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핑커 / 사이언스북
세상에 이보다 못난 책표지가 있을까! 가난한 출판사가 무명작가의 첫 책을 내려고 비용을 줄이느라 표지에 쓸 돈이 없는 경우라도 이보다는 나을거다.
책을 싸고 있는 커버는 핑커의 옆면 얼굴 사진이다. 무슨 뜻이지? 거북목 아저씨? 공부는 힘들다? 핑커의 얼굴만 들이밀어도 책은 알아서 팔린다? 공부 많이 하면 거북목에 디스크 걸리고 흰머리난다?
커버를 벗기면 표지에 여섯 개의 직사각형이 있다. 문자는 제목뿐이다. 이 또한 난해하지만 그래도 커버보다는 낫다. 적극적으로 읽어주려 마음먹으면 이 도형들을 계단을 형상화한 것으로 봐줄 수 있고, 이것은 바로 핑커가 역설하는 낙관이고 세상은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마뜩찮는 표지다.
책 내용이라도 좋았으면 했는데 그나마도 아니다. 많은 데이터를 이용해서 바로 지금이 인류가 지내온 수만 년 역사에서 가장 잘 먹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평화로운 세상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고 이 멋진 세상을 위협하는 것은 뉴스 미디어와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콕 찍어서 지목한다. 그리고 TV를 끄고 뉴스를 멀리하고 폰 끄고 살라고 소셜미디어를 그만하라고 채근한다. 음, 그럼, 그 다음엔 핑커 당신 말만 들으라는 이야긴가? 그가 사용한 수많은 통계는 과연 옳은가? 세상은 좋아지고 있다는 핑커의 주장을 믿을 수 있고 정당한 것일까?
그가 가장 가난한 나라도 굶어 죽을 위험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때 사용한 빈곤선의 기준이 하루 1.9달러다. 과연 인간의 생존을 위해 타당한 금액인가? 생존은 그냥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되는건가? 그렇게 살아 남아서 잘 사는 사람들을 위한 산업예비군이 되는게 옳은가? 아무리 각국의 구매력지수에 따라 돈의 가치가 달라진다고 해도 하루에 1.9달러로 사는 사람들을 보며 저들의 삶이 좋아졌으니, 지금은 태평성대이고, 우리는 하던 대로 그대로 하면 된다고 말해도 되는 것인가?
그의 주장은 미심쩍음을 넘어 위험하다. 1.9달러로 하루를 사는 사람들을 그곳에 묶어 놓는 대신에 지금 돈과 권력을 가진 국가나 사람들을 옹호하고 변화를 거부하기 때문이고, 결국 인종주의와 신자본주의를 위한 성을 쌓기 때문이다.
핑커의 행보를 보면 안타깝다. "빈 서판"에서의 보여준 날카롭고 통렬한 분석이 없어지고, 나이 들어가면서 그의 말과 글이 허술해지기 때문이다. 부디 계속 뭔가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내려 놓고 한 몇 년 고향 퀘벡에 돌아가 요트나 타고 인생을 즐기다가 꼭 할 말이 생겼을 때 돌아왔으면 좋겠다. 뭐, 안 돌아와도 괜찮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