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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식문화진흥 Jul 20. 2020

여름 대표 과일, 수박과 참외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아무려면, 여름철 과일은 수박과 참외다. 외국 과일이 수도 없이 쏟아지지만 역시 여름에는 수박, 참외다.


일본의 엉뚱한 참외 에피소드로 ‘여름 과일, 참외, 수박 이야기’를 시작한다.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다. 일본인들은 대부분 참외의 존재를 모른다. 참외? 그게 뭐야?, 라고 묻는다. 설마, 싶지만 사실이다. 


약 50년 전까지는, 일본인들도 참외를 먹었다. 참외는 ‘마구와우리[まくわうり, 真桑瓜 혹은 단 오이, 甜瓜, 첨과]’다. 최근엔 ‘oriental melon’ ‘Korean melon’이라고 표현한다. 원래 일본 이름인 ‘마구와우리’라 부르지 않는다. 동양 멜론, 한국 멜론이라고 표기한다. 심지어는 참외를, 소리 나는 대로, ’チャメ(차메)‘로 표기한다. 외국 과일 취급이다. 


일본은 1960년대 무렵 ‘프린스 멜론’을 개발한다. 기존의 참외 품종과 서양의 멜론을 교잡한 것이다. 멜론은 부드럽고 달다. 일본인들이 좋아한다. 프린스 멜론이 참외를 대체하면서 참외는 사라졌다. 1960년대 이후의 젊은 세대들은 참외를 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존재를 모른다. 


최근, 갑자기 한국에서 참외가 수입되었다. 백화점 매대에서 ’チャメ(차메)‘로 표기한다. 참외 발음이 힘드니, ‘차메’다. 경북 성주가 2000년대 초반부터 ‘참외’를 일본으로 수출했다. 1960년대 이전에는 한국, 중국, 일본 모두 참외를 널리 먹었다. 이젠 일본은 참외를 먹지 않는다. 수입이다. 자국에서 생산하던 과일이 느닷없이 수입 과일이 된 것이다. 


참외도 여러 차례 변한다. 오래전 것과 지금 것이 같을 리 없다. 


우리 참외는 역사가 길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참외를 먹었고 기록으로 남겼다. 조선 시대에도 참외는 여러 품종이 있었다. 지금과는, 물론, 다르다. 


경기도 안산 수리산 기슭에서 평생을 보낸 옥담 이응희(1579~1651년)의 시는 참외 품종이 다양했음을 보여준다. 400년 전의 이야기다.      


참외[眞瓜] 당종과 수통은 방언이다. [唐種水筒用方言] 
참외란 이름 뜻이 있으니 그 이치 내가 알 수 있네 
몸통이 짧으면 당종(唐種)이고 몸통이 길면 수통(水筒)이라 부르지 
속을 가르면 금빛 씨 흩어지고 쪼개서 먹으면 꿀처럼 달아라 
품격이 온통 이와 같으니 서과(西瓜)란 말과 뜻이 같으리     


지금으로서는 ‘당종’과 ‘수통’이 어떤 품종인지 알 수는 없다. 글 내용을 보면 당종은 몸통이 짧고, 수통은 몸통이 길다. 그 정도다. 참외 속에는 금빛 씨앗이 많고, 맛이 꿀처럼 달다는 것은 지금과 같다. 어느 정도 단맛인지도 알 길이 없다. ‘서과(西瓜)’는 수박이다. ‘서과(西果)’라고도 한다. 중국의 서쪽, 지금의 우루무치, 투루판 지역에서 왔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우루무치, 투루판은 실크로드 상의 도시다. 아프리카, 중동 지역, 서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여러 문물이 우루무치, 투루판을 통하여 수도 중국 서안으로 들어왔다. 고온 건조한 지역이다. 각종 과일이 맛있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수박을 ‘서과’라고 부른다. 서과의 서쪽은 우루무치 일대다. 참외의 단맛을 수박의 품위 있는 단맛과 비교했다. 서역, 우루무치를 통하여 들어온 과일들은 특별히 맛있었다. 


