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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식문화진흥 Aug 14. 2020

돼지고기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억울할 것은 없다. 제 깜냥이 그 정도다. 돼지, 돼지고기 이야기다. 

돼지는, 흔히, 미련한 동물로 여긴다. 살이 퉁퉁하다. 몸이 거북할 정도로 뒤뚱거린다. 실제 미련해 보인다. 종일 먹는다. 늘 배가 고픈 듯이 꿀꿀거린다. 지능이 그리 낮지는 않다지만, 미련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돼지는 미련한 동물로 여겼고, 여긴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23년(1697년) 2월 14일의 기록이다.      


(전략) 이돈(李墩)의 사람됨은 비루하고 잗달며 권세에 아부하는 데에 교묘하여
나이가 오도일보다 세 살이나 많은데도 굴복하여
오도일을 섬기기를 자식이나 조카와 다름이 없이 하였다.
오도일도 그를 업신여겨 번번이 부를 때는 돈아(豚兒)라고 하였는데,
돈(豚) 자가 돈(墩)자와 음(音)이 같아서이다. (후략)


‘돈(豚)’은 돼지다. ‘돈아(豚兒)’는 새끼 돼지, 돼지 새끼다. 이돈은 오도일보다 세 살 위다. 평소 이돈은 조카나 아들이나 되는 양, 나이 어린 오도일을 극진히 섬기었다. 오도일은 자신의 권세를 믿고, 이돈을 ‘돈아(豚兒)’라고 불렀다는 내용이다.


‘돈아’는 돼지 새끼, 새끼 돼지를 뜻하지만, 자기 아들을 남에게 낮추어 부를 때 쓴다. 

글에서는 이돈의 ‘돈(墩)’이 돼지 ‘돈(豚)’과 한글 음이 같아서, 라고 적었다. 이러나저러나 나이 많은 이를 건방지게 ‘내 아들’이라고 불렀다. 욕먹을 만한 행동거지다. 


‘돈아’는 ‘마치 돼지같이 미련한 제 자식’이라는 뜻이다. 자기 자식을 남에게 낮추어 부를 때 상용하는 표현이었다. 돼지는 미련함의 표식이었다. 낮추어 부를 때 ‘돈아’였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4년(1626년) 6월의 기록이다. 명나라에서 사신이 왔고, 그 사신을 맞는 과정에 당시 세자였던 소현세자와 중국 사신이 만나는 과정이다. 제목은 “왕세자와 중국 사신이 상견하다”이다.      


상이 말하기를, “돈아(豚兒)가 예절에 익숙하지 못하고
또 책명(冊命)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감히 대인을 뵙도록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대인의 명을 어기기가 어려워 와서 알현하게 하고자 하니,
대인께서 불러다 가르쳐 주십시오.”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후략)     


‘상(上)’은 임금이다. 한 나라의 국왕이라도 외국 사신, 그것도 사대의 나라 사신 앞에서는 아들인 왕세자를 ‘돈아’라고 불렀다. 역시 ‘미련하고 미욱한 아들’이라는 뜻이다. 겸양의 표시다. 


한반도의 돼지는 찬밥 신세였다. 돼지는, 불행히도, 인간과 먹이를 다툰다. 사람이 먹는 음식, 사람이 먹다 남긴 찌꺼기를 먹는다. 사람이 먹는 식량, 음식도 부족한 시절이다. 돼지를 위한 별도의 먹이, 사료도 없었다. 벼를 도정하면 겉껍질과 속껍질이 나온다. 등겨는 속껍질을 벗겨낸 것이다. 돼지 먹이다. 가난한 시절에는 이 속껍질을 도정한 등겨도 귀했다. 이래저래 돼지의 먹이는 귀했다. 돼지를 기르는 일도 힘들었다. 


한반도의 기후는 돼지 생장에 좋지 않았다. 돼지는 따뜻하고, 습도가 높으며, 수분이 많은 곳에서 잘 자란다. 바닥이 축축하고, 더워야 한다. 한반도의 겨울은 춥다. 1년 내내 건조한 날씨가 이어진다. 여름 한 철 고온다습하지만, 나머지 기간은 건조하고 춥다. 돼지에게 치명적이다. 품종개량도 제한적이었다. 야생의 돼지를 집에서 기른다. 몸집이 크고 잘 자라는 녀석들을 교배시켜 새끼를 낳게 하고, 그 돼지를 집에서 기르면서 ‘집돼지’로 만들었다. 오늘날 같은 품종개량은 없었던 시절이다. 그나마 중국의 돼지품종, 품종 개량 방식, 양돈기술이 앞섰다.


