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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식문화진흥 Jul 10. 2020

우리 곁엔 언제나 오이가 있었다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오이가 나오는 중국 측 이야기로 ‘오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이는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먹었던 채소 중 하나다. 흔한 채소지만, 귀하게 여겼다. 글자로 기록하기 전에도 인류는 오이를 먹었을 것이다. 오이지로 먹고 저잣거리에서 사고팔기도 했다. 오이는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나 쉬 볼 수 있었다. 


공자(기원전 551년~기원전 479)의 오이 이야기다. “시경(詩經)_소아(小雅)_제5 곡풍지십(第五 谷風之什)_216_신남산(信南山)”의 오이다.      


(전략) 밭 한가운데 농막이 있고 밭두둑에는 오이가 열렸다[疆埸有瓜, 강역유과]
껍질 벗기고 절여서[是剝是菹, 시박시저] 조상님께 바쳤도다
자손들이 오래오래 살았으니 하늘의 보살핌을 받았음이라(후략)   

  

공자는 기원 500년 전 사람이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이다. 이때 벌써 오이는 우리 곁에 있었다. 농막이 있었고 밭두둑에서 오이를 길렀다. ‘저(菹)’는 채소 절임이다. 오이로 절임을 만들었으니 오이지다. 정확한 형태에 대한 설명은 없으나 초절임 혹은 소금 절임이었을 것이다. 


오이 절임을 조상님께 바친다고 했다. 제사에 사용했음을 이른다. “제사에 사용했으니 귀한 것”은 아니다. 모든 곡물, 채소, 짐승을 제사에 사용했다. 다만, 오이지를 콕 집어서 이야기한 것은 오이가 아주 친근한, 많이 생산되고 흔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여불위(기원전 290-기원전 235년)는 진(秦)의 관료다. 여불위의 “여씨춘추”에는 “공자가, 주나라 문공(文公)이 저(菹)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콧등을 찡그리면서 이를 먹은 지 3년 후에야 그 맛을 즐겼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저(菹)’라고 했으니, 어떤 채소로, 어떻게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김치’임은 분명하다. 이때도 오이가 있었을 터니, 오이 혹은 오이지가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좀 더 정확한 오이 이야기도 있다. 


중국 후한의 허신(58-148년)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저(菹)는 초채(酢菜)다. 과저(瓜菹)를 부르는 말이다.”라고 했다. ‘과(瓜)’는 오이다. ‘과저(瓜菹)’는 오이로 만든 신 김치, 오이지다. 어떤 방식으로 만드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오이를 재료로 한 신맛이 나는, 채소 삭힘 음식이다. ‘초채’는 신맛이 강한 채소 음식이다.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승상 조조의 5남이었던 조식(192~232년)은 ‘칠보시(七步詩)’로 유명하다. 그도 오이가 나오는 글을 남겼다.      


군자는 매사를 미연에 방지하여 혐의로운 지경에 처하지 않나니,
오이밭에선 신 끈을 고쳐 매지 않고 오얏나무 밑에선 관을 바루지 않는다.
[君子防未然 不處嫌疑間 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

“군자행” 중 일부


오이밭을 두고, 참외밭으로 번역하는 예도 있지만, 틀렸다. 참외는 ‘진과(眞瓜)’다. 오이[瓜, 과]와는 다르다. 오얏은 자두나무다. 오이밭에서 신발을 고쳐매면, 마치 오이를 훔치는 것 같이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자두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매면, 자두를 훔치는 것 같이 오해를 받을 수 있다. 군자는 모름지기 오해받을 짓을 하지 않는다. 조식은 약 1,800년 전 사람이다. 이때도 오이는 널리 재배하고 먹었던 식재료였다. 

오이는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먹었던 채소 중 하나다. 흔한 채소지만 귀하게 여겼다.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의 시 한 편은 중국의 오이에 대한 모든 기록을 넘어선다. 1801년 지은 시 “햇물 오이를 얻고 감회를 적다[得新瓜書懷, 득신과서회] ”이다.       


