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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식문화진흥 Jul 30. 2020

수반(水飯)의 의미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열 살 남짓 꼬마였다. 학교는 시오리길. 하굣길. 모두 들일을 나갔으니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텃밭에서 오이, 고추, 깻잎 등을 딴다. 아침에 먹고 남긴 된장찌개와 날된장. 시렁에 매달아 둔 보리밥은 슬슬 쉰내가 난다. 보리밥을 씻고, 이가 시린 우물물을 더한다. 물에 만 보리밥이다. 이게 ‘수반(水飯)’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있는 음식임은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수반은 오랫동안 먹었던 ‘정식 음식’이었다. 간편식, 때로는 접대용 음식이었다. 엉뚱하게 정치판에 들어가서 묘한 역할(?)을 하기도 하고, 환자의 보양식으로도 쓰였다. 


울화병이 생기면 정식으로 식사를 챙기기 힘들다. 먹을 수도 없다. 물에 밥을 말아 훌훌 먹었다. 인스턴트 음식이면서 대체식이기도 했다. 오늘날로 치자면 HMR(가정대체식, home meal replacement)이자 CMR(간편대체식, convenient meal replacement)이기도 했다. 


수반은 이미 고려 시대 기록에 나타난다. 고려의 ‘먹보 영감’ 목은 이색(1328~1396년)의 시 ‘장 서경(張西京)이 건어(乾魚)를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붓을 달려 쓰다’이다. (“목은시고” 제 25권)     


한더위 가난한 살림 수반(水飯)을 먹을 때 얼린 생선 말린 것이 늘 생각났는데
가을에 얻어 먹어도 역시 나쁘지 않군 긴 허리 살살 씹으며 짧은 시를 읊노라     


가난한 살림살이니 별다른 반찬을 마련할 수도 없다. 무더운 날씨, 입맛이 없으니 그저 수반이다. 


언제부터인가, ‘녹찻물에 밥을 말고 보리굴비를 반찬으로’가 유행했다. 녹찻물 수반, 가정에서 만들기는 버거운 일이다. 수반은 만드는 이나 먹는 이 모두 편하게 간편식으로 먹자는 것인데, 굳이 녹찻물에 보리굴비를 찾을 일은 아니다. 


오히려, 목은은 여름철에 수반을 먹을 때마다 늘 건어물이 생각났지만 못 먹었다고 했다. 지인이 건어를 보내 주어서 가을에 먹는다. “여름철이 별미이지만, 가을에 먹어도 좋다”라고 읊는다. 


때로는 수반이 아주 그럴듯한 음식이 된다. 


“목은시고” 제 29권에는 목은이 여러 재추(宰樞), 기로(耆老)들을 찾아다니고, 마침내 계림(鷄林)의 이 정당(李政堂) 집을 찾아가서 수반(水飯)을 먹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재추는 중추원 등의 고위직 벼슬아치, 기로는 나이 들어 은퇴할 무렵의 혹은 은퇴한 고위직 벼슬아치를 이른다. 이때 남긴 시의 끝부분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솔꽃이 대지를 비춰 주는 계림의 저택에서
기장밥이 소(酥) 같은데 찬물을 또 대었다나
松花照地鷄林宅 黍飯如酥灌冷泉     


‘이 정당’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재추, 기로에 속하는 노대신이었을 것이다. 이 정당의 저택에서 목은은, 술과 밥을 대접받는다. 그 음식 중 하나가 바로 ‘수반’이다. ‘소(酥)’는 우유로 발효 시켜 만든 음식을 이른다. 오늘날 버터 혹은 치즈 등과 비슷하다. 때로는 우유로 끓인 타락죽 등을 이르기도 한다. 맛있는 고급 음식을 이른다. 


