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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Nov 08. 2021

"이모, 우리 비밀 이야기하자"

며칠  다섯  조카 대추의 집에 놀러 갔을  일이다. 텔레비전을 보는  마는  하던 대추가 설거지를 하는 언니의 눈치를 잠시 살피더니 내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고사리손으로 입을 엉성하게 가린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이모, 우리 방에 가서 비밀 이야기하자.”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비밀 이야기라니. 대추가 나에게 비밀 이야기를 하자고 하다니! 누구든 비밀을 나누는 순간 관계의 세계는 급속도로 단단해지고 깊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바로 비밀의 마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추는 내게 진정한 우정의 손짓을 보낸 거나 다름없었다. 이 사실은 나를 매우 흥분시켰는데, 그간 아이의 환심을 사기 위한 갖은 노력에도 우리의 관계는 일방적이었기 때문이다. 대추는 나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대추와 처음 나누는 비밀. 깊이 묻어둔 그 어떤 이야기라도 기꺼이 꺼내 보이겠다.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대추를 따라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섰을 땐 이 작은 아이가 가진 비밀이 뭔지 궁금해 안달이 났다. 요동치는 마음을 숨기고 조용히 방문을 닫자 그제야 대추는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이모, 나 뽑기하고 싶은데…”


말꼬리가 망설임으로 흐려졌지만 하려는 말이 뭔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고 함께 뽑기를 하러 가자는 거였다. 맞다, 500원쯤 넣고 레버를 돌리면 장난감이 든 캡슐이 랜덤으로 나오는 그 뽑기. 언니는 대추에게 뽑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요행이 유일한 변수인 게임만큼 중독되기 쉬운 게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금지된 것만큼 구미가 당기는 것도 없지. 얼마나 뽑기가 하고 싶었을까. 그런데도 엄마를 속이자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는 아이가 깜찍했다. 그런 거짓말쯤 우스운 어른으로 커버린 내가 나서야 할 때다. “문구점에 뽑기 하러 갈까? 엄마한테는 놀이터 갔다 오겠다고 할게.”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어낸 대추는 작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장난스레 키득거렸고, 나는 곧바로 작전을 개시했다. “우리 놀이터에 다녀올게!” 그렇게 우린 놀이터에 나가는 척 옷을 챙겨 입고 뽑기를 하러 달려 나갔다.


우여곡절 끝에 뽑기 앞에 선 대추는 신이 나서 뽑기를 계속 해댔다. 뭐가 나올지 기대하며 캡슐을 열고, 그렇게 뽑은 장난감에 대해 신나게 떠들다가 싫증을 내고, 다른 것도 뽑자며 다시 동전을 넣길 10번이나 반복했다. 가진 돈이 모두 동난 후에도 여운이 가시지 않은 우리는 손에 넣은 공룡과 거미, 포켓몬스터 장난감을 가지고 놀이터로 향했다. 그러고는 장난감들을 편 갈라 전투를 벌였다. 대추가 가진 장난감의 전투력이 월등히 강해 싸우는 족족 패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치열한 전투의 막이 내리고 놀이터에 긴 그림자가 드리우는 때. 뛰놀던 아이들은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있건만 바지를 털고 일어서는 대추의 행동은 어딘가 느렸다. ‘집에 가기 싫은 건가?’ 추측도 잠시, 손에 한가득 쥔 장난감을 골똘히 쳐다보는 걸 보니 고뇌의 시간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놀이터에서 놀다 온 줄 아는 엄마에게 새 장난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엄마를 속였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불편한 것도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걸음을 끌며 터덜터덜 걷던 아이는 집이 가까워지자 "이모, 우리 엄마한테 뽑기 한 거 얘기할까?"라고 불쑥 물어왔다. 조그만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진실을 고백하기로 결심한 거였다. 둘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싶었던 나는 약간 섭섭했지만 그렇게 하자고 점잖게 대답했다.


얼마나 초조했는지 대추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현관에 서서 입을 열었다. "엄마 근데 나 뽑기 했어….” 물론 노련한 언니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뽑기 타령을 하던 대추가 내 손을 잡고 놀이터를 나가는 게 수상했을 것이다. 놀이터에 간다며 현금을 챙기는 내 모습도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언니는 짐짓 놀라는 척 "그랬어?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돼"하고는 혼이 날까 눈치를 보는 아이를 안아줬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대추도 뽑은 장난감에 대해 조잘조잘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작은 어깨너머로 눈이 마주친 언니와 난 아이가 사랑스러워 그만 웃고 말았다.


문득 생각한다. 자랄 일만 남은 대추는 앞으로 가족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많은 비밀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때로는 엄마마저 속이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만들어갈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자라왔으니까. 서운한 마음을 뒤로하고 다만 소망할 뿐이다. 이 아이가 언제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밀한 어른일 수 있기를. 언젠가 내게 더 많은 비밀을 나누어주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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