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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식문화진흥 Jul 24. 2020

한 때 귀했던 소금에 관하여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천일염, ‘여름 소금’이 쏟아져 나올 계절이다. 6월 날씨가 좋으면 그해 여름 소금은 질이 좋다. 6월에 챙긴 소금이 창고에서 몸을 만들었다가 7, 8월에 시중으로 나온다. ‘소금 발이 좋다’는 여름 소금은, 소금 굵기가 적절한 것을 말한다. 


날씨가 뜨겁지 않은 계절의 소금은 발이 잘다. ‘싸라기 소금’이라고 했다. 한여름 염전에서 나오는 소금은 발이 너무 굵다. 식용 소금으로는 적절치 않다. 6월의 날씨에 염전에서 몸을 만든 소금이 좋다. 발 좋은 천일염이 좋은 계절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소금 부족 국가’였다. 소금이 이렇게 흔한데 웬 소금 부족? 소금이 흔한 건 오래되지 않았다. 


반세기 전까지도 소금은 국가의 전매품이었다. ‘전매’는 국가가 생산, 유통, 소비를 모두 관리하는 제도다. ‘국가 독점’이라는 뜻이다. 귀하니 전매품으로 삼았다. 믿기지 않겠지만, 민간의 소금 거래는 불법이었다. “조선 시대 이야기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겠다. 일제강점기에도 그랬고 해방된 후도 한동안 소금은 국가의 전매품이었다. 동아일보 1962년 3월 13일 자 2면의 기사 내용이다. 제목은 “상인 소금 사지 말라”다.     


상인 소금 사지말라 - 전매청서 요망

전매청에서는 12일 鹽指定小賣所(염지정소매소)에서 배급하고 있는 소금 이외는 상인들로부터는 소금을 사지 말라고 전국의 수요자에게 요망하였다. 전국 소매소에 나가고 있는 소금은 118만여 가마니에 달하고 있다. 鹽田(염전)은 금년 5월부터 민영화되며 그때까지는 民間保有鹽(민간보유염)이 있을 수 없다.     


1962년 3월 13일 자다. 불과 두 달 뒤인 5월, 염전이 민영화된다. 그때까지는 ‘소금 국가 전매’다. 민간의 소금 유통은 불법이다. 이걸 지키라는 뜻이다. 소금은 국가의 ‘염지정소매소’에서만 판다. 양도 118만 가마니로 넉넉하다. 굳이 불법 소금을 살 필요가 없다. 민간의 소금 거래는 불법이다. 민영화 전에는 합법적인 ‘전매’ 제도를 따르라는 기사다. 


일제강점기, 해방 후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에도 소금 부족은 여전했다. 아무리 정부가 소금을 관리해도 소금 부족을 해결할 방법은 없다. 생산량이 소비량을 따르지 못하면 부족하다. 소금은 부족하고,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국가로서는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소금은 급료뿐만 아니라, 세금과도 관련이 깊다. 


국가, 관청은 소금을 직접 생산, 민간에 팔고 이득을 취한다. 민간이 소금을 생산해도 마찬가지다. 생산, 유통, 판매에 따른 세금을 걷는다. 소금에 대한 세금이 바로 염세(鹽稅)다. 어느 쪽이나 막대한 이익이 생긴다. 국가가 소금을 주요한 세금 걷는 도구로 생각한 이유다. 비싸면 사지 않으면 될 일이다. 소금은 필수품이다.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9년(1409년) 11월의 기사다.      


전지(傳旨)를 내려 구언(求言)하기를, (중략) 관중(管仲)은 소금을 굽는 이익을 계획하여 그 나라를 부강(富强)하게 하였고, 당(唐)나라 유안(劉晏)은 소금의 이익을 가지고 백성에게 무역하여 그 이익이 농사를 권하는 것보다 배나 되었으니, 그렇다면, 소금의 이익이 매우 중한 것입니다. 지금 국가에서 염장관(鹽場官)을 설치하여 소금을 구워 무역하니, 예전의 유법(遺法)입니다. 그러나, 포(布)라는 물건은 굶주린 사람이 먹을 수 없으니, 원컨대, 서울과 외방의 관염(官鹽)을 모두 쌀로 무역하여 군량(軍糧)을 보충하소서.     