우리도 참외를 오랫동안 먹었다. 문물의 전래는 어느 순간, 한꺼번에 일어나기도 한다. 문익점의 목화 전래, 고구마, 감자의 전래 등은 한순간에 일어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 어느 순간 나타난다. 고구마가 일본 규슈 지역에서 들어오기 전에는 한반도에 고구마가 없었다. 북방의 감자도 마찬가지다. 한순간에 전래 되었다. 고구마의 본격적인 재배는 300년, 감자는 200년 정도의 역사다.  

참외는 그렇지 않다. 삼국시대, 고려, 조선 시대에도 한반도 자생 참외가 있었다. 그 위에 외부의 새로운 품종들이 들어온다. 여러 품종이 한반도에서 서로 경쟁한다. 마치 지층을 이루듯이 하나, 둘 쌓인다.

  

노가재 김창업(1658~1722년)은 조선 사절단이었던 형 김창협을 따라 북경을 다녀온다. 그곳에서 노가재는 ‘회회국’의 참외를 만난다. ‘회회’ 혹은 ‘회’는 이슬람 혹은 아랍 지역을 이른다. “연행일기” 제4권 1713년(숙종 39년) 1월 19일의 기록이다.      


바람이 맑다. 북경에 머물렀다. 아침에 신지순이 또 생 여지 4개(生荔枝四個)를 가지고 왔는데, 이것도 정세태에게 얻은 것이라고 한다. 통관 김삼가(金三哥)가 회회국 참외 1개(回回國眞瓜一個)를 들여보냈는데, 마치 새로 딴 것처럼, 맛이 더욱 좋다.      


일기식으로 정리한 글에서 노가재는 분명히 ‘회회국 참외’라고 표기했다. 이 표현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우선, 우리 참외와는 달랐다. 더하여 중국 북경 혹은 중국의 참외와도 달랐음을 의미한다. 회교 국가, 회족의 참외라고 명시한 것은 이날 아침 먹었던 참외가 중국이나 한반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품종의 것임을 뜻한다. 


좋은 씨앗과 그에 맞는 기후라면 우리 땅에서도 자랐을 것이다. 실제 좋은 채소, 과일 씨앗을 구하면 개인적으로 조선 국내로 들여오는 일도 있었다. 


아마 참외는 여러 번 전래 되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예전 것, 새로 들여온 것이 뒤섞였을 것이다. 여러 가지가 교잡종으로 자라면서, 또 새로운 품종이 나오곤 했을 것이다. 


수박은 참외와 다르다. 전래시기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한반도 자생은 없었다. 어느 순간 외부에서 들여왔다.  


수박의 전래에 대해서는 교산 허균(1569~1618년)의 기록이 남아 있다. “성소부부고” 제26권, 설부 5_“도문대작”의 기록이다.      


수박[西瓜] : 고려 때 홍다구(洪茶丘)가 처음 개성(開城)에다 심었다. 연대를 따져보면 아마 홍호(洪皓)가 강남(江南)에서 들여온 것보다 먼저일 것이다. 충주에서 나는 것이 상품인데 모양이 동과(冬瓜 동아)처럼 생긴 것이 좋다. 원주(原州) 것이 그 다음이다.     


명확하게 표현했지만, 내용은 상당 부분 의심스럽다. 뒤죽박죽 엉터리다. 

교산의 글에서는 홍다구의 수박 전래가 홍호의 강남 수박 전래보다 앞섰을 것이라고 말한다. 틀렸다. 홍다구는 1244년 태어나서 1291년 죽었다.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의 장수였고, 이른바 부원 세력, 매국노였다. 1, 2차 일본 정벌 전쟁 목적으로 고려에 왔고 민폐가 심했다. 이때 고려의 수도 개성에 수박을 전래했을 가능성은 있다. 홍다구의 개성을 통한 수박 전래는 다수설이다. 


문제는 홍호다. 홍호는 1088년 태어나서 1155년 죽었다. 남송의 충신이다. 홍다구보다 150년 이상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홍호가 강남에서 수박을 들여왔다는 말도 의심스럽다. 홍호의 남송은 이미 강남에 있었다. 홍호는 북쪽인 금나라에 갔다가 15년간 억류된다. 그 긴 시간 동안 절개를 꺾지 않았다고 해서 남송의 충신으로 여겼다. 


