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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Mar 12. 2023

밴드 좋아하세요?

오감에세이: 청각

취미 밴드를 시작한 지 만 2년이 지났다. 2년이란 어떤 시간인가. 회사에 취직한 지 2년 됐다면? 아직 신입이라 한창 일 배우고 있겠지. 사람을 사귄 지 2년 됐다면? 좀 사귀었네. 취미생활을 2년 했다면? 꽤 오래 했다. 준전문가가 되고 있겠다. 대단하고 멋지다. 누가 그렇게 말한다면 난 이렇게 추켜세워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밴드에게 길어지는 업력이란 자랑이 아닌 부끄러움이다.

2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우리의 실력이 놀랄 만큼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잊을만하면 연주하고 실력이 늘만하면 쉬는 밴드이니까 그게 된다. 2년째 똑같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

"이렇게 꾸준히 못할 수도 있냐?"

"연습부족이지 뭐..."


그래도 1년째 할 땐 '그럴 수 있지. 취미인데 잘할 필요 없지!' 생각했다. 2년이 넘어가니 마음이 약간 무거워진다. 잘할 필요는 없는데.. 그래도 이럴 수 있나? 이래도 되나?!


생각해 보면 밴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 주변에 많았다. 대학생 때 친하게 지낸 친구들은 거의 그런 애들이었다. 나와 달리 걔네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데 굉장히 열심이었다. 레드 제플린 에어로스미스 오지 오스본 같은 음악을 주구장창 들었고, 지미 헨드릭스와 에릭 클랩튼 중에 누가 더 대단한 기타리스트인지를 두고 지겹게 싸웠다. 그중 두 명은 실제로 밴드를 하면서 맨날 합주실에서 사는 애들이었다. 무리에 새로운 친구가 끼면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근데 넌 무슨 음악 좋아하냐?"

"주다스 프리스트 제일 많이 듣지."

"너 음악 좀 듣는구나?"


밴드 음악, 그것도 하드록과 헤비메탈에 대한 친구들의 애정은 정말이지 맹렬한 수준이었다. 그걸 좋아한다는 사실에 어떤 자긍심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걔넨 브리티쉬록이 나약한 음악이라고 은근히 깎아내렸고 하드록보다 더한 청각적 자극을 쫓다 클래식을 들었는데 결국 하드록을 듣는다는 말을 했다. 나는 속으로 약간 웃었고 걔네 말을 누가 들을까 봐 걱정도 했다. 그런 걸 아랑곳 않는 걔네만의 세상에서 하드록과 헤비메탈은 세상 그 어떤 음악보다 위대했다.


사실 내 귀에 그 음악들은 썩 내키지 않았다. 언젠가 걔넨 많이 늙은 주다스 프리스트의 핼포드가 가죽 스키니진을 입고 공연하는 영상을 "존나 멋지다"며 보고 있었다. 나는 샤우팅 하는 나이 든 로커의 목소리 모기소리 같다고 혼자서 생각했다. 하지만 뭐라 해도 걔네가 밴드 음악을 좋아하는 방식만큼은 내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나는 변덕쟁이어서 뭐든 한결같이 좋아하는 법이 잘 없었기 때문이다. 뭘 좋아한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열렬하고 맹렬할 자신도 없었다. 좋아할 자격. 그런 게 있다면 난 속수무책 탈락일 것이다.


누구를 선망하면 잘 보이고 싶어 진다.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걔네 중 한 명이 이런 말을 했을 때 심하게 부끄러웠다.

"너 베이스 아직도 못 치더라."

"시발.. 봤냐.."

우리 합주 영상을 보라고 올려놓은 건 나인데 괜히 걔가 미워졌다. 너 보라고 올린 건 아니라고! 넌 레드 제플린이나 보라고! 그래도 걘 간만에 밴드 얘기를 하니 신이 났는지 드럼 치는 친구는 잘한다는 둥 근데 베이스가 박자감이 꽝이라는 둥 우리의 음악에 대해 한참 얘기했다.


"재밌어 보이더라."

난 걔가 젊음을 바치다시피 한 밴드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었다. 사회인이 돼서도 몇 번씩 공연했는데 오래 못 갔다.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캠퍼스에 모여 함께 청춘을 축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직장도 다르고 집도 고 사는 처지도 많이 달라져있으니까. 우리도 그날 정말 오랜만에 만난 거였다. 가죽재킷 위로 장발을 휘날리며 캠퍼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이 남자의 짧아진 머리는 몇 년째 봐도 적응이 안 됐다. 그땐 네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하드록만 들어?"

"당연하지."

"어떻게 그렇게 꾸준해? 네 앞에서는 밴드 좋아한다고도 못하겠어."

"뭘 또. 네가 좋다면 좋은 거지."

그래도 얜 여전히 멋있는 사람이어서 젠체하지 않고 이렇게나 담백하게 말한다. 그래, 내가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거지. 꾸준할 필요도 없고 잘할 필요도 없다. 조금 게으르게 좋아하는 건 어쩌면 좋아하는 걸 지키는 우리만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어떤 좋아함은 그럴 수도 있다.


밴드 음악을 좋아하기론 버금가면 서러운 하드록의 왕에게 "너도 좋아해도 된다!"며 자격을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남들이 그런 걸 왈가왈부한다면 단칼에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얘는 그런 걸 왈가왈부하지 않아도 이런 마음이 들게 한다. 선망하는 마음이란 이런 걸까? 헤드뱅잉을 하면서 샤우팅을 지르는 무대 위 이 남자의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잠깐 생각했다. 그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왁스로 반듯하게 머리를 넘기고도 고막이 터지도록 오지 오스본을 듣는 모습이 여전히 멋있으니까. 머리가 길어도 짧아도 멋있기만 한 이런 남자랑 친구여서 자신감이랄 게 생긴다. 밴드 좋아하냐구요?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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