기장 밥은 ‘소’처럼 부드럽고 맛있다. 이미 충분히 부드럽고 맛있는 기장밥에, 또 차가운 물을 더한다. 수반이다. 상당히 맛있고 먹기 좋다. 시의 끝부분에서 목은은 ‘이 정당 댁에서 먹었던 기장밥 수반’을 떠올린다. 여러 숱한 음식 중에서 떠올릴 정도로 수반은 괜찮은 음식이었다. 그저 물에 만 식은 밥을 생각할 건 아니다.


수반에서 엉뚱하게도 ‘정치’의 냄새가 날 때도 있다. 성종 1년 5월 29일(음력)부터 7월 8일까지 한 달 이상 동안 “조선왕조실록”에 수반이 연이어 등장한다. 전무후무한 일이다. 국왕의 수반을 두고, 여러 번 논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히, 드문 일이다. 


성종 1년(1470년) 5월 29일의 기록이다. “전교하기를, “가뭄이 심하니 이제부터 각전(各殿)의 낮 수라(水剌)는 단지 수반(水飯)만 올리게 하라”는 내용이다. 각전이라고 했으니 국왕뿐만 아니라, 대비전, 중궁전 등도 포함한다. 대궐의 주요 전각의 점심을 수반으로 하라는 뜻이다. 


며칠 후인 6월 1일, 이번엔 ‘수반 반대’의 기록이 나타난다. 

     

원상(院相) 최항(崔恒), 김질(金礩)이 아뢰기를, “근래 날씨가 가뭄으로 인하여 감선(減膳)하신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지금 또 낮에 수반(水飯)을 올리도록 하시니, 선왕조(先王朝)의 감선(減膳)한 것도 이러한 데 이르지는 아니하였습니다.” 하니 전지(傳旨)하기를, “세종조(世宗朝)에는 비록 풍년이 들었더라도 수반(水飯)을 올렸는데, 지금 수반을 쓴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였다. 김질이 말하기를, “대저 비위(脾胃)는 찬 것을 싫어하므로, 수반(水飯)이 비위를 상할까 염려하는데, 보통 사람에게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거늘, 하물며 지존(至尊)이겠습니까?” 하니 전지하기를, “경(卿)의 말과 같다면 매양 건식(乾食)을 올려야 하겠는가?” 하였다.   

  

성종은 한해 전인 1469년 11월에 즉위했다. 겨우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 즉위했을 때 불과 열세 살의 어린아이. 5월 29일의 지시를 보면 ‘각전을 모두 포함’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국왕이지만 아직 수렴통치 기간이다.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 씨가 수렴통치를 하던 시절이다. 수렴통치는 이로부터 무려 6년 후인 1476년에 끝난다. 수렴통치뿐만 아니라 노대신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던 시절이다. 조선 시대로서는 드물게 ‘원상 회의’가 있었고, 궁중의 ‘어른들’도 많았던 시절이다.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스트레스는 심했을 것이다. 궁궐의 어른들과 신숙주, 한명회 등 노대신들이 즐비했다. 갓 등극한 어린 왕은 힘이 없었고, 압박만 가득했을 것이다. 


6월 1일의 기록도 온전히 성종의 의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국왕보다 윗전인 궁궐의 각 전각까지 포함한 것을 보면 수렴청정 중인 정희왕후의 의견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6월 1일의 기록 중에 “매양(늘) 건식을 올려야 하는가?”라는 대답은 놀랍다. 정희왕후의 의견인지, 국왕 성종의 의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신하의 건의에 목멘 소리로 “그럼 늘 건식?”이라고 되묻는다. 투정 혹은 억지 같기도 하다. 


일주일 후인, 7월 8일 원상과 승지들이 다시 ‘정상적인 음식으로 회복’을 건의한다.       


원상(院相)과 여러 승지(承旨)가 아뢰기를, “근일에 우택(雨澤)이 두루 흡족하여 전곡(田穀)이 다소 익었으니, 청컨대 어선(御膳)을 회복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지하기를, “감선(減膳)하는 것은 가뭄 기운 때문이 아니다. 지금 진어(進御)하는 것도 남아도는데, 낮에 수반(水飯)을 올리는 것은 더운 날에나 알맞은 것이다” 하였다.   


