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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식문화진흥 Aug 07. 2020

얼음이야기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그까짓 얼음, 없으면 쓰지 않으면 될 일이다. 얼음이야 흔하지 않으냐, 고 이야기할 것은 아니다. 냉장, 냉동고가 흔해진 것은 1980년대 이후다. 그 이전에는 얼음을 파는 가게도 있었다. 여름철 수박이라도 먹으려면 집안의 꼬마들이 동네 얼음 가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덩어리 얼음에 바늘을 꽂고 망치로 조심스레 톡톡 내리쳤다. 1970년대까지도 동네 골목마다 얼음 가게가 있었다. 얼음 만드는 공장이 있었고, 동네 얼음 가게는, 말하자면, 소매점이었다.


조선 시대에야 말할 것도 없다. 얼음은 귀했다. 지체 높은 이들, 세도가들이야 얼음을 구할 수 있었지만, 일반 세민(細民)들은 얼음 보기가 절대 쉽지 않았다. 얼음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제빙 공장이 없었으니 자연산 얼음을 구해서, 보관하다가 사용했다. 겨울철에 얼음을 채취해서 1년 내내 보관, 사용했다. 


왜 얼음이 필요했을까?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다. 제사 모시고, 손님맞이 하려면 음식을 장만해야 한다. 날이 더워지면 모든 음식이 쉬 상한다. 불도 시원찮은 판에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만들고, 바로 내놓을 수는 없다. 크고 작은 행사에 사용하는 음식들은 며칠 전부터 만드는 것이 상례다. 미리 장만하는 음식들은 반드시 얼음이 있어야 한다. 식재료나 음식 보관에 얼음은 필수적이다.


가장 큰 제사는 왕실 종묘의 제사, 공자 사당의 제사다. 왕실의 권위는 선대 왕들한테서 나온다. 종묘는 왕실의 근본이다. 종묘 제사는 가장 큰 제사다. 


조선은 유학, 유교의 나라, 사대부의 나라다. 왕부터 말단 신하들까지 모두 사대부다. 중앙에는 성균관이, 지방에는 향교(鄕校)가 있다. 공자 사당의 제사는 가장 귀한 제사다. 지방 관청에서 별도의 빙고를 관리한 까닭이다. 


더하여 국가나 민간 모두 크고 작은 행사가 있다. 국가에는 외국에서 오는 사신이 있고, 집안에도 늘 손님들이 온다. ‘접빈객’이다. 손님맞이는 소중한 행사다. 


모두 음식이 필요하다. 얼음도 필요하다. 


얼음을 만든 제빙 공장도 없던 시절이다. 자연의 얼음을 ‘채취’하는 수밖에 없다. 한양 도성의 얼음은 모두 한강에서 채취했다. 지금 동호대교, 옥수동 앞의 한강이 두모포(豆毛浦)다. 두모포의 얼음이 가장 좋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양력 12월을 넘어서면서 얼음의 두께가 적절한 시기, 얼음을 채취한다. 제빙이 아니라 채빙(採氷)이다. ‘얼음을 캔다’라고도 표현한다. 꽝꽝 언 한강의 얼음을 규격대로 채취한 다음, 보관 장소인 동빙고와 서빙고 등으로 나른다. 


동빙고는 ‘미리 정해진 행사’에 사용하는 얼음을 보관한다. 종묘 제사나 각종 왕실의 제사 등은 미리 정해진 날짜에 치른다. 동빙고의 얼음을 사용한다. 


서빙고가 동빙고보다 8-10배 정도 컸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서빙고의 얼음은 왕실이나 국가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각종 행사와 왕실의 일상생활에도 사용했다. 관청마다 얼음을 나눠주고 관료들에게도 적절한 양을 나눠주었다. 얼음을 나누는 일은 반빙(頒氷)이다. 관료들의 직급에 맞춰 얼음을 나눠주었고, 옥살이하는 죄수들에게도 일정량을 나누어 주었다. 


얼음도 국가가 통제하는 관빙(官氷)이 있고, 민간이 사사로이 관리하는 사빙(私氷)이 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사빙, 사빙고(私氷庫)는 점점 더 늘어난다. 수요는 늘어나고 공급은 부족하니 당연히 불법, 탈법, 합법을 넘나드는 사빙, 사빙고가 활개를 쳤다. 