조선왕조실록”_단종 1년(1453년) 9월 20일의 기사다. ‘탐관오리’라고 적시한 세 사람의 벼슬아치에 대한 처벌이 조정에서 있었다. 제목은 “사헌부에서 탐관오리 유경로, 김제남, 이흥덕을 징계하기를 청하다”이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중략) 이흥덕은 율(律)이
장 1백 대와 유(流) 3천리에 해당하고, (중략)”
(중략)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이흥덕은 장(杖) 80대에 속(贖)을 거두고
파직(罷職)하고 그대로 벼슬하게 하며 ,(중략)”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이흥덕은 일찍이 중국 조정에 왕래하여
양계(養鷄)와 양돈(養豚)을 알기 때문에 세종대왕께서 명하여
분예빈시(分禮賓寺)를 맡게 하였는데,
이흥덕이 힘을 다해 일을 조치하고 공해(公廨)를 지어서
이미 나타난 공적(功績)이 있고, 또 자기에게 들어온 장물(贓物)이 없기 때문에
파직시켜 그대로 벼슬하게 하여 두려움을 알게 할 것이며, (후략)  


이흥덕 등에 대한 처벌 상소는 이미 그 이전 해인 단종 즉위 원년(1452년) 12월 29일부터 시작되었다. 무려 9개월을 끌다가 처벌을 받았다. 처음 제안된 처벌은 무겁다. 곤장 1백 대에 유배 3천 리다. ‘고신(告身)을 거둔다’고 해서 앞으로 벼슬살이를 영영 하지 못하는 벌도 포함되어 있었다. 


벌은 급격히 낮아진다. 장 80대에, 속을 바치고, 파직하되 고신을 거두지는 않는다. 속은 속전(贖錢)이다. 오늘날의 벌금과 닮았다. 일정한 벌금을 내고 잠시 벼슬살이를 멈추면 된다. 일정 기간 지나면,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다.


유배 생활도 없어지고, 대단한 처벌이 따르지도 않는다. 벌금형 정도다. 왜 그랬을까? 이흥덕의 전후 활동을 보면 정치적인 배려도 있었던 것 같지만 결정적, 표면적 이유는 ‘세종대왕 시절 양계, 양돈을 익혀 국가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점이다. 


기록을 보면, 이흥덕은 원래 직업이 통사(通使), 통역사다. 중국 왕래가 잦았다. 그 과정에 중국의 선진적인 양돈, 양계 기술을 봤을 것이다. 그걸 한반도에 접목시킨다. 이 공로로 세종대왕이 귀히 여긴 벼슬아치였다. ‘감형’의 표면적인 이유는, ‘양계, 양돈’이다. 


조선 초기까지도 여전히 양돈은 선진적인 고급 기술이었다. 돼지 기르기가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우리 민족에게 최고의 식재료는 쇠고기다. 쇠고기에 대한 열망은 뜨거웠다. 쇠고기를 좋아하면 쇠고기를 먹으면 될 일이다. 기르기도 쉽지 않고, 쇠고기보다는 등급이 낮은 돼지고기를 굳이 고집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소와 쇠고기가 귀했기 때문이다. 농경 사회에서 ‘소’는 노동력이지 식용의 고기가 아니다.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 모두 소를 노동력으로 여겼다. 농사의 필수품이니 함부로 도축하는 것을 금했다. 조선 시대에는‘금육(禁肉)’으로 여겼다. 고려 시대도 마찬가지. “불교의 불살생을 지키기 위하여 도축을 금했다”는 말은 엉터리다. 소나, 돼지, 닭 모두 생명체다. 굳이 소만 들먹일 것은 아니다. 불교가 아니라, 농사 때문이었다. 소의 도축을 국가가 금했다. ‘꿩 대신 닭’이 아니라 ‘소 대신 돼지’였다. 돼지는, 어쩔 수 없는 차선이다.   