관중(기원전 725?~기원전 645년)은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정치인이다. 무려 2,500년 훨씬 전의 사람이다.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것 중 하나가 바로 소금을 구워, 민간과 거래한 것이다. 당나라 유안도 마찬가지. 소금 생산이 농사짓는 것보다 두 배의 이익을 안겨준다. 


태종 9년은 조선 왕조가 선 지 불과 20년이 되지 않았을 때다. 나라의 기틀을 세우면서 재정을 이야기하고, 소금 굽는 일의 중대함을 설명한다. 심지어 포, 옷감은 먹을 수 없으나, 소금으로 쌀을 구해서 군량미로 쓰자는 말도 나온다. 윗글의 ‘관염(官鹽)’은 국가, 관청에서 관리하는 소금이다. 관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미 민간에서 만드는 ‘사염(私鹽)’도 있었다는 뜻이다. 소금은 늘 부족했고, 한편으로는 중요했다. 


조선 시대 기록에는 ‘소금을 굽는다’는 표현이 나온다. 그렇다. 소금은 염전에서 말리고 졸여서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소금은 굽는 것이었다. 천일염 염전이 처음 만들어진 1907년까지, 한반도의 소금은 굽는 소금 ‘자염(煮鹽)’이었다. 자염의 ‘자(煮)’는 굽다, 익히다, 삶다, 졸인다는 뜻이다. 


바닷물을 퍼서 염도를 높인다. 큰 가마솥에 염도가 높아진 소금물을 붓고, 장작불을 땐다. 솥 안의 바닷물은 졸아들면서 소금 결정체를 만든다. 이 소금이 바로 자염이다. 굳이 ‘전통 소금’을 찾자면 자염이 우리의 전통이다.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며 한반도는 자염을 먹었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그 이전에도 한반도의 소금은 자염이었을 것이다. 


1907년, 인천 주안에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이 섰다. 이미 일제는 한반도를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일본인들의 소개로 대만 등에서 유행하는 방식을 들여왔다. 그 이전에는 모두 자염이었다. 1907년부터 염전에서 소금을 만드는 천일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염전 채염 방식은 인천 주안에서 시작하여 충청 서해안의 안면도, 전북 해안을 거쳐 오늘날 천일염 명산지인 신안 일대까지 확대된다. 한국 천일염의 역사다.  


자염을 만들려면 가마솥, 장작, 바닷물 그리고 자염을 만드는 인력이 필요하다. 무쇠 가마솥도 있지만, 철이 귀한 시절이니 황토로 만든 가마솥도 흔했다. 황토 가마솥은 좋아서 채택한 방식은 아니다. 소금을 만드는 능력이 떨어지지만, 무쇠가 귀하니 황토로 가마솥을 만들었다. 


바닷가에 자염 생산 도구를 설치하면, 바닷물은 흔하다. 문제는 바닷물을 퍼오는 인력이다. 무거운 바닷물을 옮겨야 하고, 장작도 구해야 한다. 사시사철 뜨거운 장작불을 만져야 하고, 소금이 생산되면 옮겨야 한다. 소금이나 바닷물, 장작은 모두 무겁다. 아무도 쉬 소금 만드는 일에 뛰어들지 않는다. 


한 가지 좋은 점도 있었다. 바닷물을 구할 수 있는 한반도의 바닷가 전 지역에서 자염 생산이 가능했다. 동해안의 함경도 해안부터 남해안, 서해안 일대의 대도시 주변에는 모두 자염 생산 설비가 있었다. 그래도 소금은 늘 부족하고 귀했다. 바닷물은 흔하지만, 가마솥, 장작, 자염을 만들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소금은 크게 관염(官鹽)과 사염(私鹽)으로 나눈다. 관염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소금이다. 국가가 인력을 동원하여 소금을 만들고, 관리한다. 사염은 개인의 것이다. 중앙이나 지방의 세력가, 부호들은 스스로 자염 생산 설비를 갖는다. 솥, 나무, 인력을 준비하여 소금을 생산한다. 