관빙이든 사빙이든 누군가가 겨울철 추운 강에서 얼음을 채취해야 한다. 얼음을 떠내는 일은 ‘채빙(採氷)’이고, 채빙하는 이들은 빙부(氷夫) 혹은 빙정(氷丁)이라 불렀다. 힘들여 얼음 떠는 이다.  

(좌) 석빙고의 모습. (우) 석빙고의 내부 모습. 돌로 쌓았고 영구 사용이 가능하다.

농암 김창협(1651~1708년)의 “얼음 깨는 노래”(농암집 제1권_시))에는 빙부들의 얼음 채취하는 모습 등이 잘 드러나 있다. 긴 시를 인용한다.      


동지섣달 한강 물 얼음 굳게 얼어붙자 
천 사람 만 사람이 강위로 나와서는 
도끼 자귀 쩡쩡쩡 어지럽게 깎아내니 (중략) 
쌓인 음기 매섭게 사람 뼛속 엄습한다 
아침마다 등에 지고 빙고[凌陰, 능음]로 들어가고
밤이면 망치 끌 챙겨들고 강 한복판에 모이누나 
낮은 짧고 밤은 길어 밤에도 쉬지 못하고
메기고 받는 소리 강 가운데 퍼지는데
정강이 드러난 짧은 옷에 짚신조차 신지 않아
강상이라 매서운 바람 손가락이 떨어질 듯
고루 거각 오뉴월 푹푹 찌는 무더위에
미인의 흰 손바닥 맑은 얼음 쥐어주고
난도 쳐서 부숴서 온 좌석에 나눠줄 제
느닷없이 맑은 날에 싸라기눈 흩날린다
더위 모르고 즐기는 당에 가득 저 사람들
얼음 깨는 이 노고를 그 누가 언급하리
그대 아니 보았는가, 길가에 더위 먹어 죽은 백성
대부분이 강 가운데 얼음 깨던 사람이라네     


마치 그림처럼 빙부들의 힘든 삶을 그렸다. 동짓달이 시작되면 얼음 뜨는 일이 시작된다. “조선왕조실록_세종실록_세종지리지”에는 ‘빙고(氷庫)’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곧 예전의 얼음집[淩陰, 능음]이다. 하나는 두모포(豆毛浦)에 있으니, 나라 제향에 쓸 얼음을 바치고, 하나는 한강 아래 백목동(栢木洞)에 있으니, 어선(御膳), 나라 손님 접대 또는 백관(百官)에게 나누어 줄 얼음을 바친다”라고 했다. 두모포는 현재 서울 옥수동 두뭇개를 이르고, 백목동은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둔지산 잣나무골이다. 둔지산은 남산과 한강을 잇는 마지막 작은 동산이다. 


‘능음’은 빙고의 다른 이름이다. 


빙부들은 정강이가 드러나는 짧은 옷을 입고, 한겨울 한강 위에서 얼음을 채취한다. 능음, 빙고로 옮기는 일도 이들의 몫이다. 짚신도 없이,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겪으며 겨우 내내 얼음을 뜬다. 이 얼음을 두 곳의 빙고에 보관했다가 여름 내내 사용한다. 빙부는 힘든 일이니 서로 피하려고 했다. 적절한 삯을 주면 한강 인근 용산, 마포 일대의 주민들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제대로 된 임금 없이 군인, 승려, 노비들을 동원하는 일이 잦았다. 


인조 2년(1624년) 12월 22일의 “인조실록”에는 희한한 사건이 나타난다. 기사의 제목은 “한강가의 주민들이 서빙고를 불태우다”이다. 한강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서빙고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한강 가의 주민들이 서빙고(西氷庫)를 불태웠으므로
중사(中使)와 사관(史官)을 보내 적간(摘奸)하였다.
강가의 주민들은 폐조 때부터 얼음 저장하는 고역(雇役)을
기화로 이득을 취하며 국고의 곡식을 훔쳐 먹어 왔는데,
이제 간사하게 외람한 짓하는 것을 금단하자,
이득을 놓치게 된 것을 원망하여 밤을 틈타 불을 지른 것이다.      


