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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Oct 11. 2021

술자리가 끝난 뒤

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탔다.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노선이어도 이 시간만큼은 자리가 넉넉하다. 다행이다. 서 있을 기운이 없는데.


창밖에선 가로등이나 신호등, 자동차 라이트가 뿜어대는 온갖 빛들이 고인 빗물에 비쳐 일렁이고 있었다. 어제는 흔해빠진 거리를 걸으면서도 비가 내린다는 이유만으로 영화 속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비가 그친 도시의 반짝임이 눈 감는 데 방해만 된다.


어제는 좋아하는 언니를 만났고 오늘은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사람들과 술을 마셨다. 어제는 언니와 헤어지자마자 언니에게 받은 엽서를 읽으며 눈물이 났는데 오늘은 검열하는 태도로 오고 간 말을 하나씩 곱씹어본다. 술에 취해서 나를 지나치게 드러내지는 않았나? 나도 모르게 입방아에 오를만한 말실수를 한 건 아닐까? 그 사람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한 데는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닐까? 술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따라붙은 호프집의 기름 냄새처럼 성찰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언제나 헤어진 후에야 많은 게 분명해진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바로 그 순간보다도, 혼자가 되어 집에 돌아갈 때 떠오르는 감정들이 이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사람들과 어울려 왁자지껄 떠들었는데, 그 순간에는 여러 사람이 모였을 때 만들어지는 특유의 호르몬과 에너지 덕분에 즐거운 것도 같았는데, 막상 버스에 올라타 이어폰을 끼면 쓸쓸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때서야 오늘의 나는 지쳤다는 걸, 사람들 틈에 있어도 외로웠고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는 걸 안다. 언제 어디서든 적당히 장단과 분위기를 맞출 줄 아는 사회인이 되어갈수록 진짜 내가 느끼고 있는 게 뭔지 헷갈리게 되는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을 오래 묵혀둘수록 하고 싶은 말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버스에서 내려서는 집으로 곧장 들어가 따뜻한 물에 몸을 씻었다. 어제는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밤새도록 거리를 걷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오늘은 빨리 눈을 붙이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나를 함부로 오해하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묵혀둔 비밀을 기꺼이 들키고 싶은 사람들과 오래오래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날을 곱씹어보며 머리맡에 쌓아둔 엽서를 읽다가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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