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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Sep 27. 2021

파도를 기다리는 마음

가을 문턱 제주에서 생각한 것들

하늘이 깊어지고 초저녁 공기가 선선해지는 9월, 계절이 무색하게 '여름휴가'라는 명목으로 제주엘 다녀왔다. 생각해 보면 늘 가을마다 제주를 찾았다. 지난해에는 코 끝이 시려지는 늦가을 동생과 함께 엄마를 모시고, 재작년에는 그때 만나던 사람과 이 섬에 짧게 머물렀다. 그보다 더 전에는 자전거로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여행을 한 적도 있었다. 중간에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완주를 얼마 안 남기고 병원 신세를 졌지만.


이번 여행은 그중에서도 특히 충만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제주의 바다를 생생하게 느끼고 왔기 때문이다. 매년 여름이 지나 제주에 온 탓에 해수욕을 해본 적이 없는데 올해는 그걸 했다. 한낮에는 태양이 뜨겁기도 하고 수영을 배우며 물놀이에 대한 자신감이 붙은 덕도 있다.


첫날 내가 찾은 바다는 제주의 동쪽에 위치한 세화 해변이었다. 때론 투명한 에메랄드 빛깔로, 때론 심연을 가늠할 수 없는 짙은 푸른 빛깔로 일렁이는 그런 바다였다. 날이 더워 수영복을 입고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나 역시 사람들 틈에 껴 바다수영을 즐기다,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생각 없이 바라보다가를 반복했다. 깊이 잠영해 물속에서 반짝이는 햇빛을 구경하던 순간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동쪽에서 해수욕을 한 다음날에는 남쪽으로 달려가 색달해변에서 서핑을 했다. 중문에 있는 색달해변은 국내의 여느 바다와 달리 힘 있고 단단한 파도가 쳐 '서퍼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곳이다. 명성에 걸맞게 이미 많은 서퍼들이 보드 위에 앉아 파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도가 세지 않아 서핑을 하기 좋은 날은 아니었지만 나 같은 초보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파도에 몸을 맡겨 일어서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러갔다.


바다를 바라보고 소금기  바닷바람 냄새를 맡고 파도를 온몸으로 느낄 . 그때야말로 내 안의 자유로움이 깨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수영과 서핑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이미 난 내가 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특히 깊이 잠수했을 때 물살이 몸을 감싸는 감각, 그걸 뚫고 유영하는 감각을 좋아한다. 다른 세계에 온 듯한 물속의 고요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최근에는 프리다이빙 자격증도 땄다. 더 깊은 물속 세계가 궁금해서다.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바다를 닮아있다. 지난해 강릉에서 만난 서퍼들에게서 그걸 느꼈다. 충동적으로 떠난 그곳에서 만난 서퍼들은 바다를 바라보고 파도를 기다리는 게 하루의 일과였다. 파도가 없는 날이 계속된다고 해서 짜증을 내는 법도 없었다. 그런 날에는 수영이나 윈드서핑을 하며 다른 방식으로 바다를 즐기면 됐다. 그렇게 넉넉한 마음으로 파도를 기다릴 뿐이었다. 물론 그들이 까만 피부 위로 눈을 가장 반짝이는 때는 서핑보드를 옆구리에 낀 채 바다로 달려 나갈 때였다. 파도 위를 멋지게 미끄러지고 그러다가 형편없이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보드 위에 올라타 끝없는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바로 그때. 그럴 때 그들은 파도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강릉에 머무는 서퍼 중에는 타지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바다가 좋아 무작정 여기에 머물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도시와 사뭇 다른 이곳의 리듬에 적응해 가는 게 두렵다고도 했다. 누구보다 자유로워보이는데, 의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에겐 매 순간이 선택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고 자란 도시를 등지고 그곳의 속도대로 살길 거부한 이들은 어쩌면 자신이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끝없이 저울질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만 그런 불안을 안고도 이곳에 머물길, 바다를 똑바로 응시하고 파도를 기다리는 삶을 살길 선택했을 뿐이다.


서퍼들과의 만남 이후 처음으로 도시가 아닌 다른 곳에서의 삶을 꿈꾸게 됐다. 숨 막히도록 빠른 도시의 리듬에서 벗어나 넉넉한 마음으로 파도를 기다리는, 있는 줄도 몰랐던 그런 삶. 몸과 영혼이 충만해지는 순간에 헌신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용기, 언젠가 나 역시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모르는 일이다. 삶은 길고 바다는 늘 그곳에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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