관습을 계승하고 있을 뿐이다. 


대학을 입학한 둘째 녀석이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산 준 애플워치를 차기 전까지는 나는 내 몸 상태가 20년 전과 동일할 거라는 환상 속에서 살았다. 요 몇 년 몸을 제대로 안 움직여서 그렇지, 한번 운동했다 하면 금방 머슬핏을 소화할 수 있다는 판타지 속에 살며 미국 자동차처럼 연비는 나쁘면서 나날이 무겁고 느려지는 낡은 이동수단이 되어 엉금엉금 집과 회사와 술집을 옮겨 다녔다. 그리고 주말마다 빈틈없는 빽빽한 창고에 비곗덩어리를 계속 만들어서 쑤셔넣었다.


2달 전쯤 밤, 자려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는데, 제어장치가 고장난 피스톤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걸 감지한 순간, 나의 판타지 영화가 끝날 순간이 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애플워치에 심빅수를 측정하는 놀라운 기능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그때부터 나의 심박수를 측정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두 번씩 수시로 심박수가 80에서 150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며, 처음에는 애플워치의 부정확성을 의심하다가 결국 나의 심장 상태가 찌꺼기가 잔뜩 낀 싱크대 배관처럼 오작동이 빈번한 아주 불량한 상태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적 여유를 핑계로, 내일부터, 내일부터, 내일부터는 꼭!을 반복하다가 결국 이번 영국 한달살기를 기점으로 심장 하나는 제대로 다스려서 돌아가자고 마음먹고 공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빌린 런던 달스턴의 숙소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해크니 공원에 들어설 때 첫 느낌은 이 넓은 공원을 한 바퀴라도 제대로 완주할 수 있을까라는 막막함이었다. 첫날은 5분도 제대로 못 뛰고 하염없이 걷다가 돌아왔다. 스스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가며 그냥 포기할까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우리 삶의 최우선 순위는 두말할 나위 없이 건강일 텐데, 일단 하루만 더 달리고 다시 생각하자고 스스로를 다독거려가며 하루하루 거리를 늘려나갔다. 그렇게 달리기 시작한 지 20일째. 


해크니 공원에 이어 작은 정글숲이 있는 '런던 필즈 리도' 공원과 공원 내 호수가 예쁜 '클리솔드' 공원, 그리고 자연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규모의 '빅토리아' 공원까지, 좀 더 먼 우주까지 공원 탐험을 떠나보기도 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처음엔 1km도 제대로 못 뛰었지만, 오늘 아침에 6km를 쉬지 않고 달리고 난 후 이제 10km까지 뛰어 보겠다는 야심찬 목표도 세웠다. 


8기통 자동차처럼 콧구멍이 여덟 개쯤 달렸으면 좋겠다는 망상을 하며 펑퍼짐한 반바지를 입고 헉헉대며 공원을 달리는 중년의 동양인이 생각하는 비교 대상은 오직 하나다. 기름기가 도는 것처럼 윤기 있는 긴 다리로 바람을 일으켜가며 시원하게 옆을 추월하는 흑인 남성도 아니고, 에슬레저룩으로 금발을 휘날리며 발끝으로 피아노 건반을 치듯 경쾌하게 달리는 백인 여성도 아니다. 허리춤에 강아지 줄을 걸고 강아지보다 더 빠르게 공원을 가로지르는 이들은 더더욱 아니다. 


비실비실 땀을 흘려가며, 무거운 다리와 봂품없는 자세로 앞을 향해 달리는 동양인의 목표는 오직 하나, 어제보다 한 걸음만 더 달리자는 것이다.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 무념무상에 빠져 한참을 달리다보면 뒤죽박죽 된 복잡한 머릿속 생각 중에 삶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소한 고민은 채로 걸러지듯 다 사라지고, 삶에 진짜 중요한 문제만 발가벗겨져 온전히 살펴볼 수 있다. 생각이 정리되고 지금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게 뭔지 툭 튀어나온다. 


나는 내 몸을 통제할 수 있으며, 두 다리를 이용해 달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긴다. 계획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직접 내 몸을 움직여서 땀을 흘리고 있다는 현상에 안도감과 함께 자신감이 붙는다. 사무용 책상에 앉아서 하염없이 녹슬고 있는 기계가 아니라 펄떡펄떡 살아 숨 쉬는 인간이라는 느낌이 좋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렇게 겨우겨우 버티면서 달리다가 마침내 어제의 거리를 뛰어 넘었을 때, 비록 그것이 본인 외에 객관적인 시선으로는 사소하기 그지없더라도, 스스로는 나의 끈기와 인내심과 도전정신과 실천력 그리고 위대함에 탄복을 하며, 나는 강하며 지금 잘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심장 한구석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애플워치에서 우주 탄생을 상징하듯 불타는 링 애니메이션과 함께 '신기록을 달성했습니다' 문구가 나오는 순간, 오늘도 꽤 괜찮게 하루를 시작했다는 충만감을 만끽하며 마냥 행복해한다.


그냥 조금 달렸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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