사건의 전개가 희한하다. 국가 시설에 불을 질렀으면 형사 사건이다. 당연히 포도청이 나선다. ‘중사’와 ‘사관’이 나서서 은밀히 알아본다. 중사는 환관이다. 사관은 역사적인 내용을 기록하는 이다. ‘적간’은 수소문하여 사건의 실체를 찾는 걸 말한다. 임금의 최측근 중 하나인 중사와 사관이 사건을 캐묻는다. ‘폐조’는 임금 자리에서 쫓겨난 광해군이다.


내용은 더 황당하다. 강가의 주민들이 광해군 시절, 얼음 저장하는 고역을 빌미로 국고의 곡식을 훔쳐 먹었다고 했다. 그런데 금하니 이득을 놓치는 일을 원망하며 불을 질렀다고 했다. 


광해군 시절, 한강 주변의 가난한 이들은 힘든 얼음 일을 하고 적절한 보상을 받았을 것이다.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이들은 임금이 바뀌면서 그 일을 더 하지 못했다. 그리고 원망 끝에 서빙고에 불을 질렀다. 혹시라도 모반의 징조가 있을까 두려워 환관과 사관을 보냈을 것이다. 


얼음 뜨는 일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라도 있으면, 힘든 일이라도 하는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일은 힘들고 보상은 없다. 모두 기피한다. 


조선 시대에만 그랬을까? 그렇지 않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 1월 3일의 동아일보 기사다. 제목이 ‘연강운빙부(沿江運氷夫) 천여 명 맹파(盟罷), 원인은 임금 감하(減下) 문제(고양)’이다. 


장소는 고양이다. 한강 변, 임진강 변을 끼고 있는 지역이다. 서울(경성)과 가까운 곳이다. 이들이 운반하는 물자는 모두 서울에서 소비되었을 것이다. 이 지역의 얼음 운반하는 이들이 동맹 파업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임금을 깎으니 파업을 시작한 것이다. 얼음을 뜨거나 운반하는 일은 늘 힘들었다. 적절한 보상이 없으면 불을 지르거나 동맹파업을 하는 수밖에 없다. 


조선 시대 조정에서도 얼음 관련 부역이 힘든 줄 잘 알고 있었다. 법전에는 정확하게 빙부들에 대한 처우를 표시했다. 힘든 얼음 일을 하는 빙부들에게는 경작할 논밭[氷夫田, 빙부전]을 주기도 했고 일상적으로 술과 후한 밥을 내렸다. 


조선 후기 때는 국가가 마련하는 얼음과 별도로 민간에서 얼음을 사기도 했다. 영조 때는 부역으로 궁중에 바치는 얼음의 양을 반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현금으로 사는 방식도 나왔다. 당시 1년간 필요한 얼음이 40,000여 정이고 부역을 통하여 직접 구하는 얼음이 30,000여 정이었다. ‘정’은 얼음덩어리다. 규격도 정확하게 적었다. 얼음 두께가 4치(약 12cm) 정도였다.(“만기요람”)  


겨울에 얼음을 창고에 보관, 여름에 사용하는 역사는 오래되었다. 안정복(1721~1791년)은 “동사강목”에서 신라 지증왕 6년(505년)에 이미 얼음을 저장했다고 적었다. “삼국유사”에서는 그 이전인 신라 3대 왕 유리왕(?~57년) 때 이미 장빙고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안정복은, 지증왕 때 얼음을 저장했다는 ‘설’을 믿는다고 했다. 


고려 시대에는 개성을 비롯하여 평양 등지에 얼음 창고를 만들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지방 관청에서도 별도의 얼음 창고를 운영했다. “고려사절요”에는 고려 고종 3년(1243년)에 “무신 최이가 사사로이 얼음을 캐내 얼음 창고에 저장하려고 백성들을 괴롭혔다”고 했다. 조선 후기 문신 심상규(1766~1838년)도 “만기요람”에서 조선의 장빙고가 고려의 제도를 물려받았음을 정확히 밝힌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 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올린 한식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용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본 칼럼은 한국음식문화 누리집(www.kculture.or.kr/main/hansikcultur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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