“고려사절요” 제34권 공양왕 1년(1389년)의 기사다. 소를 도축하는 일과 돼지, 닭을 기르는 일이 나타난다. 긴 글이지만 소개한다.      


(전략) 먹는 것은 백성에게 제일 소중한 것이 되고 곡식은 소[牛]로 인하여 생산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나라에는 소 잡는 것을 금지하는 도감[禁殺都監, 금살도감]이 있으니, 이는 농사를 소중하게 여기고 백성의 생계를 후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달단(韃靼)의 수척(水尺)은 소를 잡는 것으로써 농사를 짓는 것에 대신하니, 서북면이 더욱 심하여 주ㆍ군의 각 참(站)마다 모두 소를 잡아서 손님을 먹여도 이를 금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금살도감과 주ㆍ군의 수령으로 하여금 금령을 신칙ㆍ시행하게 하되, (중략) 금령을 범한 자는 살인죄로 논죄하시옵소서. (중략) 주ㆍ군에서 위에 바치는 삭선(朔膳)과 사객(使客)을 대접하는 등의 일로 인하여, 비록 한창 바쁜 농사철이라도 농민을 모아서 가시숲 속을 쫓아다니면서 한 달 동안이나 사냥하니, 농사가 시기를 놓쳐서 백성의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한 것은 이 일 때문입니다. 닭과 돼지 같은 가축이라면 우리 안에서 이를 취할 수 있으니 백성에게 소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경기에 계돈장(鷄豚場) 두 곳을 만들어 한 곳은 전구서(典廐署)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여, 종묘와 제사의 쓰임에 이바지하게 하고, 한 곳은 사재시(司宰寺)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여 어주(御廚)에 바치는 것과 빈객의 쓰임에 공급하게 할 것이며, 주ㆍ군과 각 역(驛)에도 모두 이를 기르게 하여 수용을 절약하고 잘 기르며 새끼 가진 짐승을 죽이지 않는다면, 수년이 못 되어서 공상(供上)ㆍ제사ㆍ빈객의 쓰임에 충당되고 우리 백성들의 먹을 것도 풍족하게 될 것이며, 사냥함으로 인하여 농사를 망칠 걱정도 없게 될 것입니다. (후략)     


금살도감은, 소의 도축을 막는 기관이다. 소의 도축을 막기 위하여 국가 차원에서 돼지와 닭은 기르자고 말한다. 방법도 구체적이다. ‘경기에 계돈장(鷄豚場) 두 곳’을 세우자고 건의한다. 조선 시대 이야기도 아니다. 고려 말기 궁중에서 있었던 논의다. 조선도 고려의 이런 제도를 물려받는다. ‘금살도감’은 조선 초기에도 여전히 국가의 주요 부서로 남는다. 소의 도축을 막는다. 필요한 고기는? 역시 돼지나 닭이다.  


제사나 궁궐의 일상적인 생활에 필요한 고기, 외국 사신 접대나 역참 같은 국가 공공기관에서의 소비를 위하여 고기는 필요하다. 그렇다고 소를 도축할 수는 없다. 결국 농사철의 바쁜 농민들이 사냥에 동원된다. 이번에는 농사가 문제가 된다. 사냥에 동원된 농민들은 농사지을 시기를 놓친다. 결국, 마지막 아이디어가 양계, 양돈장을 크게 만들어 국가 기관이 관리하자는 것이다. 닭과 돼지를 기르면 소를 도축하지 않아도 된다. 고기를 마련하기 위하여 굳이 사냥을 하지 않아도 된다. 농민들이 안심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다. 


굳이 돼지고기를 먹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돼지, 닭을 길러서 먹거나 행사에 사용하자고 했다. 돼지고기는 소의 대체품이었다. 


1670년 경에 발간된 것으로 알려진 “음식디미방”에는 돼지고기 요리법이 단 두 가지뿐이다. ‘야제육[野豬肉]’과 ‘가제육[家猪肉]’이다. 17세기 후반에도 여전히 우리는 돼지, 돼지고기와 가깝지 않았다. 돼지고기는 19세기를 넘기면서 조금씩 널리 퍼진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 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올린 한식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용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본 칼럼은 한국음식문화 누리집(www.kculture.or.kr/main/hansikcultur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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