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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식문화진흥 May 04. 2020

위어를 아시나요?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위(葦)’는 갈대다. 위어(葦魚)는 갈대처럼 길다. 갈대숲에 알을 낳는다. 위어라고 부르는 이유다. 지방에 따라 ‘우어’ 혹은 ‘웅어(熊魚)’라고 부른다. 


위어는 잊어버린 물고기들이다. 위어 혹은 웅어가 어떤 물고긴지 모르는 이들이 더 많다. “임금님이 회로 먹었던 생선”이라고 해서 잠깐 인기(?)를 얻었던 적이 있다. 그뿐, 위어는 우리 기억에서 사라졌다. 봄철 강화도에 가는 이들은 ‘위어 회’ ‘위어구이’를 보고 신기하게 여긴다. 이런 물고기도 있었구나!


‘임금님의 위어’는 ‘여우의 신 포도’다. 위어가 특별히 좋아서 혹은 맛있어서 선택한 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선택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어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다. 먼 바다로 나가는 것은 위험했다. 연안을 따라 호남에서 한양으로 오던 조공선(租貢船)도 쉽게 침몰하던 시기다. 민간의 작은 배는 멀리 나가서 물고기를 잡기 힘들었다. 깊은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을 그물도 없었다. 내륙 가까운 얕은 바다 혹은 강 하구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이 고작이었다. 


바다에서 살던 위어는 봄철 산란을 위해 연안, 강으로 거슬러 왔다. 봄철 위어잡이가 잦았던 이유다. 크기도 적당했다. 멸칫과의 위어는 멸치보다는 훨씬 컸다. 다 자란 위어는 20~30센티 정도다. 음식으로 만들기 좋았다. 위어가 산란을 위해서 서해안의 강으로 올라온다. 금강, 한강, 임진강 등이다. 한강, 임진강은 한양 도성과 가까웠다.


행주산성 부근의 한강은 ‘행호(杏湖)’다. 조선 시대에는 한강의 몇몇 지역을 ‘호수라’고 불렀다. 서울 동호대교 부근은 동호(東湖), 서강대교 무렵에는 서호(西湖), 행주대교 부근에는 행호가 있었다. 서해와 가까운 행호는 위어잡이의 주요 포인트였다. 국가에서는 행호와 경기도 서해안에 위어잡이를 관리하는 위어소(葦魚所)를 두고, 위어를 한양 도성, 궁궐에 공급했다. 

위어는 '임금님이 회로 먹었던 생선'이라 한다. 위어는 갈대처럼 길고 갈대숲에 알을 낳는다. 우어, 또는 웅어라고도 부른다.

겸재 정선(1676~1759년)은 행호에서 위어잡이 하는 경치를 그림으로 남겼다. 행호관어(杏湖觀漁), 말 그대로 행호에서 물고기잡이를 본다는 뜻이다. 영조대왕은, 겸재를 한양 도성 인근의 양천현령으로 삼았다. 양천은 지금의 서울 양천구 부근이다. 행주산성 건너편이다. 화가 겸재를 양천현령으로 삼은 것은 그를 지방관으로 삼아 통치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한양 도성 인근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림으로 남기라는 게 영조의 뜻이었다. 겸재가 한양과 한강 인근의 명소를 그림으로 남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은 지금도 전해진다. 


겸재의 ‘경교명승첩’ 중 하나인 ‘행호관어’에는 겸재의 절친인 사천 이병연(1671~1751년)의 시가 곁들여 있다.      

늦봄 복엇국이요/초여름 위어 회라/
복사꽃 가득 떠내려오면/그물을 행호 밖으로 던진다
(春晩河豚羹/初夏葦魚膾/桃花作漲來/網逸杏湖外,
춘만하동갱, 초하위어회, 도화작창래, 망일행호외)     


봄철, 잡기 쉬운 얕은 곳으로 온다. 크기도 적당하다. 서울인 한양 도성에서도 멀지 않다. 국가, 궁궐에서는 위어소를 두고 위어 생산, 유통을 관리한다. 문제는 운반이다. 


