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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흑백필름 Apr 16. 2023

잘한다고 말해줄래요?

겨울을 대비해 도토리를 열심히 모으는 다람쥐처럼, 인간은 기억의 소멸에 대비해 열심히 휴대폰의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그리고 다시 보지 않는다. 한가할 때 봐야지 생각하지만 한가한 순간은 오지 않고, 그 한가한 순간이 와도 그 시간엔 다른 걸 한다. 나 역시 그렇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애플은 '추억 사진 알림'이라는 놀라운 기능으로 과거의 추억과 다시 만날 수 있게 도와준다. 특히 아이들의 어릴 적 사진이 추천으로 뜰 땐 순간 그 당시 기분에 젖는다. 아내와 그 사진을 공유하기도 한다. '이때 애들 참 예뻤지?' 이러면서.


얼마 전 결혼은 했으나 아이를 갖지 않은 딩크족(DINK; Double Income, No Kids) 부부를 연달아 만난 적이 있다. 두 커플 모두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으며, 아이가 생겼을 때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자유과 취미생활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데 만족하고 있었다.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르고 모든 선택에는 그걸 하지 않았을 때 기회비용이 발생하는 법. 아이를 갖지 않음으로써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아이와 함께 할 때 얻을 수 있는 걸 포기해야 만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아이를 가졌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가치는 무엇일까?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아이를 통해 어떤 가치와 보람을 얻었나? 그러다가 문득, 아이들이 어릴 적 내가 얼마나 자신만만하고 충만한 감정 속에 살았는지 깨달았다. 그 감정의 원천은 '인정욕구'였다.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뭔지 알 수 없는 결핍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더 이상 나에게 '아빠 정말 대단해요!'를 외치지 않았다. 내가 보여 준 마술도 '눈속임'으로,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도 '뻔한 이야기'로, 내가 하는 농담도 유치한 '아재 개그'로 폄하되었다.


한 때 나는 위대했다. 아이들이 어려서 세상을 하나씩 배워나갈 때 아빠인 나는 영웅 그 자체로 받아들여졌다.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아이들은 감탄하며 경이로운 반응을 보였다. 호기심이 가득한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의 모든 행동에 진심을 담아 온몸으로 나의 위대함을 찬양해 주었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나는 늘 기세등등하고 자신만만한 영웅이었고 아이들은 그것을 '인정'해 주었다. 비록 그것이 한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이라는 작은 공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고, 대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가면 그냥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한 명의 가장에 불과할지라도.


당시에는 아이들이 예쁘고 기특하고 사랑스러워 고생스럽더라도 키우는 보람이 있다고 여겼는데, 사실 아이는 재롱의 역할보다는 부모의 인정 욕구를 채워주는 역할을 더 잘한다. 경험해 본 사람은 모두 알 것이다. 아빠의 사소하고 평범한 행동에도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키우면서 '우와 아빠 대단해요. 우리 아빠 진짜 최고예요!'를 외칠 때 얼마나 가슴 벅찬지.


아이가 자라고 더 이상 아빠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1/N이라는 걸 깨닫게 될 때쯤 아이는 아빠보다 친구와의 시간을 더 즐겼다. 그 인정의 대상이 가족에게서 친구로, 책이나 미디어에 나오는 그 어떤 누군가에게로 옮겨갔다. 그리고는 아이들은 인정의 목소리를 더 이상 나에게 들려주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학 생활에 취해서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다가 겨울 방학을 맞아 시골 고향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적잖게 놀랜 적이 있다. 과수원에 겨울 퇴비를 뿌리고 돌아오는 아버지를 마중 나갔는데, 그 거대했던 아버지의 체구가 너무 작고 왜소해 보였다. 건장한 골격에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힘을 자랑하던 나의 아버지는 그곳에 없고 힘겨운 노동에 찌든 지친 장년의 작은 남자가 서 있었다. 석양을 뒤로하고 아버지와 함께 돌아오는 길에 가슴 한 편을 서늘한 찬 바람이 쓸고 지나갔다. 그날부터 아버지는 나에게 평범해졌다.