홍호의 시기는 홍다구보다 앞선다. 150년이나 뒤처진 사람이 먼저 수박을 전래했을 리는 없다. 홍호는 서역이나 아랍권으로 간 적이 없다. 홍호는 북쪽인 금나라에서 억류 생활을 했다. 추운 북쪽은 수박 생산지가 아니다. 

 

위 문장만으로 보자면 교산의 서술은 틀렸다. 수박은 고려 시대 부원 매국노인 홍다구를 통하여 한반도에 전래되었다는 내용만 사실일 수 있다. 당시 왜 충주, 원주 것이 상품이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동아[冬瓜]는 긴 박처럼 생긴 식물이다. 음식 만드는 재료로 쓴다. 왜 교산이 “홍다구보다 앞서는 홍호”라고 했는지 알 수 없다.  


‘홍다구의 고려 개성 수박 전래설’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자료도 있다. 서긍의 고려도경은 1123년쯤에 출간되었다. 홍호의 시기에 겹친다. 홍다구보다는 앞선다. 이때의 기록을 보면 12세기 초반, 고려에는 아직 수박, 서과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과일에는) 능금, 청리(靑李), 과(瓜) 복숭아[桃, 도], 배[梨, 리], 대추[棗, 조]가 있는데, 맛이 별로 없고 형체가 작다. (亦有來禽,青李, 瓜, 桃, 梨, 棗. 味薄而形小)     


‘과(瓜)’라고만 이야기하고, 참외(甜瓜, 첨과 혹은 眞瓜, 진과)라고 표기하지 않았다. 능금, 오얏(자두), 오이, 복숭아, 배, 대추를 이야기하면서 참외, 수박을 빠뜨렸을 리 없다. 서과, 수박이라는 표현은 없다. 그저 ‘과’다. 아직 고려에 참외나 수박 등이 전래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홍호 시대에는 고려에 수박이 없었다고 추정한다. 

수박은 조선 시대에는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저잣거리의 풍경, 식재료 등을 꼼꼼히 기록한 옥담 이응희가 수박을 놓쳤을 리 없다. “옥담사집” 만물편_소채류에 나오는 수박[西瓜, 서과]이야기다.      


서역에서 나온 특이한 품종 언제 우리 동방에 들어왔나 
푸른 껍질은 하늘빛에 가깝고 둥근 형체는 부처 머리와 같아라 
껍질 벗기면 옥처럼 하얗고 속을 가르면 호박빛으로 붉구나 
삼키면 달기가 꿀과 같아서 답답한 가슴 시원히 씻을 수 있네


이보다 더 정확하게 수박을 이야기하기 힘들다. 옥담은, 수박이 서역, 회족의 땅에서 왔다고 말한다. 언제 들어왔는지는 옥담도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수박의 형태가 ‘부처의 머리 같다’고 했다. 수박은 둥근 형태가 아니라 타원형으로 길었다. 


수박은, 다산 정약용의 시대인 18~19세기 초반에는 이미 환금작물이 된다. 세금을 매기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다산시문집” 제4권_시_장기농가(長鬐農歌) 10장의 일부다. 


평생토록 수박을 심지 않는 까닭은/아전 놈들 트집 잡고 시비 걸까 무서워서라네
(平生不種西瓜子 剛怕官奴惹是非)     


수박은 맛있다. 내다 팔 수도 있다. 이른바 환금작물이다. 그런데 심지 않는다. 심으면 관아의 노비들이 와서 시비를 건다. 세금을 내라는 것이다. ‘장기’는 지금의 포항 구룡포 언저리다. 장기면이다. 다산이 1801년 초봄 유배를 떠났던 곳이다. 유배지에서 고달픈 농민들의 삶을 보며 기록한 시다. 이미 수박은 환금작물이 되었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 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올린 한식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용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본 칼럼은 한국음식문화 누리집(www.kculture.or.kr/main/hansikcultur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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