산의 밭에 오이 심으면 몸이 깨끗할 것이며 사기 사발에 담아두면 마음이 기쁘다네
소평이 그 때문에 제후 자리 마다했고 운경도 그 때문에 사절 자리 그만뒀지
그 일 한 번 해보려고 팔구 년을 벼르고 별러 과원 한 곳 마련할 맘 늘 가졌다가
지난해야 동(東)으로 와 황무지를 일구려고 보습 가래 없는 것 없이 모두 다 장만하고
여름만 오면 그 즐거움 누려볼 심산으로 아내와 자식에게 그 뜻 항상 말했다네
영해 땅 귀양살이 어찌 감히 한하랴만 깜박깜박 그 생각을 영영 잊을 수 없어 
오늘 아침 수시(水市)에서 외를 사 들고 와서 주인이 나를 주며 갈증을 풀라 하네
금싸라기 만진대도 마음이 좋지 않고 수정을 쪼개놨어도 상을 물릴 기분이야
취부 타갱 그야말로 색다른 별미로되 궁한 선비가 침 흘리면 그게 바로 식충이지 
오죽잖은 오이 심는 즐거움 하나도 내게는 안 주고 하급 관리나 시키다니 그 아니 너무한가     


널리 알려진 다산의 귀양살이는 전남 강진이다. 1800년 6월, 정조대왕이 승하하시고, 다산은 실각한다. 이듬해 다산은 경상도 구룡포 장기(영해)로 유배를 떠난다. 다산의 첫 번째 유배다. 이해 황사영 백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산은 다시 한양으로 압송, 재판결을 받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떠난다. 이 시는 ‘영해 땅 귀양살이’ 중에 지은 시다. 다산은, 오랫동안 오이 농사짓기를 열망한다. 여름철 오이가 열리는 풍경을 그리며, 이런저런 농사 도구도 마련한다. 집안 식구들에게도 ‘오이 농사짓겠다’고 선포를 해둔 마당이다. 


이런 마당에, 집주인이 오이를 사 와 권한다. 내가 언제 오이 먹자고 했던가? 오이 농사를 지어보고 싶다고 했지. ‘취부 타갱’은 낙타 봉우리 살 등 진귀한 음식을 이른다. 맛있는 오이를 내놓았지만, 마음은 벌써 비틀어졌다. 오이 농사를 하급 관리에게나 맡긴 터에 심사가 틀어진 것이다. 당상관 벼슬도 지낸 사대부가 오이 농사에 매달리는 모습이 애틋하다. 


시에 나타나는 ‘소평이 제후 자리를 마다한’ 것도 오이와 연관이 있다. 역시 중국 측 기록이다. 소평은 진(秦) 나라 사람으로 동릉 출신이고 ‘동릉후(東陵侯)’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다. 진나라가 망하자, 동릉은 평범한 서민으로 스스로를 낮추어 장안성(長安城) 동쪽에서 오이를 심어 가꾸고, 팔면서 생계를 이었다. 높은 벼슬을 버린 모습과 소평이 기른 오이가 아름다워서 사람들이 ‘동릉의 오이’ ‘동릉과(東陵瓜)’라고 불렀다.(사기 소상국세가)

오이가 늘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오이가 등장하는, 곤혹스러운 이야기도 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0년(1479년) 12월 21일의 기록이다. 제목은 “김승경 등이 공물의 과중함을 아뢰니 주문을 올릴 때 이를 면하도록 주청하게 하다”이다. 중국으로 보내는 공물이 과하니 이를 면제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전략)이어서 아뢰기를, “정동(鄭同)의 집사람도 말하기를, ‘정동(鄭同)이 본국(本國)으로 돌아오려고 한다.’ 합니다.” 하고, (중략) 김승경이 말하기를, “명(明)나라 사신이 만약 오게 된다면 반드시 3, 4월의 사이에 있을 것이니, 여름을 지나고 돌아갈 것이 명백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이에만 그치겠는가? 이보다 먼저도 오이[瓜]를 심었다가 익기를 기다려 돌아간 일이 있었다.” 하였다. 김승경이 아뢰기를, “신(臣) 등의 생각에도 왕직(汪直)이 새로 큰 공을 이루어 총애(寵愛)가 중국 조정(朝廷)을 기울일 정도이니, 이마 오기를 청할 듯합니다.”