소금 생산 판매와 그에 따른 세금 문제는 늘 국가의 중대사로 남아 있었다. 조선 시대 내내 소금 생산, 유통, 판매, 세금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쉬 해결되지 않았다. 


조선 초기인 태조 6년(1397년) 4월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이다. 제목은 “간관이 사대부의 부도 설치 금지 등 시무 및 서정쇄신책 10개조를 건의하다”이다. 그중 소금 관리 문제가 핵심적인 이슈다.       


(전략) 각도의 군사와 백성이 괴롭게 여기는 것은 배 타는 것이 제일인데, 지금 어염(魚鹽)의 이익으로 군식(軍食)에 공급하매 역사는 심히 고되고 양식은 넉넉지 못하니, 그 때문에 조발하고 체번할 때가 되면 온 집이 도망하여 숨는 자가 가끔 있으니, 원컨대 이제부터는 배 타는 군사의 양식을 전과 같이 주고 어염의 이익은 잉여(剩餘)를 만들어서 그 자신을 넉넉하게 하고, 절제사와 만호가 어염의 이름을 칭탁하여 괴롭게 역사시키어 제 몸을 받드는 자는 법으로 엄히 징계하소서.     


배 타는 병사들에게 물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일을 시킨다.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다. 힘든 일을 하는 이들에게 “소금 굽고, 물고기 잡아서 식량으로 보충하자”고 말한다. 결국, 어염에서 나오는 이익으로 군대의 식사를 부담한다. 일은 힘들고 양식은 넉넉지 않다. 도리가 없다. 징병을 피한다. 소금 굽는 일, 물고기 잡는 일을 별도로 하면 그 이익은 모두 잉여금으로 병사들에게 별도로 지급하자는 내용이다. 


소금 굽는 일을 피하니 군인, 승려, 하층민 등을 강제 동원하여 소금을 구웠다. 조선 초기에 이미 이런 ‘개선책’이 나오지만, 소금 생산, 판매, 세금, 이익 배분은 쉬 고쳐지지 않는다. 


조선 후기 실학자 농암 유수원(1694~1755년)은 실용적, ‘국가 경영 지침서’인 “우서(迂書)”를 남겼다. “우서”에도 소금 관련 정책, 세금 등에 관한 내용이 상세하게 나타난다. 농암은 영조 시절 벼슬살이를 했다. 불행히도, 농암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농암은 말년에 역모에 휘말렸다. 그의 국가 경영정책도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농암의 “우서” 중 일부다.       


(전략) 소금에 관계되는 일에는 반드시 그 법이 있어야 한다. 법이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조지(竈地 자염(煮鹽)하는 땅)에 등급을 두고 초장(草場)에 금령을 펴는 일, 염정(鹽丁)에게는 휼전(恤典)을 베풀고 염상(鹽商)에게는 정세(征稅)하는 일 등등에 대한 칙례(則例)를 (후략)     


불행히도 농암의 시절에도 소금에 대한 정확한 법체계가 없었다. 염정(鹽丁)은 소금의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염한(鹽漢)이라고도 한다. 농암 유수원의 주장은 간단하다. 국가가 염정에게 제대로 급료를 주고, 소금 생산, 유통, 판매 등 일체를 제대로 관리하자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금과 소금 생산 판매 이익은 국고에 큰 도움이 된다. 


1907년 주안의 천일염 생산으로 한반도의 소금은 자염에서 천일염으로 바뀐다. 소금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소금 부족은 아니지만 싼 소금이 수입되고, 여전히 사람들은 정제염과 천일염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 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올린 한식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용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본 칼럼은 한국음식문화 누리집(www.kculture.or.kr/main/hansikcultur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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