한양 도성에는 두 개의 큰 얼음 저장 창고가 있었다. 동빙고, 서빙고다. 오늘날의 동네 이름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동빙고는 미리 정해진 대로 사용하는 얼음을 보관하는 곳이다. 종묘나 여러 제사 등에 사용하는 얼음을 보관했다. 서빙고는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얼음을 보관했다. 서빙고가 동빙고보다 8배가량 컸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서빙고, 동빙고의 얼음을 궁중으로 운반, 내빙고(內氷庫)에 두고 사용했다. 


말을 타고, 서빙고의 얼음을 행호 부근의 위어소로 나른다. 위어소에서 미리 준비해둔 위어에 얼음을 채운 뒤, 다시 한양 도성의 궁궐로 나른다. 


조선 후기에는 사설 얼음창고도 있었다. 겨울철이면 사설 얼음창고에서도 한강의 얼음을 잘라서 민간 창고에 보관했다. 사빙(私氷), 사빙고(私氷庫)다. 영, 정조 시절에는 한강 변, 용산, 마포 일대의 민간인들이 마련한 얼음을 국가가 화폐를 주고 사서 사용했다. 


위어의 쓰임새는 다양했다. 대부분 젓갈로 담갔지만, 회로도 먹었다. ‘임금님이 드셨던 생선’ ‘임금님이 회로 먹었던 생선’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국왕, 궁궐이 위어만 먹었던 것은 아니다. 국왕은 여러 생선을 먹었다. 민간도 마찬가지다. 크기가 작은 위어는 대부분 젓갈용이었다. 제법 큰 것들은 얼음에 채워, 한양 도성 궁궐로 운반, 회로 먹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냉장, 냉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횟감으로 운반할 때 서빙고의 얼음을 사용했다. 운반 거리가 짧으니 가능했다. 칼 등 주방 도구도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고기를 잘게 다진 다음, 환(丸)으로 만든 ‘생선 회 환’으로도 먹었다.


위어는 국왕과 고위직들만 먹었던 생선은 아니었다. 다른 생선보다 쉽게, 많이 잡았으니 비교적 널리 먹었다. 


옥담 이응희(1579~1651년)는 왕족 출신으로 경기도 안산 수리산 자락에서 살았다. 옥담은 성종대왕의 삼남 안양군(安陽君)의 현손(玄孫)이다. 왕실의 후예이지만 옥담은 평생 수리산 자락에서 향촌의 선비로 살았다. 벼슬 없는 전원생활이었다.  


옥담의 “옥담사집”에 위어를 그린 시가 있다.(만물편_어물류_위어葦魚)     


촘촘한 그물 강물에 치니/위어 한 떼가 죄다 걸렸구나/
가는 꼬리는 은장도를 뽑은 듯/긴 허리 옥척이 번득이듯/
식칼 잡고 회를 저며도 좋고/석쇠로 구워도 좋으리라/
아름다운 이름 만인 입에 오르고/참된 맛은 집집마다 알려졌네     


만인이, 집집마다 먹었으니 위어는 흔한 생선이었을 것이다. 


옥담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문인, 시인들은 위어를 두고 많은 시, 글을 남겼다. 동포 김시민(1681~1747년)도 마찬가지. “양포(양천포구) 주인은 어딜 갔는가? 저 멀리 위어 실은 배가 돌아오는 걸”(동포집_권 5_시_행주杏洲)이라고 읊었다. 


위어는 늘씬하게 잘생긴 물고기다. 바닷가 마을에서는 운반도 필요 없으니 누구나 회로, 구이로 먹을 수 있었다. 옥담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다 겪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대였지만, 민간에서도 위어를 비교적 흔하게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위어는 젓갈로도 담갔지만 회로도 자주 먹었다. '임금님이 회로 먹었던 생선'이라고 불리웠을 정도다.


많이 잡고, 흔하게 사용하니 위어를 둘러싸고 늘 말썽이 있었다. 