나의 아이들은 그 순간이 진작에 찾아왔을 것이다. 아빠가 더 이상 위대하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 아이들의 인정은 줄어들게 되고, 세상 모든 아빠는 영웅에서 평민으로 추락한다.


꽤 오랫동안 이해를 못 하다가 나이를 먹고 난 뒤에 겨우 깨닫게 된 것 중의 하나가 똑똑한 사람들이 비논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역사나 정치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히틀러나 조직폭력배나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더라도, 리더의 의사결정에 비합리성이 존재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그 결정을 따르고 그 사람을 위해 일을 한다. 그것도 진심을 다 바쳐서. 우리나라 정치에서도 그런 모습이 자주 보인다. 자주 보이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을 때가 적다. 왜 사람들은 합리적이지 않은 판단을 하고 그런 사람을 따를까.


사마천의 사기에는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 여위열기자용(女爲悅己者容)이라는 말이 나온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한다는 뜻으로 인간의 본성을 잘 표현한 말이다. 사람은 정의에 목숨을 거는 줄 알았으나, 사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건다. 정의는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사람과 무시하는 사람은 딱 둘로 나눠진다.


이를 잘 알고 있음에도 인정은 언제나 어렵다. 201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날 한창 바쁠 때, 회사의 포토그래퍼가 상담을 요청했다. 본인이 촬영한 사진에 내가 단 한 번도 진심 어린 인정을 하지 않았는데 꼭 한 번만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제 사진이 뛰어나다고 한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왜 그 인정을 나한테 받으려고 하는 거지?"

"한스가 회사의 대표잖아요. 대표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제가 일하는데 보람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당시 나는 뭐라고 말했던가. 그 친구에게 객관적인 사실을 기반으로 조언을 해 주었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왜곡될 수 있지만 당시 이런 뉘앙스로 말했던 거 같다.


"아마추어는 타인의 시선과 타인의 인정을 위해 일을 하지만, 프로는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느냐를 가지고 일을 한다고 생각해. 나는 A(가명)가 자신이 세운 기준에 맞춰 일을 하기를 바라지 나의 인정을 원하면서 일하는 걸 바라지 않아."

"그 의미는 알겠는데, 그래도 단 한 번만이라도 저의 사진을 인정해 주실 수 없나요? 한번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요."

"미안하지만 A. 나는 그럴 수 없네. 그건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은 행동이야."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전 이 회사를 계속 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그 친구의 실력이 탁월했다면 나는 쉽게 인정을 해 줬을까? 아마 그랬을 거 같다. 하지만 A의 사진도 꽤 괜찮은 편이었다. 성실했고 더 잘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인재였다. 나는 왜 그 당시 "사진을 잘 찍는다"는 그 인정을 해주지 못하고 인색하게 굴었을까? 이 사건은 그 이후로 문득문득 내 머릿속에 떠올라 인정 욕구가 정말 중요하다는 걸 상기시켜 주었다. 나처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자존감이 높은 부류가 있고, A처럼 타인의 인정을 통해 자기 존재를 재확인하려는 부류가 있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 같은 부류 역시 인정에 취약하다는 것도 인정하게 되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인정에 목말라 있다.


그래서 다시 2018년 크리스마스 이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그때보다 조금 더 넓게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게 된 나는 그냥 인정해 줄 거다.


"A의 사진은 특별하지. 온 정성을 담아 찍은 걸 난 잘 알고 있어. 우리 회사가 계속 성장할 수 있는 건 A의 사진 덕분이야. 게다가 사진도 나날이 나아지고 있어. 지금처럼 계속 더 잘 찍으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 줘."


이렇게 시원하게 인정해 줄 거다. A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캐치해서 바로 해 줄 거다. 물론 최대한 사실에 부합해서. 타는 목마름 상태에서 찔끔찔끔 생명을 부지할 정도의 인정의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마르지 않는 오아시스처럼 인정의 샘물을 공급해 줄 것이다.  


그런데 왜 인정해 주는 게 어려운가?