     

중국 측으로는 조선 사신이 그럴듯한 자리였다. 정동이나 왕직이 서로 오기를 원한다. 사신단은, 공물도 챙기고 사적으로 뇌물도 챙겼다. 힘없는 조선으로서는 웬만한 중국 사신의 요구는 들어주었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공물을 적당히 맞추고, 대신 사적인 뇌물을 듬뿍 주는 일도 있었다. 한번 오면 쉽게 돌아가지 않고, 마음이 흡족할 때까지 머물렀다. 성종의 말대로, “오이를 심었다가 익을 때까지 머문” 일도 있었다. 


기약 없는 긴 시간, ‘오이를 심어서 익을 때까지’란 표현의 시작도 중국이다.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양공[齊襄公]이 연칭(連稱)과 관지부(管至父)를 규구(葵丘)로 보낸다. ‘규구’는 변방의 험한 수비대다. 춥고 험한 곳에서 적들과 맞서야 한다. 흔히 ‘수자리’라고 표현한다. 떠나기 싫어하는 두 사람에게 제 양공은 약속을 한다. 바로 “지금 오이가 익을 때이니, 내년, 이 무렵, 오이가 익을 때는 교대를 시켜주겠다[及瓜而代]”는 약속이다. 양공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년이 지나도 교대시켜주지 않고, 교대를 요청해도 들어주지 않자 마침내 두 사람은 반란을 일으킨다.(춘추좌씨전 장공 8년) 


이 고사를 시작으로, 오이는 외부로 나가는 벼슬아치의 임기, 기한을 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과기(瓜期), 과한(瓜限), 과년(瓜年), 과만(瓜滿) 등이다. ‘과’는 물론 오이다. 


한반도의 오이 역사도 만만치 않다. 통일신라 시대에도 오이는 등장하고, 고려, 조선을 지나면서 오이는 꾸준히 등장한다. 


드라마에서 고려 태조 왕건의 책사로 등장하는 최응은 후삼국 시대에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가 최응을 임신하고, 낳았을 때도 오이는 등장한다.      


(전략) 그의 어머니가 아기를 배었을 적에 그 집에 누런 오이 덩굴이 있었는데 갑자기 오이가 맺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궁예(弓裔)에게 알렸다. 궁예가 점을 쳐보게 하니, "사내아이를 낳으면 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이니 아예 키우지 못하게 하십시오"하였다. (후략)    

 

누런 오이 넝쿨은 시든 것이다. 시든 오이 넝쿨에서 오이가 열렸으니 기이하게 여겼을 것이다. 최응은 궁예 치하에서 왕건의 목숨을 구해주고, 왕건 치하에서 내봉경 광평시랑으로 일한다. 


고려 가요로 유명한 ‘정과정’도 오이와 연관이 있다. 정과정은 ‘鄭瓜亭’이다. 정(鄭) 씨의 오이 심은 원두막이다. ‘과정(瓜亭)’은 오이 등을 심은 후, 보살피는 원두막을 이른다.


고려 의종 5년(1151년) 내시낭중 정서는 동래로 귀양을 떠난다. 왕이 말한다. “오늘 일은 조정 의논에 몰려서 그렇게 된 것이니, 가고 난 뒤에 소환하겠다.”


조정의 의논이 그러하니 귀양을 보내지만 곧 다시 부르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임금의 소환은 쉬 오지 않는다. 귀양지인 동래에서 정서는 원두막을 짓고 오이를 기르며, 스스로 가야금을 타며 임금을 그리는 노래를 부른다. 이때 부른 노래가 바로 ‘정과정’이다. ‘정서의 오이원두막 노래’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 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 올린 한식 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익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본 칼럼은 한국음식문화 누리집(www.kculture.or.kr/main/hansikculture)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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