위어소에 속한 어부들은 위어를 잡아 바치는 대신 여러 가지 혜택을 입었다. 병역이 면제되고, 여러 부역에서도 자유로웠다. 길을 닦거나, 건축용 재목을 벌채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국가에서는 위어잡이 어부를 위해서 별도의 농토도 제공했다.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이런 각종 혜택이 제대로 제공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0년(1618년) 4월 1일의 기록이다. 제목은 “사옹원에서 위어소 어부들의 역이 너무 과중한 폐에 대해 아뢰다”이다. 사옹원이 아뢰기를, 


위어소(葦魚所) 어부 천호(千戶) 장귀천(張貴千) 등이 본원에 소장을 올리기를, ‘평상시 어부는 5개 읍(邑)을 통틀어 3백 호였는데 1호당 전지(田地) 8결(結)을 복호(復戶) 받아서 (중략) 일체 침해하지 않았었다. (중략) 현재 남아서 그 역(役)에 응하고 있는 집은 겨우 1백여 호밖에 (중략) 복호 받는 전결(田結)은 단지 2결뿐이다. (중략) 와서(瓦署)의 땔나무와 궁궐을 조성하는 데 소요되는 재목들을 일반 백성들의 호역과 똑같이 분담시키고 있으니 (중략) 응당 담당해야 할 신역 외에 크고 작은 각종 잡역을 일반 백성과 동일하게 부과하고 있으니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것은 형세상 필연적인 일 (후략)


위어잡이 어부들에게 국가가 지급했던 농토가 줄어든 일, 임진왜란 후 어부들이 줄어든 것, 약속과는 달리 어부들을 각종 잡역에 동원한 일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국왕 광해군은 사옹원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위어소에 속한 위어잡이 어부들은 일정량의 위어를 세금으로 납부하고, 나머지는 내다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이 과정에서도 불법이 있었다. 관(官)을 사칭하고, 위어를 빼앗아 가는 이들도 있었고, 위어를 운반할 얼음 공급에도 늘 말썽이 있었다. 


“일성록” 정조 21년(1797년) 8월 20일의 기록에 위어를 둘러싼 여러 병폐가 드러난다.      


(전략) 위어소(葦魚所)를 바닷길과 연결된 길목에 설치하였는데 이른바 천호 어부(千戶漁夫)라는 자가 무뢰배를 이끌고 와서 진상 및 봉여(封餘) 물품을 가져간다고 하면서, 어망선(漁網船)이 잡은 물고기의 태반을 빼앗아 가고 빙어선에 실은 물고기를 억지로 내리게 하였습니다. 만약 뺏고 내리게 한 물고기가 다 봉진(封進)하는 물품으로 바쳐진다면야 어찌 감히 억울하다고 하겠습니까마는 (중략) 실로 저자들은 공무(公務)를 핑계로 사욕을 채우는 자들로 강민(江民)들의 생활이 이 때문에 큰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중략) 선박당 거두어들이는 것은, 대선(大船)은 30미, 중선(中船)은 20미, 소선(小船)은 10미로 규례를 정하고 1미당 가격으로 미(米) 1되를 지급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 천호가 나쁜 선례를 만들어 폐단을 끼친 것이 협선보다 지나쳐서, 어선을 운영하는 백성들이 받아먹은 쌀이 없는데도 해마다 빼앗기는 것은 선박당 수백여 미(尾)에 이릅니다.(후략)     


위어에 대한 오해도 있었다. 한반도 최초의 ‘식객’ 교산 허균(1569∼1618년)은 “도문대작”에서 위어와 준치를 혼동한다.      


위어(葦魚): 이는 준치를 말한다. 한강의 것이 가장 좋다. 호남에는 2월이면 잡히고, 관서(關西) 지방에서는 5월에야 잡히는데 모두 맛이 좋다.     


2월, 5월은 음력 표기다. 양력으로 대략 3월부터 6월 사이가 위어 계절이다. 호남 서해안은 이르고, 관서, 평안도 서해안은 늦다. ‘한강 것’은 행주대교 무렵, 양천포구 생산 위어를 이른다. 위어는 준치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자세히 보면 몸체의 모양새가 다르다. 대체로 준치가 넓고 크다. 배 부분도 다르다. 준치는 넓고, 위어는 홀쭉하다. 위어는 ‘칼날같다’는 표현이 맞다. “자산어보”에서는 ‘도어(魛魚)’라고 했다. 역시 칼 ‘도(刀)’가 있다.

 

위어와 준치, 다르지만 구별은 쉽지 않다. ‘식객 허균’이 혼동할 만하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 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 올린 한식 이야기 식사>(2017), <한국 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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