도무지 왜 이토록 수반을 고집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원로대신들과 대리청정 중인 대비 혹은 성종 사이에 뭔가 틀어진 일이 있는 것 같지만, 뚜렷한 기록이 없으니 알 수는 없다. 다만 ‘상당히 특이하다’는 느낌은 든다. 

수반은 오랫동안 먹었던 정식음식이었다. 엉뚱하게 정치판에 들어가서 묘한 역할(?)을 하기도 하고 환자의 보양식으로도 쓰였다.

성종의 ‘수반 사랑’은 십 년이 지난 다음에도 나타난다. 성종 12년(1481년) 7월 12일의 기록이다.   

   

승정원(承政院)에 전교(傳敎)하기를, “가뭄이 이미 매우 심하니, 경기(京畿)에서 오전(五殿)에 진상하는 어육(魚肉)을 감면하고, 또 나와 중궁(中宮)의 낮 수라(水剌)는 수반(水飯)만을 올리라.” 하니, 승정원과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가 경기에서 진상하는 것을 감면하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수렴청정이 끝났을 시기다. 성종이 25세다. 제법 어엿한 국왕의 풍모가 드러났을 것이다. 오전(五殿)은 궁궐의 다섯 주요 전각이다. 여기에는 성종에게 할머니인 세조 왕비 정희왕후, 친어머니 소혜왕후 한 씨(인수대비), 예종의 비 안순왕후 한 씨의 거처와 국왕 성종의 대전, 왕비가 머무는 중궁전을 포함한다. 


국왕과 중궁은 여전히 수반이다. 수반은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울화병 기질이 있을 때 먹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종은 수반을 특별히 즐겼던 왕이다. 


원로대신들과 할머니, 어머니, 숙모 등으로 스트레스는 심했을 것이다. 마음의 울화를 견디지 못하면 수반, 물에 만 밥을 찾는다. 신하들이 여러 차례 반대하는데, 끝내 수반을 찾는다. 정치적인 항의의 의미도 있지 않았을까, 짐작하지만 정확히 알 도리는 없다. 분명한 것은 유달리 수반을 찾는 일이 잦았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1575~1641년)도 스트레스가 심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6년(1628년) 2월 11일의 기록이다. 광해군은 강화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강화(江華)의 위리 안치시킨 곳의 별장 권득수가 치계하기를, “광해(光海)가 삼시 끼니에 물에 말은 밥을 한두 숟갈 뜨는 데 불과할 뿐이고[不過水飯一二匙] 간혹 벽을 쓸면서 통곡하는데 기력이 쇠진하여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 지경입니다.” (후략)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왕이다. 물에 만 밥, 수반을 먹을 수밖에 없다. 그것도 그저 한두 숟가락이다. 정치에 대한 야망도 있고, 자신이 만들고 싶은 나라도 있었던 왕이다. 젊은 나이에 왕좌에서 쫓겨나 ‘죄인’이 되었다. 울화병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울화, 스트레스가 아니라 애틋한 효심을 보여주는 수반도 있다. 정조대왕(1752~1800년)의 수반이다.  

    

끝없는 창오의 구름 만 겹이나 깊어라
선왕께 정성 바칠 곳 어디에도 없네
비석 뒤에서 수반 들고 더디 더디 출발하노니
해마다 격식 갖춤은 소자의 마음이라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 화성으로 이전, 현륭원으로 만든 것은 1789년이다. 이로부터 승하하는 1800년까지, 정조는 13차례나 현륭원을 들른다. 위 시는 그중 어느 해 정조가 지은 것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석 뒤에서 ‘간편식’인 수반을 먹고 가능하면 오래 머물고, 늦게 출발한다.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오래 머물고자 하는 정조의 마음이 엿보인다. 수반은 정조의 효심이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 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올린 한식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용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본 칼럼은 한국음식문화 누리집(www.kculture.or.kr/main/hansikcultur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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