인정은 상대방의 기대치를 넘어설 때 주어진다. 나의 기대치가 아니라 평가를 하는 상대방의 기대치가 기준이다. 그 기준은 제각각이다. A가 사진이 아니라 노래를 부른 후에 인정을 해 달라고 했으면 나는 '노래 정말 잘 부른다'며 흔쾌히 인정을 해 줬을 수도 있을 거다. 다만 나는 사진을 어깨너머로 배웠고, 좋은 사진을 많이 봤고, 사진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편이었다. A는 사진을 잘 찍었지만 내가 원하는 기대치에는 조금 못 미쳤다.


무엇보다 고객의 기대치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물에 인정이 더해지면 결국 제품과 서비스의 수준이 하향평준화될 우려도 있다.


인정의 기준은 개개인마다 다를 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고 주변 환경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동네에서 공 좀 찬다고 인정받았던 수많은 축구 꿈나무들이 위로 갈수록 냉엄해지는 혹독한 비판을 견디지 못하고 좌절한다. 어릴 적 신동 소리 들으면 인정을 한껏 받던 아이도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성적표를 받아 들고 좌절한다. 인정의 기준은 멈춰 있는 게 아니라 갈수록 더 높아진다.


매 순간 인정의 커트라인을 뛰어넘어서 인정이 이어지더라도 그 포만감은 빠르게 초기화된다. 아침 먹고 잠시 지나면 배고프고, 점심 먹고 돌아서면 배고프듯, 인정은 오래 유지되지 않고 잠깐 우리를 기쁘게 했다가 바로 사라지고 허기지게 만든다. 맨날 먹는 구내식당에는 감흥이 없듯 비슷한 맛의 인정은 식상해져서 더 이상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 새로운 맛집을 찾아 나서듯 새로운 인정을 갈구하게 된다. 인정은 받기도 힘들지만 잘해주기도 만만치 않다.


이렇게 인정은 어렵지만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아이를 통해 이를 확신한다. 얼마 전 한국 출산율이 0.78명까지 떨어져서 다양한 저출산 대책이 나오고 있다. 출산 지원대책과 각종 경제적인 지원 정책들이 제안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출산율에 둔감한 편이다. 그 근간에는 지구상에 인간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중학교 때 전 세계 인구가 50억 명이라고 배웠는데, 어느새 80억 명을 넘겼다. 80억 명이 공존해 가며 살기에 우주에 떠돌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은 너무 작고 품고 있는 에너지는 유한하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숫자가 현 상태에서 멈추거나 조금 더 줄어들면 인류의 연속 가능성이 더 높아지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를 갖는 쪽을 선호한다. 아이가 탄생하면 부모는 그 작은 생명체를 통해 놀라울 정도로 인정 욕구를 채울 수 있게 되고 내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깨닫는 신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일말의 의심도 없이 완벽하게 진심이 담긴 눈빛으로 엄마, 아빠의 위대함을 바라보는 그 어린 생명은 내가 he 또는 she로 불리는 평범한 한 명이 아니라 세상에 유일무이한 특별한 I가 되게 만들어준다. 그것이 인정의 힘이다. 아이를 갖지 않을 때 누리는 자유의 가치와 아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인정 욕구의 가치를 달아보면 인정의 추가 좀 더 무거울 것으로 확신한다.


리더는 사람의 마음을 사는 직업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직업이다. 인정은 그걸 가능하게 하는 놀라운 묘약임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그동안 너무 인색했다. 아이폰의 추억 사진 알림을 통해 인정의 가치에 대해 다시 되돌아본다.


이미 왜소해진 아버지를 만나면, 그 연세에도 잘 걷고, 잘 드시고, 잘 지내시는 걸 인정해 드리고

회사 구성원들에게는 장점을 찾아서 인정해 주고

이미 성인이 된 아이들에게는 존재 자체가 기쁨임을 인정해 주며

주변의 만나는 사람 모두를 인정해 주는 것.


머릿속으로는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려운 이것들을

잘 해내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나 자신을 인정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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